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수봉 의대길 개척 50주년] 50년 전 치열했던 여름을 기억하며… 다시 의대길을 오르다

한효희 2022. 11. 23. 06: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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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의대 OB 기념등반
인수봉 의대길 개척 50주년 기념 등반
 서울의대산악부 OB 6인이 의대길 개척 50주년을 기념해 선배들이 낸 바위 길을 직접 올랐다.

도선사 주차장에서 6명의 서울의대산악부 OB와 만났다. 그들을 만나기 전부터 이미 내 마음속에는 어떠한 선입견이 형성되어 있었다. 그 중심에는 '서울대', '의사', '산악부', '아저씨'와 같은 단어들이 있었다. 내가 생각한 그들의 모습은 이지적이고 귀티 나는, 배 나온 아저씨였다.

그들의 실체와 조우했을 때, 내가 가지고 있던 선입견이 산산이 부서졌다. 대부분 날렵하고 잘빠진 몸매였으며(1명만 배가 살짝 나와 있었다), 심지어 여성 회원도 있었다. 그리고 북한산 어디에서나 흔하게 볼 수 있는 평범한 중년의 모습이었다.

그들은 도선사에서 하늘재로 오르는 가파른 길을 날쌔게 올랐다. 산악부 출신인 20대 기자에게도 숨이 찰 만큼 빠른 걸음이었다. 하늘재에서 짧게 숨을 고르고 바로 인수봉 하단으로 향한다. 길을 안내하는 서울의대산악부 OB 회장 김응중씨는 미로 같은 인수봉 주변 지리에 굉장히 밝은 것 같았다. 잠시 비둘기샘에 들러 목을 축인다.

김응중 회장은 환갑이 넘은 나이에도 의대길 선등을 선다.

"감염내과 후배는 깐깐해서 비둘기샘 물을 안 마십니다. 저는 어릴 때부터 이것저것 주워 먹고 자라서 그냥 먹습니다."

상냥하고 젠틀한 김응중 회장(76학번)은 내년에 정년을 앞둔 흉부외과 교수다. 그는 의사가 된 이후 잠시 산에서 멀어졌다가 40대가 되어 다시 산을 찾았다. 처음 몇 년 동안은 워킹 위주로 산을 다녔다. 그러다 다시 등반을 시작하게 됐고, 정년을 앞둬 여유가 생긴 요즘에는 매주 두 번 이상 인수봉을 오른다.

그는 이날 등반을 함께한 코오롱등산학교 이기범 강사와 함께 인수봉의 모든 루트를 등반하는 프로젝트도 진행 중이다. 또한 대학산악연맹 시니어로 구성된 '인수봉 천 번 오르기' 모임(자칭 천봉회)에서도 활동 중이다. 환갑이 넘은 나이에 웬만한 20대 대학산악부원보다 열정이 대단하다.

4피치 밴드 위에서 빌레이를 보고 있는 구남훈씨는 마취통증의학과 의사다. 왼쪽의 김웅한씨는 소아흉부외과 교수다.

의대길은 1971년 여름 서울의대산악부 재학생들이 개척했다. 이날은 개척 50주년을 맞아 서울의대산악부 OB들이 의대길을 직접 등반하고 저녁에는 기념행사가 예정되어 있었다. 사실 작년이 개척 50주년이었지만 코로나로 인해 기념행사가 1년 연기되었다.

인수봉을 대표하는 등반 코스 중 하나인 의대길은 오아시스에서부터 귀바위 테라스에 이르는 5피치 약 100m 길이의 등반 코스다. 등반선이 깔끔하고 어프로치가 비교적 쉬워 휴일에는 항상 붐비는 인기루트다.

50년 전 20대의 선배가 오른 길을 60대가 된 후배가 오른다.

의사들은 생각보다 등반을 잘한다

인수봉 하단에 도착해 장비를 착용한다. 낡고 삭은 하네스와 8자 하강기가 나올 것으로 기대했지만 그들의 장비는 최신 블랙다이아몬드 헬멧과 그리그리(자동 제동 기능이 있는 하강기), 그리고 전문가용 암벽화다.

의대길 시작지점인 오아시스(인수봉 중단의 수목지대)로 가기 위해서 취나드B 1피치를 오른다. 이기범 강사가 선등으로 줄을 깔아 기자와 사진기자가 먼저 올랐다. 의대팀은 김응중 회장이 선등을 서 독자적으로 등반한다. 후등으로 따라오면 편하지만 김응중 회장은 이날 등반을 위해 올해 수차례 의대길을 올랐다. 5명의 대원들도 훈련 등반을 여러 번 함께했다.

