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조원 썰물에 유동성 폭탄 터질라…퇴직연금 '커닝 공시' 막은 이유
퇴직연금 시장에서 비사업자(상품판매제공자)가 사업자의 공시 이율을 보고 더 높은 금리를 제공하는 이른바 '커닝 공시' 논란은 하루 이틀 된 일이 아니다. 현행 '근로자퇴직급여보장법' 상 퇴직연금 사업자만 동시에 이율을 공시하게 돼 있어 사각지대가 생기기 때문이다.
하지만 현행 법이나 금융당국의 감독 규정상 비사업자에 대한 이율 공시를 강제할 수 없다는 점을 악용한 '꼼수'가 횡행하면서 사업자와 비사업자간 형평성 논란을 낳았다.
일부 비사업자들이 일괄 공시된 사업자들의 금리를 확인하고 이보다 더 높은 금리를 제시해 사업자를 뺏어 가는 일이 반복되다보니 사업자들 사이에 불만이 제기된 것이다. 불과 한 분기 사이에 더 높은 금리를 제공하는 특정 회사로 수조원이 움직일 정도로 파장이 컸던 것으로 전해진다.
금융권 관계자는 "퇴직연금 사업자를 결정하는 여러 요소들이 있지만 원리금 보장형 상품의 경우 금리가 절대적인 비중을 차지한다"며 "다른 사업자가 제시한 금리를 보고 이율을 정할 수 있다는 것은 미리 답안지를 보고 문제를 푸는 것과 다르지 않다"고 말했다.
퇴직연금 사업자들은 그간 비사업자도 상품을 제공하면서 이율을 직접 결정하고 리스크를 지는 주체이기 때문에 공시를 의무적으로 해야 한다고 주장해왔다.
예를 들어 A저축은행이 3.5% 이율을 약속하고 상품을 만들어 B은행이 운용한 후 약속한 이율을 달성하지 못하면 금리 차는 A저축은행이 책임지는 구조인데도 의무공시 대상에서 제외된 것은 맹점이라는 것이다.
금융당국은 그동안 퇴직연금 비사업자의 이율 공시 의무화에 대해 미온적이었다. 감독할 만한 구체적인 근거가 없는 데다 불과 올해 초만 하더라도 저금리 기조가 계속되고 있었기 때문에 사업자와 비사업자 간 금리 경쟁은 오히려 가입자에게 유리할 수 있다는 판단에서다. 퇴직연금의 낮은 수익률이 고질적인 문제로 지적받는 상황에서 조금이라도 높은 이율을 제공할 수 있는 상황을 막을 이유는 없다는 것이다.
하지만 올 들어 가파른 금리인상에 예기치 못했던 레고랜드 사태 등으로 자금시장이 경색되면서 분위기가 바뀌었다. 과도한 이율 경쟁으로 인해 퇴직연금 시장에서 급격한 머니무브(자산이동)이 발생할 경우, 중소형 금융사들은 퇴직연금 자산에 포함된 채권을 매각한 뒤 현금화해 새 사업자에게 넘겨주는 과정에서 유동성 위기가 터질 수 있기 때문이다.
금융감독원은 커닝 공시를 규제하는 한편 퇴직연금 사업자와 비사업자를 대상으로 연말에 퇴직연금이 재예치 되지 않아 발생할 수 있는 위험에 적극 대응해 줄 것을 주문했다. 지나친 금리 경쟁을 지양하라는 의미다. 금감원은 앞으로 각 금융사별로 원리금 보장상품 판매로 유입된 자금이 운용되는 현황을 모니터링하고 이상징후가 발견될 경우 현장점검을 진행할 방침이다.
증권사의 경우 올해 퇴직연금 시장에서 평균 5% 대 금리를 제시해 자금을 끌어 들였다. 연말에 기존보다 더 높은 금리를 제시해야 다른 사업자들을 제치고 자금을 모을 수 있는데 , 금리가 계속 오르는 게 부담이다. 만기가 됐는데 재투자가 이뤄지지 않거나 차환 발행에 실패할 경우 새로운 유동성 위기가 불거질 수 있다. 들어오는 자금보다 나가는 자금이 많은 상황이 되면 자금여력이 있는 대형사나 캡티브(전속시장)이 있는 회사는 큰 문제가 없겠지만 그렇지 않은 중소형사의 경우 자금 공백이 불가피해서다.
증권업계 한 관계자는 "증권사가 보유한 퇴직연금 계정의 부채가 늘어나고 되돌려줘야 할 액수가 많아지면 부동산 프로젝트파이낸싱(PF) 등 위험자산에 투자해 수익률을 맞출 수밖에 없는 구조"라며 "부동산 PF 잔액이 상당한 일부 증권사가 최고 수준의 금리를 제시할 경우 유동성 위험도 그만큼 커지는 셈"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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