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익이란 무엇인가” 되물어라
[편집국에서]
[편집국에서] 이주현 | 이슈부문장
밥을 먹다가 사람들을 긴장시키고 싶은가. 그렇다면 음식을 한가득 물고 소리 내어 말해보라. “나는 무엇인가. 나는 뭘 하는 사람인가.”
내가 취재원들과 밥을 먹던 중이었다면 곧 의심스러운 시선이 쏟아질 것이다. 어쩌면 “방금 내가 한 말을 기사화할 것이냐”며 화들짝 놀랄지도 모른다. 걱정스러워할 수도 있다. 정체성을 따지는 질문은 대개 위기 상황에서 제기되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평상시 그런 근본적인 질문에 대해 별 관심이 없다. 언론이 무엇인지, 한국이 무엇인지 궁금해하기보다는, 오늘 뭐가 뉴스인지, 누가 화제인지, 아무개 정치인이 뭐라고 말했는지, 집값은 어찌 되는 건지, 대출금리는 언제쯤 진정될 것인지에 관심을 가진다. 그러나 자신의 존재 규정을 위협할 만한 ‘특이한 사태’가 발생하면, 새삼 근본적인 질문을 던지지 않을 수 없다.
윤석열 대통령이 그 좋은 예다. 그는 정의를 위해 싸우는 강골 검사였고, 후배 잘 챙기고 품 넓은 ‘석열이형’이었다. 검사로도, 인간적으로도 매력적으로 보였다. 그런 장점은 지난 대선 때 이준석 당시 국민의힘 대표를 보듬는 모습에서 빛났다. 선거가 두달밖에 남지 않은 와중에 이 대표와 ‘윤핵관’을 둘러싼 당내 갈등이 최고조에 이르렀다. 해명 연설을 하는 이 대표를 향해 의원들이 날리는 불신의 안광 레이저가 살벌했는데, 그 의원총회장에 윤 대통령이 나타났다. 그는 “모든 것은 후보 탓”이라며 궁지에 몰린 이 대표를 감쌌다. 기자들 앞에서 “피는 물보다 진하지 않나. 우리는 피가 같은 당원”이라고도 했다. 광활하다 할 만큼 너른 품새가 강렬한 인상을 남겼다.
그러나 정작 대통령이 되고 나자 사정이 달라졌다. 사진기자 카메라에 찍혀 파장을 일으킨 ‘내부총질’ 문자가 대표적이었다. 이 대표를 향해 “피는 물보다 진하다”고 한 게 불과 몇달 전. “내부총질이나 일삼는 당대표”엔 과연 피만큼 진한 적의가 흥건했다. 왜 그랬는지 하도 궁금해서 대통령실 출입기자들은 도어스테핑(출근길 문답)을 목 빠지게 기다렸으나, 대통령은 공교롭게도 사흘 연속 외부 일정을 소화하고 곧바로 휴가를 가느라 얼굴 마주칠 기회조차 없었다. 13일 만에 기자들과 만난 그는 침묵으로 답했다.
언론을 대하는 태도도 변했다. 원래 그는 검사 시절부터 기자들을 스스럼없이 대하는 걸로 유명했다. 배려심도 많았다. 인수위 시절 통의동 금융감독원 연수원이 좁아 취재기자들이 찬 바람 부는 마당에 앉아 노트북을 치는 걸 보고, 몸도 녹여가며 일하라고 1층에 약식 ‘프레스 다방’도 마련했다. 그러나 여당 내홍, 인사 문제, 김건희 여사를 둘러싼 논란 등이 겹치며 지지율이 내려앉고 기자들의 질문도 송곳처럼 뾰족해지자 변해가기 시작했다. ‘바이든-날리면’ 발언이 결정타였다. 이를 보도한 언론사를 콕 집어 대통령 전용기에 안 태우더니 “(기자가) 고성을 지르는 불미스러운 일”을 문제 삼아 출근길 문답도 중단해버렸다. 그는 “공간이 의식을 바꾼다”며 대통령실을 청와대에서 용산으로 옮겼는데, 과연 그런 모양이었다. 대통령실이 들어선 국방부 청사가 과거 청와대보다 비좁아서인지, 호인다웠던 태도도 달라졌다.
6개월여 만에 벌어진 이런 급작스러운 변화는 정체성 질문을 던지지 않을 수 없게 만든다. 기자란 무엇인가. 기자란 대통령실이 제공하는 서면 브리핑 받아쓰는 직업인가. 때론 불편한 질문도 해야만 하는 게 기자 아닌가. 대통령실은 기자라면 국익을 훼손하는 악의적 보도를 해선 안 된다고 하는데, 국익이란 무엇인가. 대통령은 “안보의 핵심축인 동맹 관계를 지키는 것”이 국익이며, “동맹 관계를 이간질하는 언론”은 전용기에 태우지 않는 게 “헌법 수호”라고 말한다. 도대체 국익이란 무엇인가. 대통령이 동맹국 아니라 야당을 향해 비속어를 썼다고 보도하면 국익인가. 협치는 국익이 아닌가. 언론 자유는 국익이 아닌가. 대통령이 정치 참여 선언문에서 22번이나 반복했던 자유, 그 자유가 국익 아닌가.
※이 글은 2018년 9월21일 <경향신문>에 실린 ‘“추석이란 무엇인가” 되물어라’(김영민 서울대 교수)에 대한 오마주입니다.
edigna@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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