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적] 국가(國歌) 침묵, 애국심
국기(國旗)가 선수들의 유니폼뿐만 아니라 시민들의 얼굴과 몸 위에서 하나의 패션이 된다. 국명(國名)과 국가(國歌)를 활용한 응원 구호가 경기장과 거리에서 수시로 울려퍼진다. 세계 어디서나 월드컵 축구대회 기간은 가장 집중적인 애국심의 분출을 보게 되는 때이다. 국론이 나뉘었던 나라가 월드컵을 계기로 단합하기도 하고, 서로 다른 나라들 간의 감정이 나빠지기도 한다. 그런 점에서 월드컵은 정치와 가장 밀접하게 관련 있는 스포츠 행사라고 할 수 있다.
지난 21일 카타르 월드컵 조별리그 B조 이란과 잉글랜드의 경기에서는 좀 색다른 애국심을 보게 됐다. 이란 선수들이 경기 시작 전 자국 국가 연주 때 침묵을 지킨 것이다. 관중석에서는 국가 연주에 야유가 나오는가 하면 ‘여성, 생명, 자유’라는 글씨를 쓴 이란 국기가 펄럭였다. 경기를 앞둔 주말 이란 마하바드 지역에서 정부군이 히잡 의문사에 항의하는 시민들에게 발포해 11명이 숨졌다. 이란에서는 지난 9월 20대 여성 마흐사 아미니의 죽음으로 촉발된 시위로 어린이 40여명을 포함해 300명 이상이 숨졌다. 선수들의 마음도 복잡했을 것이다. 갈고닦은 기량을 4년 만의 월드컵 무대에서 발휘할 기회를 놓치고 싶진 않았을 것이다. 그러면서도 이란 정권에 항의하고, 동료 시민들에게 연대감을 표할 방법을 고민했을 것이다.
이란의 국기(國技)는 레슬링이지만 이란에서 가장 인기 많은 스포츠는 축구이다. 그런 점에서 축구 대표선수들이 국가 제창을 거부한 것은 의미심장하다. 군복 입은 군인이 반전 집회에 동참하는 것과 비슷하다고 할 수 있다. 이란 선수들의 국가 제창 거부 장면이 전 세계적으로 화제가 됐지만 이란 내에서는 삭제되어 유통된 것도 이 때문이다.
정치철학에서 애국심은 권위적 애국심과 민주적 애국심으로 나뉜다. 권위적 애국심이 정권이나 지도자를 중심으로 한 국가에 표하는 무조건적 충성심이라면, 민주적 애국심은 자신의 나라 땅과 사람들, 또는 조국이 지향하는 원칙·가치에 대한 사랑이다. 이란 선수들은 거리에서 체제에 항의하며 죽어가는 동료 시민들을 향한 충성심을 보여줬다. 이러한 행동이야말로 진정한 애국심의 표현이라고 해야 하지 않을까.
손제민 논설위원 jeje17@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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