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종훈의 근대뉴스 오디세이] 100년 전 美 프로야구 올스타팀이 경성에 온 까닭은

2022. 11. 23. 18: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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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종훈 19세기발전소 대표·아키비스트

1920년 매일신보사 후원 조선 첫 야구대회 차별없이 공평한 기회 주는 게임으로 인기 현재의 빈부 격차, 야구 철학이 길 알려줘

SSG랜더스가 2022년 한국시리즈 정상에 올라 한국 야구의 새 역사를 썼다. 스타 선수가 그리 많지 않은 키움 히어로즈의 준우승에도 팬들은 많은 축하를 보내고 있다. 100년 전 야구 경기는 어떤 모습이었을까. 그 때의 야구 경기를 관람해 보자.

1920년 11월 6일자 매일신보는 그해 11월 4일 열린 '제1회 전조선(全朝鮮) 야구대회'를 소개하고 있다. '천지를 진동케 하는 각 처의 응원 소리는 실로 야구전이 생긴 이래에 조선인 간에는 신기록, 용맹하게 적편과 서로 승패를 결단하는 장관'이란 제목의 기사다. "조선의 유사(有史) 이래로 처음 되는 조선 사람의 야구대회의 첫 막이 조선체육회의 주최와 매일신보사 후원 하에 열리게 되었다 함은 이미 여러 차례 보도하였던 바, 예정과 같이 지난 4일 오전 9시부터 시내 배재학당 그라운드에서 열리었다. 당일 아침 8시에 휘문, 경신, 중앙, 보성, 배재 등 다섯 학교의 선수들이 정동 배재학당 그라운드에 화려하게 꾸며 놓은 대회장에 이르러서 장내를 2, 3차 돌아다닌 후, 운동장 한편에 모여서 입장식을 한 후…(중략)…제비뽑기로써 결정한 대로 휘문과 경신팀이 나와 시구식(始球式)이 있었으며, 다음에는 순서를 따라서 위 두 팀의 경쟁이 이원용(李源容) 현홍운(玄鴻運) 신홍우(申鴻雨)씨 등 심판 하에 시작되니, 때는 예정한 시간보다 조금 지체되어 예선 경쟁이 시작되니, 마침 9시 30분경이더라."

이렇게 시작된 야구 경기는 다음 해에 미국인과 야구 시합을 갖는 진기한 경험을 하게 된다. '경성에서 처음으로 흥미 있는 운동 경기'라는 제목의 1921년 10월 21일자 동아일보 기사다. "경성에 있는 미국인 전체로부터 선발하여 조직된 '올 아메리칸'과 중앙체육단의 대항 야구전은 예정과 같이 오늘 오후 3시부터 장쾌한 첫 막을 열게 되었다. 경기할 처소는 당초에 정동 배재학교 운동장으로 정하였으나 서대문 경성중학교 운동장으로 변경하였으며, 당일에 수입되는 매인(每人) 30전의 입장료는 당초에 전부를 세브란스 병원에 기부하기로 하였으나 양편이 협의한 결과 세브란스 병원과 황해도 수재(水災)구제회의 두 곳에 나누어 기부하기로 되었는데, 미국 편에서는 최근에 조선에 건너 온 미국의 선수를 '피취'로 뽑고 부영사(副領事) '빽' 씨가 주장이 되어 전쟁의 준비에 매우 분망하며, 당일 운동장에는 미국인 소년 10여명이 와서 입장자의 편의를 도모하는 등 경성의 미국인 사이에는 작금(昨今)에 이 경기가 한 이야기 거리가 되었으며 조선인 편에서도 운동을 좋아하는 사람은 물론이요 기타 일반 사회에서도 적지 아니한 흥미로써 기대한다더라."

