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버트 파우저, 사회의 언어] 텍스트는 미술이 될 수 있는가?

한겨레 2022. 11. 23. 18: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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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버트 파우저 사회의 언어]

2022년 제15회 독일 ‘카셀 도큐멘타’의 텍스트 기록물 중심의 작품 전시 현장. 사진 로버트 파우저

로버트 파우저 | 언어학자

코로나19로 인해 멈췄던 국제적인 대규모 미술 전시가 올해 앞다퉈 열렸다. 다양한 전시가 세계 곳곳에서 개최되면서 얼어붙었던 미술계에 오랜만에 생기가 돌았다.

1955년에 시작해 5년마다 열리는 독일 ‘카셀 도큐멘타’는 올해로 15회째를 맞았다. 하지만 논란이 불거졌다. 전시작에 반유대주의적 성향이 있다는 지적이 있었고, 이로 인한 전시 중단은 물론 표현의 자유와 역사적 책임 논란까지 이어져 출품 거부 작가까지 등장했다. 심지어 앞으로 도큐멘타 개최 중단까지 거론됐으니 꽤 심각한 상황이었다.

올해 총감독은 인도네시아 자카르타에서 세운 비영리 예술공동체 루앙루파(ruangrupa)가 맡았다. 그래서인지 다른 예술공동체와의 협력작품이 많이 출품됐고, 전시 전반에 걸쳐 개인 작가 작품보다 공동체 작품과 활동기록 비중이 높았다. 공동체 내부에서만 이뤄지는 활동보다 세계 여러 지역 주민들과 함께 활동한 커뮤니티 프로젝트 영상물, 관련 기록 전시가 많았던 것이 특징적이었다. 그렇다 보니 개인 작가 작품이 오히려 특이하게 보일 정도였다.

그 덕분에 오랜만에 카셀 도큐멘타 현장에서 전시를 관람한 나로서는 공동체 활동 아카이브 구축을 포함한 다양한 기록물과 생산물 전시가 마치 이 시대 최전선에 선 현대미술이라는 인상을 받았다. 흥미로운 점도 있었다. 다양한 미디어로 기록물이 전시되다 보니 텍스트가 특히 많이 보였다. 영상 자막, 사진 설명, 활동에 관한 설명, 프로젝트에 참여한 사람들의 개인적인 쪽지 등 수많은 전시 ‘작품’ 안에 텍스트가 빼곡했다. 의도적으로 ‘예쁘게’ 또는 ‘재미있게’ 쓴 것도 있지만, 대개 필체나 스타일에 별 신경을 쓰지 않고 무심히 써둔 것들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었다.

텍스트가 많으니 언어도 다양했다. 예전에는 작가가 어떤 언어를 쓰느냐에 관계없이 영어만 사용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지만 글로벌화 영향으로 오늘날 국제전에 출품되는 현대미술 작품에는 영어만이 아니라 여러나라 작가들이 쓰는 언어가 많이 보인다. 카셀 도큐멘타에서 만난 수많은 기록물 역시 대개는 영어로 쓰여 있었지만, 아시아, 아프리카, 남미를 비롯한 여러 개발도상국 등에서 예술공동체들이 참여하면서 작품 속 언어 역시 매우 다양했다. 영상에서는 영어 자막이 자주 보였지만 양이 많은 기록물 가운데는 아예 영어 번역이 없는 경우도 많았다.

여기에서 나는 흥미로운 물음표가 하나 떠올랐다. 국제전을 자주 가는 관람객들 눈에 인도나 동남아시아 문자는 어떻게 보일까. 신기하다는 느낌은 있겠지만 의미를 파악하기 어려우니 소통은 어떻게 이뤄지는 걸까. 미학적인 의미를 부여한 텍스트는 그 자체로 소통이 가능하겠지만, 누군가 ‘그냥’ 쓴 기록물까지 과연 그럴 수 있을까. 이처럼 ‘알아보지 못하는’ 기록물의 전시가 미술에 속하는가?

읽을 수 있다고 해도 물음표는 사라지지 않는다. 내용을 이해할 수 있으니 느끼는 바가 있긴 하겠지만 그 양이 너무 많으면 다 읽지 않고 스치듯 지나가기 일쑤다. 텍스트가 그 자체로 아름답거나 또는 그림이나 조각, 영상 등과 함께 있을 때 미학적인 자극을 받으며 감동하는 것과는 사뭇 다른 반응이다. 고대부터 성경이나 코란, 불경 등을 아름답게 쓰는 것은 신에 대한 존중과 신앙적인 감동을 전하기 위해서였다. 한글 창제 뒤 아름다운 글씨로 만들어진 <월인석보>도 마찬가지다. 의미는 모를지언정 그 자체로의 미학은 전달된다.

예술공동체 활동의 기록물 중심 전시는 카셀 도큐멘타만은 아니었다. 1987년 시작한 튀르키예 ‘이스탄불 비엔날레’는 올해로 17회째를 맞았다. 여기에서도 예술공동체 중심의 전시가 많았다. 역시 다양한 프로젝트의 산물인 텍스트로 가득한 기록물이 대거 등장했다. 하지만 관심을 가지고 전시를 둘러본 나로서는 이 ‘작품’들이 관람객과 무엇을 소통하려는 것인지 파악하기 어려웠다.

일상의 기록물을 모아 전시하는 방식을 채택한 전시회가 관람객들에게 깊은 감동을 주기란 쉽지 않아 보였고, 결과적으로 카셀 도큐멘타와 이스탄불 비엔날레는 미학적 실패로 끝났다는 평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이로 인해 한가지 확인한 것이 있다. 미술은 공동체의 놀이를 보여주는 것에서 더 나아가 미학적 노력과 투쟁이 있어야만 보는 이들과 소통이 가능하다는 점이다. 그런 의미에서 코로나19 이후 오랜만에 열린 2022년의 몇몇 대규모 전시는 미술사의 이례적 순간으로 기록되지 않을까 싶다.

2022년 제17회 튀르키예 ‘이스탄불 비엔날레’의 텍스트 기록물 중심의 작품 전시 현장. 사진 로버트 파우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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