자연 속 ‘예술의 눈’으로…기후위기 해법 찾아요

박수혁 2022. 11. 23. 2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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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양한 분야 예술가·기획자들, 시골서 거주하며 ‘환경예술’ 실천
지난 13일 강원도 화천에서 진행된 ‘예술텃밭 예술가 레지던시-기후변화’ 오픈텃밭에서 학생들이 쌍안경을 들고 새를 관찰하는 모습. 박수혁 기자

중동부전선 최전방인 강원도 화천군 화천읍 신읍리에 있는 문화공간 예술텃밭. 평소 인적이 드문 이곳에 지난 13일 이른 아침부터 초등학교 4~6학년생 10여명이 쌍안경을 목에 건 채 차례로 모습을 드러냈다. 가슴에는 유리딱새·참새·뻐꾸기·붉은머리오목눈이·꿩·파랑새·청둥오리 등이 적힌 이름표를 걸고 있었다.

‘직박구리’란 이름표를 건 이성직 작가가 “새들 모이세요”라고 나지막이 말하자 학생들이 이 작가 뒤를 총총걸음으로 따라나섰다. 길을 나선 지 얼마 되지 않아 한 학생이 소리쳤다. “저기 봐. 새야, 새.” 학생들이 저마다 쌍안경을 들고 관찰을 시작했다. 옆에 있던 학생이 “대박! 새 날아가는 거 봤어요”라고 말하자, 또 다른 학생이 “백로다, 백로”라고 알은체를 했다.

“파랑새는 파랑, 파랑 하고 우나요?” “사람이 꿩도 잡아먹나요?” “새소리는 들리는데 보이지 않아요.” “새들이 이런 것도 먹나요?” 학생들은 동네 한 바퀴를 다 도는 내내 한시도 멈추지 않고 다양한 질문을 쏟아냈다. 이 작가가 말했다. “새는 항상 우리 주위에 있어. 우리에게 이름이 있듯 새도 다 이름이 있지. 근데 새 이름이 뭔지, 어떻게 생겼는지도 우리는 잘 몰라.” 그는 “‘아는 만큼 보인다’는 말처럼 ‘학생들과 새 관찰하기’는 기후위기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 인간과 비인간의 공존을 위한 연습”이라고 기자에게 설명했다.

지난 7월부터 강원도 화천에서 진행된 ‘예술텃밭 예술가 레지던시-기후변화’에 참여한 예술가들의 모습. 황호규 촬영감독 제공

■ 기후위기 시대…예술가는 무엇을? 학생들과 함께 한 새 관찰은 ‘어린이 생태 워크숍―함께 새 하는 중’이란 이름의 프로그램으로 지난 12~13일 진행된 ‘예술텃밭 예술가 레지던시―기후변화’ 오픈텃밭 행사의 하나로 진행됐다.

‘예술텃밭 예술가 레지던시―기후변화’는 기후변화에 맞서는 예술가들의 움직임이다. 연극과 시각예술, 영화, 영상, 책 등 다양한 분야에서 활동 중인 예술가와 기획자 등이 기후변화 문제를 함께 고민하고 ‘예술적 실천’을 통한 해결책을 모색하고자 2020년 시작했다. 레지던시(거주) 형태의 프로젝트인 만큼 해마다 10명 안팎의 예술가들이 ‘예술텃밭’이라는 이름의 창작공간에 거주하며 기후변화를 주제로 한 학습과 고민, 작품활동을 병행하고 있다.

올해도 지난 7월부터 예술가 7명이 참여해 기후·생태·에너지 분야의 전문가 강연, 기후활동가와의 만남, 다큐 영화 관람과 토론, 원자력·풍력발전소 탐방 등의 활동을 진행했으며, 이를 바탕으로 각자 자신의 분야에서 ‘예술적 실천’을 위한 작업을 진행하고 있다. 연말 에 진행되는 ‘오픈텃밭’은 이런 결과물을 시민과 공유하는 발표회인 셈이다.

전윤환 연극연출가와 김지연 작가가 함께 마련한 ‘렉처 퍼포먼스’(강연 형식의 공연)의 한 장면. 박수혁 기자

■ 인구 3.5%가 나서면? 이날 예술텃밭에서는 예술가들의 고민을 함께 공유할 수 있는 다양한 결과물을 만날 수 있었다. 학생들과 새 관찰을 끝내고 예술텃밭 안에 들어서자 전윤환 연극연출가와 김지연 작가가 함께 마련한 ‘렉처 퍼포먼스’(강연 형식의 공연)가 한창이었다. 바닥엔 ‘공정한 전환’ ‘부동산’ ‘과정=결과’ ‘석탄화력발전’ ‘땅값’ ‘새로운’ ‘공공재’ ‘불평등’ ‘값싼’ ‘민영화’ ‘전기는 눈물을 타고 흐른다’ ‘자본주의’ ‘기후위기’ 등의 글자가 적힌 판지 조각들이 흩어져 있었다. 교실 곳곳엔 연탄과 바람개비 등으로 만든 석탄화력발전소와 풍력발전소, 태양광발전소, 원자력발전소 모형이 놓여 있었다.

김지연 작가가 “올해 레지던시에 참여한 예술가들과 함께 고민해온 단어들이다. 각각의 발전소에 어울리는 단어를 짝지어 달라”고 부탁하자 행사에 참석한 시민들은 석탄화력발전소에 ‘기후위기=에너지 문제’ ‘지금 당장’ ‘값싼’ 등의 단어를 붙였다. 원자력발전소엔 ‘직접행동’ ‘안전한’ ‘일석이조’ ‘보이지 않는 위험’ ‘이주요청’ ‘빌 게이츠’ 같은 단어가 짝지어졌다. 반면, 태양광발전소엔 ‘깨끗한’ ‘탄소중립’ ‘변동성’ ‘자급자족’ 등이, 풍력발전소엔 ‘지속가능’ ‘공정한 전환’ ‘분산·분권’ ‘상상력’ ‘덴마크’ 같은 단어가 배치됐다.

