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만의 新무궁화고] 무궁화, ‘평민의 꽃’이자 ‘민주의 꽃’으로

2022. 11. 23. 17: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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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만의 新무궁화고] (8) 무궁화, ‘평민의 꽃’이자 ‘민주의 꽃’으로

“꽃은 무슨 꽃을 좋아하세요?” “무궁화를 그중 좋아한답니다. 그래서 내 방에는 지금도 비록 만든 꽃이나마 무궁화를 꽂아놓았지요”(<삼천리> 제8권 제6호(1936년 6월1일), <눈물의 주인공 차홍녀양의 대답은 이러합니다>)

연극 <사랑에 속고 돈에 울고>의 여주인공으로 당대 최고의 인기를 누리던 배우 차홍녀의 방에는 시들지 않는 무궁화가 놓여 있었다. 이와 같이 일제강점기, 나라를 빼앗긴 채 살아가는 동안에도 희망을 세우려 했던 수많은 이들의 일상 가운데 무궁화는 함께했다. 그렇기에 애국가와 창가를 비롯해 민요와 교가ㆍ단가 등의 노래를 부를 때나 자수를 놓고 놀이할 때도 무궁화 꽃은 피었다. 소박하고 친근한 존재로서 무궁화가 지나온 여정을 그 시기 기록들을 통해 되짚어본다.

청소년ㆍ청년들의 대일항쟁과 무궁화

<국민성(國民聲)> 제9호(1919년 5월25일)에 게재된 논설 ‘내디 혈젼에 대한 감상’에는 “맨 처음에 독립선언의 준비와 창도는 곧 동경 유학생에게서 발생되어 무궁화의 뿌리가 내리고 싹이 돋아 가지가 휘늘어지며 잎사귀가 우거져서 차차 벌어져 삼천리 금수강산 복락 공원에서 독립의 열매를 맺고자 할 때에”라는 문장이 남아 있다. 더불어 세브란스의학전문학교 졸업생 명의로 작성된 글에는 “무궁화 삼천리 강산 영세독립이 완전하외다”라는 표현이 나온다.

국사편찬위원회에서 간행한 <한국독립운동사자료> 4권 ‘한인(韓人)의 일인(日人)의게 대한 적개심(1919년)’에는 “기생 한금화는 방년이 22인데 (중략) 국가광복을 위하여 서지혈서(噬指血書) 왈(曰) 기쁘다 삼천리강출에 무궁화 다시 피노나 기미 2월 만세라 하였더라”는 정황이 소개됐다.

또한 같은 곳에서 편찬된 <일제침략하 한국36년사> 11권에 수록된 글 ‘조선소년단총본부의 단원들이 파고다’에는 1937년 7월 “조선소년단 총본부의 단원들이 파고다공원에서 개최된 시국강연회에서 회장의 정리를 하던 중 단원의 제복 넥타이에 태극기 마크가 있고 그 아래에 ‘ㅈㅜㄴㅂㅣ’라고 쓰여 있으며 그 주위에 무궁화를 배치하여 있는 것이 발각되어 그 책임자가 경찰에 소환”됐던 사건이 기술돼 있다.

애국가ㆍ민요ㆍ교가로 노래한 무궁화

국사편찬위원회에서 간행한 <국사관논총> 제40집을 살펴보면 ‘학교설립 및 인재양성운동’에서 애국가 종류를 찾을 수 있다. <애국가>라는 제명으로 제시된 4곡 가운데 1919년 3ㆍ1운동 무렵에 지은 것으로 추정하는 곡에서 “‘흰 뫼 위에 무궁화 만발했더니 동편에서 찬바람이 불어오므로’로 시작되는 4절로 이루어진 애국가”와 “장하고도 아름답다 무궁화 벌판 금수강산 삼천리는 우리집이요”로 시작되는 노랫말에 무궁화가 나타난다.

또한 같은 책에 소개된 <애국창가>라고 불렸던 3곡 가운데 남궁억이 1931년에 지은 “‘우리의 웃음은 따뜻한 봄바람 춘풍을 만난 무궁화 동산’으로 시작되는 2절로 된 노래”에서도 무궁화가 언급되었다.

한편 무궁화를 나라꽃으로 인식한 사례가 기층 민중 노래에서도 나타난다. <개벽> 제36호(1923년 6월1일) ‘조선문화의 기본조사, 경북도호 상’에 실린 경상북도에서 불린 민요 <꽃노래(花歌)>에서 “사시장춘(四時長春) 무궁화는 우리나라 꽃이란다”라는 노랫말이 발견된다. 한겨레가 각별하게 여긴 진달래 등 많은 꽃들이 열거된 가운데 유독 나라꽃으로 명명된 무궁화의 상징성에 주목할 만하다.

민요에 기반한 노래의 다른 예로는 안동과 상주 중심으로 활동한 동학의 남접 김주희가 정리한 <창도가>(1922~1933년)가 있다. 이 가운데 <오행찬미가>에서 “어화셰상 사람더라 오행셩 취찬미가 무궁무궁화 한곡죠”라는 노랫말로 무궁화를 소개했다. 포교 목적으로 제작한 것이라 짐작되는 동학가사집에 무궁화를 삽입했던 편자의 의도에서 당시 무궁화가 농민에게 공감대를 형성하고 있었던 정황을 읽을 수 있다.

