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다운 건축] 단풍이 지나가면

이승재 한국기술교육대학교 건축공학부 교수 2022. 11. 23. 07: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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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재 한국기술교육대학교 건축공학부 교수

우리나라 사계 중 가장 아름다운 계절이 가을이다. 북동의 설악부터 시작한 단풍은 남서의 내장산까지 가을을 두고 가기 마냥 아쉬운 듯 우리의 산천을 오색으로 물들이며 가로지른다.

설악은 물론이요 속리산 길목의 말티재와 계룡산 갑사의 오리숲길의 단풍은 또 어떠한가. 코로나의 갑갑함이 단풍의 화려함으로 힐링이 된다. 옛적부터 단풍은 우리에게 화려함도 주지만 왠지 모를 서글픔도 함께 준다. 바로 이어지는 겨울나기의 힘듦이 있었기 때문이었으리라.

그런데 단풍 다음에 무언가 있다. 늦가을 바람에 은빛과 흰빛으로 곱게 단장하고 이리저리 몸을 흔드는 녀석들이 있다. 어떤 이들은 이를 보고 들꽃의 군무라고도 하고, 어떤 이들은 은꽃의 물결이라고도 한다.

우리가 잘 아는 옛 가요 '으악새 슬피우니 가을인가요'의 으악새가 새의 이름이 아니라 이것의 사투리라는 이야기도 있다. 바로 억새다. 사는 곳을 기준으로 산에 살면 억새, 강가에 살면 갈대라고 분류하는 억새는 참 쓰임새가 다양하다. 뿌리는 약용으로, 줄기와 잎은 가축의 사료와 난방용 연료가 되어 우리의 겨우살이를 도우고, 억새의 섬유질은 바이오에탄올의 원료가 되기도 한다.

억새는 건축에서도 힘을 발휘한다. 우리의 옛집은 지붕재료에 따라 초가집과 기와집으로 나뉜다. 상류층의 대명사인 기와집은 차치하고 서민을 대표하는 초가집은 흔히 볏짚을 엮어 만드는 것인 줄 알고 있지만 억새와 갈대도 지붕재료의 역할을 해왔다. 벼의 부산물인 볏짚은 손쉽게 구할 수 있고, 볏짚 사이는 공기층이 형성되고 껍질이 매끄러워 단열과 방수에 뛰어난 재료이다. 그러나 볏짚은 습기에 지독히도 약해 매년 지붕을 갈아야 하는 단점이 있다.

반면에 볏짚만큼 흔하지 않지만 수명이 10년 이상 가는 억새는 고급 지붕재료였다. 억새로 지붕을 엮은 집을 '샛집'이라고 갈대로 엮은 집을 '갈집'이라 한다. 특히 샛집의 지붕은 볏짚 초가집과는 달리 두꺼운 지붕과 비와 눈이 바로 흘러내리도록 경사가 급한 것이 특징이다.

샛집은 논이 부족해 볏짚이 귀한 산간지방이나 섬 지방에서 각광받던 건축 재료였다. 지금도 지리산 자락 남원의 회덕마을에는 샛집이 있다. 1970년대 새마을운동이 한창이던 무렵 50호에 달했던 샛집은 세월을 갈아타고 현대식 지붕으로 바뀌어 이제 유일하게 남은 샛집이다. 제주의 전통가옥 지붕은 화산에서 자란 억새로 이엉을 엮었다. 화산지역이다 보니 논이 될 만한 토지가 없는 제주에서는 억새가 지붕재료로서는 제격이었다. 돌벽과 제주 억새로 지어진 낮은 지붕에 돌을 매달아 바람에 날려가는 것을 막은 제주의 샛집은 우리네 삶의 지혜다.

억새는 우리나라와 중국, 일본에서 자라는 여러해살이 식물이다. 중국은 말할 것도 없고 일본에도 당연히 억새지붕 가옥이 있다. 일본의 폭설지역에는 갓쇼즈쿠리(合掌造り)라 하는 억새지붕의 전통가옥이 많이 있다. 갓쇼즈쿠리는 우리말로 맞배지붕이라고도 하는데 지붕이 뾰족한 이등변삼각형 구조로 되어 눈이 쌓이지 않는 구조로 돼 있다.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돼 있어 일본을 찾는 많은 관광객들로 붐빈다.

우리나라는 지리산, 화왕산, 천관산, 신불산, 민둥산을 들어 5대 억새 명산이라 한다. 우리 충청에는 왜 없냐고 섭섭해 할 것은 없다. 홍성군과 보령시의 경계에 오서산이 있다. 오서산도 보는 이에 따라서 5대 억새 명산에 들기도 나기도 하면서 그 명성을 날린다. 오서산의 억새는 바다와 함께하는 억새의 물결 파도가 장관이다.

오서산의 억새로도 성에 차지 않는다면 서천으로 가보자. 서천의 국립생태원 야외전시장의 산들길 억새도 유명하다. 산들길을 지나서 만나는 에코리움(Ecorium) 온실은 세계 5대 기후의 동식물과 어류의 생태계를 담고 있다. '에코'는 생태를, '리움'은 건물을 의미한다. 에코리움 건축은 독특하다. 벽이 지붕이고 지붕이 벽의 역할을 하면서 조개와 같은 쉘(Shell)구조의 곡면으로 되어 있다. 쉘 곡면의 선은 현수선 형태다. 현수선은 쇠사슬을 양손으로 잡고 늘어 뜨렸을 때 쇠사슬이 처져서 만들어내는 곡선이다. 이 곡선의 상하를 뒤집어서 만들어진 자연의 곡선이 에코리움의 지붕 현수선이다.

참, 한 가지 더 있다. 금강의 끝자락이자 충남의 최남단인 서천은 철새와 낙조로 유명한 금강하구가 있다. 서천 신성리 갈대는 서해안 200리길을 따라 분포하고 있고, 이제 곧 12월이면 30여종 10만 마리의 철새들이 찾아온다. 단풍이 지나가면 억새가 있고 철새를 기다리는 즐거움이 이즈음의 즐거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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