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한용·강준만 칼럼에 부쳐; 달리는 기차 위에 중립은 없다

한겨레 2022. 11. 23. 18: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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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2일과 14일 각각 본지에 실린 <성한용의 정치 막전막후>(왼쪽)와 <강준만 칼럼>.

[왜냐면] 유정민 | 50대 서울시민

이 글을 쓰기 전에 미국 역사학자 하워드 진의 자전적 역사에세이 <달리는 기차 위에 중립은 없다>를 읽었다. 오래전부터 책꽂이에만 있던 책을 읽게 된 계기는 지난주 성한용 선임기자의 ‘국정 목표도 공감 능력도 없는 윤 대통령, 여당이 책임져야’와 강준만 교수의 ‘‘선택적 과잉 공감’의 비극’ 칼럼 때문이었다. 하워드 진의 삶이 2022년을 사는 우리에게 방향을 제시해 줄 수 있을 것 같았다.

1922년 미국 뉴욕에서 태어난 하워드 진은 교수로서 많은 저술과 강연만 아니라 인종차별, 베트남전쟁 등 시대의 문제에서도 정치적 견해를 숨기지 않고 발언하고 행동한 실천적 지식인이었다. 그의 삶을 대변하는 제목의 책 머리말에서 그는 이렇게 설명한다. “나는 가능하지도 바람직하지도 않은 객관성을 가장하지 않았다. 학생들에게 ‘달리는 기차 위에 중립은 없다’고 말하곤 했다. 이미 사태가 치명적인 어떤 방향으로 움직이고 있고, 여기서 중립적이란 그 방향을 받아들이는 것을 의미한다는 사실을.”

나는 윤석열 정부가 들어선 이후 우리가 ‘소통 불가능의 시대’를 살고 있다고 생각한다. 대통령 선거운동 당시 텔레비전(TV) 토론 등에서 윤 대통령은 국정을 이끌어가기엔 모르는 것이 많고, 생각하는 바와 판단력에도 문제점이 있다는 점이 드러났다. 이런 약점은 취임 뒤 업무를 수행하면서 보완되기는커녕 더 확대됐고 불통을 향해 가고 있다. 온 국민의 귀를 시험하고, 사실을 부정하고, 일방통행식 발언으로 반대편의 말은 애써 무시한다.

하워드 진이 말했듯이 ‘이미 사태가 치명적인 어떤 방향으로 움직이고’ 있다. 이런 시점에서 성한용 기자와 강준만 교수의 칼럼은 다음과 같은 점에서 아쉽고 부적절했다.

12일치 신문에 실린 성한용 기자의 글은 윤 대통령에 대한 비판적 시각을 드러내고 있지만, 균형을 맞추고자 그랬는지 글 앞부분에 윤 대통령의 두가지 긍정적인 점을 언급한다. 대통령 집무실 이전과 지방선거 승리다. 지방선거 승리야 사실이므로 별다른 이견이 없다. 그러나 잘한 일이라고 평가한 대통령 집무실 이전은, 장기적 관점에서 추진해야 할 사안일 수 있으나 졸속으로 무리하게 추진하면서 직간접적으로 여러 문제점들이 드러났다. 윤 대통령이 당선자 시절 얘기한 예산은 496억원이었지만, 야당에서는 1조원을 넘길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비용 문제 말고도 추진 과정에서 불법의혹 등과 관련해 참여연대에서는 감사원에 감사청구서를 제출한 상태다. 더욱이 윤석열 대통령이 이전 이유로 ‘공간이 의식을 지배한다’고 말했지만 대통령의 의식이 바뀌었나? 성한용 기자는 대통령실 이전이 “대한민국에서 권위주의 시대가 끝났다는 의미일 수 있다”고 했지만, 그 근거가 무엇인가? 공간은 옮겨졌지만, 의식은 바뀌지 않았고 대통령 특유의 고집과 불통은 심화됐다.

14일치 신문에 실린 강준만 교수의 칼럼은 10월29일 이태원 참사 이후 그가 처음으로 쓴 칼럼이었다. 다른 매체에 기고한 칼럼이 있는지 검색했지만 10월26일치 <경향신문>에 쓴 게 가장 최근이었다. 일간지 기사에서 가장 중요한 기준 중 하나는 시의성이다. 그런데 강 교수는 어떤 사건, 상황을 염두에 두고서 “선택적 과잉 공감”이라고 한 것인지 생뚱맞다. 이태원 참사 이후 20여일이 지났건만 대통령은 물론 누구 하나 제대로 된 사과나 책임지고 사퇴한 사람은 없다. 이런 정부를 향해 ‘윤석열 퇴진’, ‘김건희 수사’, ‘국정조사’를 외치는 촛불시위대를 향해 “선택적 과잉 공감의 비극”이라고 한 것인지 묻고 싶다. 오피니언 리더이자 언론학자인 강준만 교수가 최근 시국에는 침묵하는 이유가 궁금하다. 이 칼럼은 차라리 장대익 교수의 책 <공감의 반경―느낌의 공동체에서 사고의 공동체로>를 소개하는 서평기사로 적절했다.

언론에서 다양한 의견수렴을 위해 양적 객관성은 어느 정도 유지할 필요가 있다고 본다. 그러나 질적 측면, 즉 내용에서는 <한겨레>다운 관점과 명철한 비판 정신을 기대한다.

“역사가 잘못 흘러가고 있을 때 중립을 지키는 것은 그 잘못에 동조하는 행위입니다.!”(하워드 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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