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학의 도시’ 눈앞에 둔 순천, 급증한 흑두루미 반기지 못하는 까닭은
순천만을 찾은 겨울 철새 흑두루미 수가 1만마리 가까이 늘어나면서 전남 순천시와 조류 전문가, 환경부 등이 초긴장 상태에 빠졌다. ‘천학(千鶴)의 도시’라는 별명을 가진 순천시가 ‘만학(萬鶴)의 도시’라는 새 별명을 얻을 수 있는 상황임에도 오히려 비상사태가 된 것은 최근 늘어난 흑두루미가 조류인플루엔자(AI)가 급속도로 번지고 있는 일본 규슈 이즈미에서 탈출한 ‘피난민’ 두루미일 가능성이 매우 크기 때문이다.
23일 순천시와 조류 전문가 등에 따르면 지난 22일 새벽 순천만에서는 약 7600마리가량의 흑두루미들이 관찰됐다. 앞서 21일에는 모두 9841마리의 흑두루미들이 관찰되면서 하루 관찰된 개체 수로 역대 최다치를 기록했다. 지난 13일 3950마리에서 17일 4323마리, 18일 7192마리를 거쳐 빠르게 늘어났다.
흑두루미는 천연기념물 228호로 겨울철 한반도와 일본 등에서 월동하는 멸종 위기 철새다. 순천시는 2015년 겨울 월동 중인 흑두루미가 처음 1000마리를 돌파하면서 ‘천학의 도시’라는 별명을 얻었다.
흑두루미가 늘어났지만 마냥 반길 수만은 없는 상황이다. 증가한 흑두루미들이 일본 이즈미에서 AI를 피해 이동해온 개체들로 추정되기 때문이다. 최근 이즈미에서는 AI가 급속도로 번지면서 지난 20일까지 약 470여마리의 흑두루미, 재두루미 폐사체가 발견됐다. 고병원성 H5N1 바이러스 감염이 확인된 개체는 62마리이며 300여마리에 대해선 검사가 진행 중이다.
이즈미시 당국은 원래 흑두루미에게 주던 먹이양을 줄이고, AI 전파를 막기 위해 접근을 최소화했다. 조류 전문가인 이기섭 박사(한국물새네트워크 대표)에 따르면 AI가 창궐한 이후 평소 1만마리를 훌쩍 넘던 이즈미의 흑두루미 수는 약 7000~8000마리로 줄어들었다. 이 박사는 “흑두루미들이 다른 개체들이 빠르게 죽어나가는 것을 보면서 바다를 건너 한반도로 이동해온 것으로 보인다”며 “조류는 질병이 생기고, 폐사체가 나오면 해당 지역이 위험하다고 판단해서 벗어나려는 경향이 뚜렷하게 나타난다”고 설명했다.
이즈미와 순천만은 전 세계적으로도 손꼽히는 흑두루미 월동지다. 조류 전문가들은 이들 지역에 AI가 창궐하면 흑두루미 종 전체에 큰 위협이 될 수 있다고 우려했다. 이들 지역에 머무는 흑두루미 개체 수는 전 세계 개체 수의 대부분을 차지한다. 21일 현재 순천만 일대에는 겨울철 환상적인 군무를 보여주는 철새 가창오리도 11만마리 이상 머물고 있다.
일본만큼 빠른 속도는 아니지만 국내에서도 AI로 인한 조류 폐사체가 잇따라 발견되고 있다. 순천만에서는 지난 13일부터 22일 오전까지 흑두루미 폐사체 19구가 발견됐다. 환경부의 22일 집계에 따르면 가금농장에서는 모두 19건(고병원성 18건, 검사 중 1건), 야생조류에서는 모두 47건(고병원성 36건, 저병원성 3건, 검사 중 8건)의 감염 사례가 확인됐다. 최근 폐사체는 순천을 포함해 김해, 창녕 등 남해안 지역에서 주로 확인되고 있다.
순천시는 이즈미시와 실시간으로 서식지 상황을 공유하는 동시에 국립생물자원관, 국립야생동물질병관리원, 국립생태원 등 관계기관과 소통하면서 대책을 마련 중이다. 아울러 순천시의 ‘흑두루미 중장기 관리계획’ 수립을 위한 연구 용역을 수행 중인 전남대 연구자들이 순천만 내 AI 전파 요인을 조사할 계획이다. 국립생물자원관은 22일부터 조사자를 순천만으로 긴급 파견해 정밀 모니터링을 실시 중이다.
조류 전문가들은 국내의 다른 지역에서도 흑두루미들이 겨울을 날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해야 한다고 말한다. 이 박사는 “이즈미나 순천만 등 특정 지역에서 감당하기 힘든 정도의 흑두루미들이 집중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은 현상”이라며 “흑두루미들이 중간 기착지로 이용하는 천수만이나 일부가 월동하는 주남저수지 등 먹이나 안정적인 잠자리를 확보할 수 있는 대체 월동지를 늘려 흑두루미들이 집중화되는 현상을 해소할 필요가 있다”고 설명했다. 그는 “22일에는 경남 하동 갈사만에서 500여 개체가 확인되는 등 순천만의 흑두루미 일부는 다행히 다른 지역으로 분산되고 있는 상태”라고 덧붙였다.
김기범 기자 holjjak@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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