이 외에도 창가집으로 출판된 대중서에는 <무궁화>(1922ㆍ1936년)라는 제명의 노래 2곡과 <무궁화 동산 그리워>(1928년)라는 작품이 실려 있다. 그런가 하면 <중앙고등보통학교 교가> 등 다수의 학교 교가 가사와 경상북도 경산군 용성면 송림야학 등과 같이 지역에 개설한 야학에서 가창된 노랫말에서도 무궁화의 흔적을 찾아볼 수 있다.

동학 가사집 <창도가>에 수록된 <오행찬미가> 출처=한국가사문학 누리집

놀이ㆍ자수ㆍ상장ㆍ교명ㆍ상호명 등 다양한 활용

애국지사들의 집합소였던 상동 청년학원에서 한글학자 주시경이 국어를 가르친 여름 국어강습소의 ‘마친보람’ 수료증(1907년)에는 컬러로 인쇄된 무궁화 문양이 발견된다. 한글배곧(조선어강습원)에서 발행한 ‘다깬보람’(1915년), ‘솟재보람’(1916년), ‘마친보람’(1917년) 증서에도 동일한 무궁화 문양이 있다.

언론인이면서 교육가였던 남궁억은 1910년부터 9년간 배화학당 교사로 재직한 기간에 삼천리 금수강산을 상징한 무궁화 수본을 고안하여 여학생들에게 수놓게 함으로써 민족의식을 일깨웠다. 이런 양상은 여성 농촌운동가 최용신이 1932년 8월 반월면 사리 샘골(현 안산시 상록구 본오동)에 천곡학원을 세우고 “학생들에게 애국사상을 고취시키기 위해 (중략) 자수시간에는 한국 지도를 무궁화로 꾸미는 것을 가르쳤다”(<국사관논총> 제94집)는 기록에서도 나타난다.

민간에서 무궁화를 활용해 독립정신을 고양한 기록은 당시 언론매체에서도 살펴볼 수 있다. ‘운동만세도 독립만세?’(<조선일보>, 1923년 11월10일) 기사에 따르면, 1923년 10월 20일 경상남도 김해 사립합성학교에서 열린 운동회 행사에서 홍ㆍ백 두 편으로 나눠 한반도 지도를 그리는 ‘무궁화삼천리’ 경기가 진행됐다. 경기 후 참석자들은 만세를 외치며 행진했고, 운동회가 끝나자 경찰은 학교 교원을 체포했다. 무궁화삼천리 경기가 ‘조선독립’을 상징하고, 경기 후 만세를 부른 것이 ‘독립만세’를 의미한다는 이유였다.

1920년 조선여자교육협회를 창립한 교육자이자 여성운동가인 차미리사는 1925년 근화여학교(槿花女學校)로 정식인가를 받은 바 있다. 여기서 ‘근화(槿花)’는 ‘무궁화’이며, 일제강점기 개교한 학교 교명이 ‘무궁화여학교’였던 것이다.

무궁화는 학교 건물에도 문양으로 새겨졌다. 1934년에 지어진 고려대학교의 전신 보성전문학교 본관건물 중앙 후문의 돌기둥에는 지금도 당시 조각된 무궁화 문양이 있다. 주권 회복으로 독립 국가를 이룰 인재 양성을 목표로 했던 대학의 본관에 새겨진 무궁화가 상징하는 바가 적지 않다.

이 외에도 무궁화가 다양한 상품과 상호로도 사용된 여러 사례가 눈길을 끈다. <별건곤> 제46호(1931년 12월1일)의 소식글 ‘문단풍문’ 가운데 “시내 안국동 네거리에서 무궁화 화장품 상회를 설립하고 화장품제조 판매업을 하는데”라는 상점 소개문은 일반에 통용되던 그 시대 무궁화의 단면을 드러낸다.

1907년 주시경이 수여한 상동 청년학원 국어강습소의 ‘마친보람’ 수료증(위 왼쪽), 한글배곧(조선어강습원)에서 발행한 ‘솟재보람’(1916, 위 오른쪽), ‘마친보람’(1917, 아래 왼쪽), ‘다깬보람’(1915, 아래 오른쪽) 증서출처=국가기록원, 대한민국역사박물관 누리집

독립운동이 기폭제가 된 무궁화 사랑

1954년부터 1974년까지 20년간 우리나라에 머물렀던 영국인 신부 리처드 러트(Richard Rutt)는 저서 <풍류한국>(신태양사, 1965년)에서 무궁화를 “독립운동과 함께 한국인의 사랑을 받게 된 꽃”으로 규정하며, “확실히 이 무렵 무궁화는 한국인의 해방(解放)을 열망하는 상징이었다”고 소개했다.

또한 그는 왕(황제)이나 귀족 등 세력가가 국화를 채택한 영국ㆍ프랑스ㆍ중국ㆍ일본 사례와 달리 무궁화가 “자연발생적으로 국화(國花)가 되었다”라며 “한국의 무궁화는 평민(平民)의 꽃이며 민주전통(民主傳統)의 부분이기도 하다”고 피력했다.

무궁화는 분명 벽안의 외국인에게도 특별한 의미로 각인되고 있었던 것이다. 이름 없이 이 땅에서 살아간 수많은 이들이 남긴 삶의 부산물로서 무궁화가 지녔던 이러한 대중성은 시대에 따라 백성으로, 평민으로 불렸던 그들의 생을 통해 오늘날에도 변함없이 증명되고 있다.


김영만 (신구대 미디어콘텐츠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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