美 최초 흑인 대법관 부인 세실리아 마셜 94세로 별세

김태훈 2022. 11. 23. 14: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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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역사상 최초의 흑인 연방대법원 대법관 서굿 마셜(1908∼1993)의 부인 세실리아 마셜이 22일(현지시간) 94세를 일기로 타계했다.

남편에 가려 '대법관의 아내'로만 주로 알려졌으나 고인은 젊은 시절 대표적 인권단체인 미국흑인지위향상협회(NAACP)에서 일한 인권운동가다.

그런데 이듬해인 1955년 2월 서굿 마셜의 첫번째 부인이 폐암으로 사망했고, 그는 NAACP 사무실을 드나들며 종종 얼굴을 마주쳤던 고인한테 마음을 두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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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와이에서 태어난 필리핀계 미국인
인종차별 철폐 위해 NAACP서 활동
20세 나이차 극복하고 결혼에 '골인'

미국 역사상 최초의 흑인 연방대법원 대법관 서굿 마셜(1908∼1993)의 부인 세실리아 마셜이 22일(현지시간) 94세를 일기로 타계했다. 남편에 가려 ‘대법관의 아내’로만 주로 알려졌으나 고인은 젊은 시절 대표적 인권단체인 미국흑인지위향상협회(NAACP)에서 일한 인권운동가다.

워싱턴포스트(WP)에 따르면 미 대법원은 고인이 버지니아주(州) 폴스처치의 자택에서 별세했다고 이날 밝혔다. 유족으로 장남인 서굿 마셜 2세 등 두 아들과 손주 4명, 그리고 증손주 3명이 있다고 WP는 소개했다.

미국 최초의 흑인 연방대법관인 서굿 마셜의 부인 세실리아 마셜(1928∼2022). AP연합뉴스
고인은 1928년 하와이에서 필리핀계 이민자의 딸로 태어났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뒤 먹고살 길을 찾아 뉴욕으로 옮긴 고인은 야간학교에서 속기를 배웠다. 애초 법원 속기사가 되려 했으나 고인의 피부색만 보고 흑인인 줄 알았던 인력사무소 직원의 권유로 NAACP에 취업했다. 1주일에 35달러를 받는 말단 직원으로 출발한 고인은 곧 뛰어난 능력을 발휘하며 승진을 거듭했다. 당시 NAACP는 인종차별 철폐를 위한 공익소송에 매진했고, 고인은 소송을 맡은 변호사들이 판사 앞에서 할 구두변론을 준비하며 예행연습을 할 때 옆에서 속기를 담당했다. 법원에 제출할 변론 계획서를 일목요연하게 정리해 타이핑하는 것도 고인의 몫이었다.

그 시절 서굿 마셜은 NAACP의 간판 변호사였다. 1954년 5월 대법원이 일명 ‘브라운 대(vs) 교육위원회 사건’에서 미국 공립학교에서의 인종차별을 금지하는 획기적 결정을 내렸을 때 서굿 마셜이 수석 법률대리인을 맡아 승소 판결을 이끌어냈다. 그런데 이듬해인 1955년 2월 서굿 마셜의 첫번째 부인이 폐암으로 사망했고, 그는 NAACP 사무실을 드나들며 종종 얼굴을 마주쳤던 고인한테 마음을 두기 시작했다.

서굿 마셜은 고인보다 무려 20살이 많았다. 당시만 해도 흑인이 같은 흑인 말고 아시아계나 백인과 교제하는 것을 바라보는 시선은 곱지 않았다. 그래도 서굿 마셜은 적극적인 구애를 그치지 않았고 결국 두 사람은 1955년 12월 결혼했다. 이 부부의 신혼집을 방문한 손님들 중엔 NAACP와 힙을 합쳐 민권운동을 이끌어가던 마틴 루터 킹(1929∼1968) 목사, 그리고 인종차별 반대운동으로 유명한 NAACP 자문위원 로자 파크스(1913∼2005) 같은 유명인도 있었다.

미국 최초의 흑인 연방대법관인 서굿 마셜(오른쪽)이 1967년 취임 직후 가족과 기념촬영을 하는 모습. 왼쪽 3번째가 부인 세실리아 마셜이다. AP연합뉴스
1961년 존 F 케네디 행정부 출범 후 서굿 마셜은 항소법원 판사가 되었고, 뒤를 이은 린든 B 존슨 대통령은 1967년 그를 연방대법관으로 발탁했다. 미 역사상 최초의 흑인 대법관이 탄생한 순간이었다. 이후 1991년 남편이 은퇴할 때까지 두 아들을 키우며 가정을 돌보는 것은 오롯이 고인의 책임이었다. 1993년 서굿 마셜이 사망한 뒤로는 남편이 생전에 쌓은 명성, 그리고 미 법조계에 남긴 유산을 널리 알리고 보존하는 활동에 전념했다. AP 통신에 따르면 고인이 가장 최근 공식석상에 모습을 드러낸 건 2005년 3월 메릴랜드주 볼티모어·워싱턴 국제공항 개명식 때다. 이 공항은 미 최초의 흑인 대법관을 기리고자 ‘서굿 마셜 국제공항’이란 이름이 붙었다.

김태훈 기자 af103@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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