다음 해인 1922년 전조선 야구대회는 제3회를 맞는다. 1922년 10월 7일자 동아일보에 전조선 야구대회 강령과 규정을 소개하는 기사가 실렸다. 대회 강령과 규칙 몇 가지를 살펴본다. △예선 경기 중 4회 말까지 10점 차가 생기면 경기는 종료함 △선수는 필히 유니폼을 착용하고 경기 시각보다 30분 전에 내장(來場)해야함 △'플레이어스 벤취'에 착석하는 자는 선수 11명과 감독자 1명에 한함 △심판은 총히 1922년도 발행의 오사카 아사히(朝日)신문사 운동연감에 따라 판정함 △경기 용구는 동경 미즈노(美津濃)상점의 '오피셜 유니버시티 리그 뽈'을 사용함.

제3회 전조선 야구대회 우승은 배재고보가 차지했다. 결승전에서 숭실과 혈전(血戰)을 벌인 끝에 5대 2로 이겼다. 1911년 야구부를 만든 배재는 1회 대회 때도 우승했었다. 전조선 야구대회는 후에 전국체전으로 확대됐다.

그 해 12월에는 미국 프로 야구팀과의 경기가 경성에서 열렸다. 뉴욕양키스 등에서 선발된 메이저리그 올스타팀이었다. 올스타팀은 전 세계 야구 보급을 위해 '일본(도쿄)-중국(상하이)-필리핀(마닐라)'으로 이어지는 아시아 투어를 계획했다. 당초 조선은 빠져있었다. 조선야구협회 창립을 주도한 이원용과 동경 학우회 야구부 선수였던 박석윤이 일본으로 가서 설득을 했다. 출전료 1000원과 조선 체재 비용을 부담하는 조건에 동의하면서 마침내 경기가 성사됐다.

1922년 12월 7일 올스타 25명이 조선 땅을 밟았다. 12월 8일자 매일신보는 그들의 도착을 알렸다. "어제 7일 오전에 부산을 출발한 미국 직업야구단 일행은 오후 7시 50분 남대문 도착 열차로 서울에 나타나, 곧 자동차를 탑승하고 조선호텔(현재의 웨스틴조선호텔)로 향하였으며…(중략)…일본에서 3개 대학과 4~5개의 사회 팀들을 '제로'로 격파한 대선수들과 결전하고자 함에, 당일 용산의 공전(空前)한 싸움이 조선 야구사에 공전절후(空前絶後)할 기록이 될 것이라 하겠더라."

드디어 12월 8일 서울 용산 만철운동장에서 MLB 올스타팀(전미군)과 전조선청년단(전조선군)의 경기가 막을 올렸다. 12월 10일자 매일신보는 '조선군과 전미군의 야구 대전의 광경'이란 제목으로 당시 경기 모습을 전했다. "1회서부터 7회에 이르기까지 한 점도 얻지 못한 우리 조선군 맹타자인 김정식(金貞植)군이며 마춘식(馬春植)군 등이 전미군 일동을 놀라게 하였다. 별안간 히트를 치며 쎄컨드와 더드까지 이르게 됨을 본 전미군은, 다시 피쳐를 바꾸며 조선군과 싸우려 하였으나, 조선군의 분발기(奮發氣)를 낸 것을 꺽지 못하여 이에 조선군은 한 점을 얻게 되었다…(중략)…그 후로 제9회 마지막이 닥치자 '홈으런'으로 우리 조선군들을 갈기게 되었으므로 우리 조선군에서는 합하여 3점을 얻게 되었고 전미군은 23점을 얻게 되었다."

야구는 아무리 실력이 없는 타자라고 해도 타석에 들어설 수 있는 기회는 주어진다. 누구에게나 공평하게 기회를 주는 경기라 할 수 있다. 국가와 국가 간, 개인과 개인과의 격차가 갈수록 커지는 요즘이다. 통계청이 지난 17일 발표한 올 3분기 가계동향조사 결과를 보면 우리 사회 빈부 양극화가 심각해지고 있다. 이런 격차는 결국 타석에 들어설 기회조차 없애버릴 것이다. 기회가 박탈되는 사회는 오래 지탱할 수 없다. 우리 사회가 어느 길로 가야할지를 야구가 가르쳐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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