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장] ‘죽음의 터널’ 피해 순천만으로 몰려온 일본 흑두루미떼
“종 생존 위협받는 상황”…순천시∙환경부 ‘초비상’
지난 19일 전남 순천시 순천만 습지.
주변 농경지에 흑두루미 수백마리가 앉아 있었다. 저물녘이 되자 하늘에서 수십마리는 돼 보이는 흑두루미떼가 나타났다. 농경지는 이미 검은 새로 발 디딜 틈이 없을 정도였다. 매일 새벽 흑두루미 모니터링을 하는 순천만 명예습지안내원 강나루(63)씨가 말했다.
“지난 18일 아침에도 나가서 흑두루미 수를 세는데, 3천, 4천, 5천…7천마리가 넘더라고요. ‘아차’ 싶었죠. 일본 이즈미에서 흑두루미들이 떼죽음을 당하고 있다는 얘길 들었거든요.”
이웃 일본에서 터진 흑두루미 ‘최대의 재난’
최근 들어 전남 순천만에 흑두루미가 ‘폭증’해 1만마리 가까운 개체가 관찰되고 있다. 세계 최대 흑두루미 월동지인 일본 규슈의 이즈미에서 발생한 조류인플루엔자를 피해 흑두루미가 대거 이동하고 있는 것으로 추정된다.
장익상 순천시 순천만보전과장은 22일 “이달 10일까지만 해도 흑두루미가 평년 수준인 3천마리가 왔다. 그런데 지난주부터 갑자기 개체수가 크게 늘어나더니, 오늘 조사에서는 9800여마리가 관찰됐다”고 말했다.
흑두루미는 러시아에서 여름을 보낸 뒤, 겨울을 나러 한국 순천만과 일본 이즈미에 온다. 보통 11월10일쯤이면 거의 도착해, 겨울을 날 채비에 들어간다.
그런데, 올해는 도래 시기가 지난 뒤에도 순천만에 흑두루미가 계속 날아오고 있다. 지난 18일 이후 평소의 두 배가량인 5천~6천마리의 흑두루미가 추가로 날아들어, 21일 기준으로 9841마리가 관찰됐다. 사상 최대 규모다.
전문가들은 일본 이즈미에서 발생한 조류인플루엔자(H5N1) 사태와 관련 있는 것으로 보고 있다. 흑두루미는 일본 이즈미에 도착하자마자, 전례 없는 죽음의 터널을 통과하고 있다. 21일까지 367마리가 폐사했다. 한때 하루에 발견된 사체 수가 97마리까지 치솟았고, 최근엔 그나마 잦아들어 40마리대로 줄었다.
이기섭 한국물새네트워크 대표는 “일본에서 흑두루미떼가 나가사키 해안을 거쳐 북쪽으로 이동하는 모습이 관찰됐다고 한다”며 “무리의 떼죽음에 놀란 흑두루미들이 순천만으로 몰려오는 것 같다”고 말했다. 그는 “이런 경우는 처음”이라며 “어미 흑두루미들이 여기(일본 이즈미)에 있으면 죽겠다고 판단해서 순천만으로 터전을 옮기지 않나 싶다”고 했다.
흑두루미는 전 세계 2만마리밖에 남지 않은 멸종위기종이다. 이 속도로 흑두루미가 폐사하면, 종의 지속가능성에 빨간불이 켜진다. 이 대표는 “올겨울 조류인플루엔자 팬데믹이 계속 이어질 것이라는 게 더 큰 문제”라고 말했다.
“일본보다 밀집도 낮아 팬데믹 꺾이길 기대”
국내 최대 흑두루미 월동지인 순천만에서도 방역에 비상이 걸렸다. 안타깝게도 야생철새에 유행하는 감염병을 인간이 막기엔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다. 남형용 환경부 야생동물질병관리팀장은 “바이러스가 확산하지 않도록 폐사체를 빨리 수거하는 게 우선”이라며 “순천시와 협조해 조류인플루엔자 긴급행동지침(SOP)에 따라 대응하고 있다”고 말했다. 22일까지 순천만에서 폐사체로 발견된 흑두루미는 18마리다. 23일 강나루씨는 “다행히 오늘은 폐사체가 없었다”고 말했다.
장익상 과장은 “이즈미에서는 흑두루미가 한정된 면적의 무논에서 먹이 활동을 하는데, 이때 물을 통해 바이러스가 확산해 전파한 것으로 보인다. 반면 순천만에서는 두루미가 마른 농경지에서 먹이를 먹고 넓은 갯벌을 잠자리로 이용하기 때문에 이즈미보다 밀집도가 덜한 편”이라며 팬데믹이 수그러들기를 기대했다.
과거 흑두루미는 일본 이즈미 가는 길에 경북 구미 해평습지 등 낙동강에서 쉬어갔다. 하지만 4대강 사업으로 이 일대 모래밭이 사라지면서, 2010년대 들어 흑두루미들은 일본으로 ‘직행’하는 고달픈 비행을 해야 했다. 일부 무리는 순천만을 중간 기착지로 삼거나, 아예 월동지로 이용하기 시작했다.
흑두루미는 생태 습성상 겨울을 나는 과정에 터전을 옮기지 않는다. 그런데도, 무엇에 놀란 양 지금 일본의 흑두루미들이 순천만으로 대거 이동 중이다. 이사갈 집을 알게 해준 4대강 사업에 고맙다고 해야 할까? 전례 없는 재난 사태가 흑두루미를 덮치고 있다.
강나루씨는 “4대강 사업으로 모래밭이 없어지면서 순천만 개체수가 늘고 있는 형국이었다”며 “그나마 천만다행으로 순천만에서 2000년대부터 습지 보전 활동을 해서 대체 서식지 역할을 한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일본 이즈미에서 떼죽음을 지켜본 흑두루미까지 포함해 내년부터 더 많은 새가 순천만에 찾아오면 이 일대는 감염병에 더 취약해질 수 있을 것”이라며 올해 상황을 예의주시해야 한다고 말했다.
순천만/남종영 기자 fandg@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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