발전소와 단어의 짝짓기가 끝나자 참석자들은 각각의 발전소에 붙은 단어들을 주제로 다양한 이야기를 풀어냈다. 김지연 작가는 “기후위기 시대, 석탄화력 중심의 에너지 전환은 불가피하다. 하지만 태양광·풍력 등이 완벽한 대답이 되진 못하고 있다. 에너지 전환 과정에서 불평등 등의 문제가 발생하지 않는 공정한 전환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전체 인구의 3.5%가 비폭력 시위에 나서면 정권이 버틸 수 없다’는 내용의 3.5%의 법칙을 소개한 전윤환 연출가는 “광화문 촛불 때도 3.5%의 법칙이 통했다. 지금은 비록 화천에서의 작은 움직임이지만 주변에 이를 전파하는 노력 등이 더해지면 기후위기를 극복할 강력한 전환을 이룰 수 있다고 믿는다”며 적극적인 관심을 호소했다.

이상훈 현대무용가가 ‘1.5’라고 이름을 붙인 공연을 하는 모습. 이씨는 이날 재활용품으로 만든 악기 연주에 맞춰 체온이 올라가는 과정을 온몸으로 표현하며 ‘지구온난화’의 심각성을 알렸다. 박수혁 기자

■ 예술, 질문을 만들다 렉처 퍼포먼스가 끝나고 잠시 뒤 예술텃밭 옥상에선 이상훈 현대무용가가 ‘1.5’라고 이름 붙인 공연을 시작했다. ‘1.5’는 2015년 파리 기후변화협정에서 채택한 지구 온난화 억제 목표인 1.5도를 뜻하는 것이다. 이상훈 무용가는 재활용품으로 만든 악기 연주에 맞춰 체온이 올라가는 과정을 온몸으로 표현하며 ‘지구온난화’의 심각성을 알렸다. 이씨는 공연에 앞서 말없이 ‘당신은 이걸 멈추고 싶으세요?’, ‘당신이 원한다면, 당신은 버튼을 누를 수 있어요’, ‘그러면 모든 게 멈출 거예요’라고 적힌 손팻말을 들고 기후위기 대응 운동에 동참해달라고 호소하기도 했다.

기후위기에 대응하기 위해 공연에 필요한 최소한의 전기를 생산하려고 이동식 태양광발전기를 사용 중인 한윤미 작가의 ‘햇빛충전소’ 모습. 박수혁 기자

예술텃밭 운동장에서 진행된 한윤미 작가의 ‘햇빛충전소’도 눈길을 끌었다. 한 작가는 최근 거리예술 분야에서 비거니즘을 주제로 다양한 공연 창작 활동을 펼치고 있다. 그는 기후위기 대응에 동참하기 위해 공연 중에 조명 등을 사용하지 않고 있으며, 대신 음향 등 최소한의 전기를 생산하기 위해 이동식 태양광발전기를 사용하고 있는 자신의 사례를 소개했다. 태양광을 이용해 전기를 자급자족하며 다른 생명들과 함께 살아갈 것을 제안하기 위한 자리였다.

인간의 욕망이 만든 석유산업 시스템과 그 이면의 모습이 우리에게 어떻게 돌아오는지를 생생하게 보여준 장한나 시각예술작가의 ‘폐플라스틱 전시’에도 시민들의 발걸음이 이어졌다. 장 작가는 버려진 지 오래돼 암석화까지 진행된 폐플라스틱 전시를 통해 인간의 욕망 탓에 환경오염·기후재난이 발생했다는 사실을 고발했다. 장 작가는 “암석화된 플라스틱(뉴 락, New Rock)은 플라스틱을 끊임없이 생산하고, 끊임없이 버리고 있는 인간 탓에 생겨났으며, 이제 플라스틱은 우리 몸에까지 영향을 미치고 있다”고 지적했다. 이 밖에 작곡가 카입은 신문과 사회관계망서비스 등을 통해 수집한 원전과 재생에너지, 기후위기 등에 대한 텍스트가 어떤 감정을 가지는지 파랑과 빨강이라는 색을 통해 시각적으로 표현했으며, 이를 소리로도 변환해 들려줬다.

인간의 욕망이 만든 석유산업 시스템과 그 이면의 모습이 우리에게 어떻게 돌아오는지를 생생하게 보여준 장한나 시각예술작가의 ‘폐플라스틱 전시’ 모습. 황호규 촬영감독 제공

행사를 공동기획한 프로듀서 그룹 ‘도트’의 박지선 피디는 “레지던시 초기만 해도 급박한 전환이 필요하다는 사실은 공감하지만 예술은 그저 미약할 뿐이며, 예술가보다 기후변화 활동가가 되는 것이 더 필요하지 않겠냐는 자조 섞인 한탄까지 나왔다. 하지만 레지던시 참여 작가들의 작업과 목소리가 퍼지면서 다른 예술가들과 영향을 주고받고 있으며, 기후위기는 외면할 수 없는 우리 모두의 책임이라는 인식이 확산되고 있다”고 분위기를 전했다.

김지연 작가는 “자연 그대로의 깨끗한 모습을 품고 있는 화천도 따뜻한 날씨 탓에 축제가 취소되는 등 어느 곳에 있든, 누구도 기후위기의 예외가 될 수 없다. 질문은 문제를 발견하는 동시에 해결 능력도 갖게 한다. 질문을 만들고 건네는 것, 이것이 기후위기 속 예술의 역할”이라고 말했다.

박수혁 기자 psh@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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