오아시스행 고속도로인 취나드B 1피치는 하단부 크랙과 상단부 슬랩으로 이루어져 있다. 5.7 난이도의 비교적 쉬운 구간이지만 크랙에는 확보용 볼트가 없고, 슬랩에서는 볼트 거리가 멀다. 바위에 붙어 크랙을 뜯으며 오른다. 오랜만에 느끼는 바위의 질감이 익숙한 듯 낯설다.

선등으로 오른 김응중 회장이 금세 오아시스 확보지점에 카라비너를 걸었다. 등반하느라 정신이 없었는데 후등으로 오른 기자보다 훨씬 등반 속도가 빠르다. 구름 한 점 없는 푸른 가을 하늘이 펼쳐진다. 오전 11시쯤 60%의 확률로 1mm 비예보가 있었지만 절대 비가 올 것 같지 않다. 가볍게 오르기 위해서 배낭을 오아시스에 두고 의대길을 오른다.

"재학생 때는 날아다녔어요."

감염내과 의사인 김백남씨(84학번)가 후배인 정의창씨(86학번)를 가리키며 말한다. 지금은 배가 불룩한 정의창씨에게도 찬란한 과거가 있었다. 재학생 때 몸무게가 50kg대였던 그는 의대산악부에서 선등을 도맡아하던 에이스였다.

의대길 개척 직후인 1971년 9월 19일, 서울의대산악부 조수헌씨가 2피치 크랙을 등반하는 모습을 촬영한 사진.

"그때 막 암벽화나 초크 같은 것들이 나오기 시작했어요. 그때는 그런 걸 쓰면 반칙이라는 분위기가 있었죠. 크레타화를 신고 인수봉을 올랐어요. 선배들은 최신 장비를 쓰면서 신입생들만 못 쓰게 했어요."

공부량이 많은 의대산악부는 다른 대학산악부보다 더 치열하게 등반을 해야만 했다. 일반 대학과 달리 의대는 1년에 학기가 4개인데다가 방학도 짧다. 바쁜 시간 짬짬이 틈을 내 산을 다녔다.

"한번은 설악산에서 동국대 산악부를 만난 적 있었어요. 거기는 선배들이 삽으로 때린다고 하더라고요. 그때는 대체로 산악부 분위기가 군대 같았어요. 그런데 저희 산악부는 옛날에도 다른 대학산악부와 달랐어요. 때리거나 권위적인 문화가 전혀 없었어요. 아, 그런데 저는 딱 한 번 때린 적 있어요. 왜 그랬는지 기억도 안 나요."

서울의대산악부에는 현재 30명 정도의 재학생이 있다. 과거 서울대에는 단과대학별로 산악부가 있었다. 그중 농대와 문리대를 제외한 대부분의 산악부가 명맥이 끊어졌다. 최근에 들어서야 서울대 통합 산악부가 생겼다. 의대산악부 재학생 중에는 더 이상 암벽등반을 하는 인원은 없지만 아직도 명맥이 유지된다는 게 놀랍다.

하강기 없이 몸에 로프를 감아 듈퍼식 하강을 하는 모습.

김응중 회장이 먼저 의대길 1피치에 붙었다. 1피치는 5.8 난이도의 크랙과 슬랩이 혼합된 구간이다. 슬랩에서 밸런스가 미묘한 한 동작을 제외하면 나머지는 무난하다. 관건은 2피치다. 5.10a 난이도의 2피치는 의대길에서 가장 어려운 구간이다. 전반적으로 등반 난이도가 후하게 책정된 인수봉에서 5.10a 난이도는 고도감까지 더해 하드프리에서의 난이도와 차원이 다르다.

2피치에는 두 개의 크랙이 있는데 첫 번째 크랙을 따라 오르다 오른쪽으로 건너 두 번째 크랙으로 올라야 한다. 두 번째 크랙은 전반적으로 펑퍼짐하고 밸런스를 잡기 애매해 의대길의 크럭스(등반이 가장 어려운 구간)로 불린다. 김응중 회장이 노련하게 크랙을 돌파해 오른다.

후등으로 2피치를 오른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올랐는지 바위 면이 닳아서 매끄럽다. 2년 전에는 두 번 만에 성공했는데 이번에는 계속 미끄러진다. 이기범 강사의 엘리베이터 빌레이가 아니었다면 한참을 매달려 있을 뻔했다.

인공등반 구간인 3피치는 '볼트 따기'라고 불리는 기술을 이용해 오른다. '볼트 따기'를 잘하기 위해선 일련의 동작을 능숙하게 연결해야 한다. 우선, 한 손으로 퀵드로를 잡고 한 발을 볼트 위에 올린다. 이후 반동을 이용해 잽싸게 볼트를 딛고 올라 몸을 바위에 바싹 붙이며 일어선다. 마지막으로 다른 한손으로 다음 볼트에 퀵드로를 걸어 잡고 오른다.

말은 쉽지만 몸이 안 따라준다. 게다가 마지막 볼트는 약간 멀리 있다. 요령도 부족하고 팔다리가 짧아 아무리 시도해도 마지막 퀵드로에 손이 닿지 않는다. 또 한 번 이기범 강사의 환상적인 빌레이 힘을 빌린다.

4피치는 비교적 무난한 슬랩이다. 오른쪽의 볼트라인이 의대길이다. 왼쪽 볼트라인을 따라 오르면 5.11b의 극악무도한 난이도를 자랑하는 비원길 슬랩이니 주의해야 한다. 4피치는 난이도가 높지 않지만 고도감이 있다. 마지막 5피치는 4피치보다 더 무난한 슬랩이다. 귀바위에 가까워질수록 경사가 완만해지며 이내 의대길이 끝난다.

50년 전에는 하네스와 암벽화 없이 의대길을 올랐다.

정상에서 만난 가을 소나기에 혼비백산

귀바위 테라스에 오르자 인수봉 너머로 짙은 구름이 넘어오고 바람이 거세진다. 그리고 이내 거짓말처럼 빗방울이 떨어진다. 가랑비처럼 내리던 빗방울이 점점 굵어지더니 거세게 쏟아져 내린다. 두 세평 남짓한 귀바위 테라스는 앞과 양옆이 천 길 낭떠러지라 비바람 피할 곳이 전혀 없다. 설마 비가 올까 하는 안일한 마음에 겉옷이 든 배낭을 다섯 피치 아래 오아시스에 두고 왔다. 금세 온 몸이 쫄딱 젖었다. 찬바람이 몰아칠 때마다 입 밖으로 신음 소리가 흘러나오고 체온이 떨어지는 게 느껴진다.

한여름도 아닌 가을에, 구름 한 점 없이 맑았던 하늘이 이렇게 변덕을 부리는 건 처음 봤다. 기상청이 괘씸하게 느껴진다. 양치기 소년 이야기가 떠올랐다. 고장 난 시계도 하루에 두 번은 맞는다던데 하필 이럴 때 일기예보가 맞을 줄이야. '이러다 산에서 죽는구나'하는 생각이 스쳐지나가며 인수봉 참사 사건이 떠올랐다. 1983년 4월 3일, 갑작스런 폭설과 강풍으로 인수봉에서 대학산악부원 7명이 희생된 사건이다.

의대길 개척 당시 발간된 보고서의 개념도.

귀바위 테라스에는 등정을 축하하기 위해 올라온 천봉회 회원 3명, 코오롱등산학교 강사 4명, 기자 2명, 의대산악부OB 3명까지 총 12명이 있었다. 3명은 아직 의대길 어딘가에서 꼼짝달싹 못하고 있다. 최대한 빨리 하강하기 위해 등반 중인 1명을 두레박 올리듯 끌어올렸다. 총 13명이 여섯 피치를 하강해야 한다.

"나중에 재미있는 이야깃거리가 될 겁니다. 다들 침착하게 내려갑시다."

이기범 강사가 달달 떨며 어수선한 분위기를 바로잡는다. 오아시스까지는 60m 로프로 두 번 하강해야 한다. 시간이 지체될수록 저체온증의 위험도 커진다. 언제 그칠지 모르는 비에 마음이 조급하다. 그래도 의사가 여섯 명이나 있는데 죽지는 않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우선 로프 2개를 하강용으로 고정하고 기자가 먼저 내려간다.

50년 전 서울의대산악부의 얼굴들.

귀바위 테라스에서 4피치 시작지점까지 하강했다. 아직 올라오지 못한 두 명이 막 하강을 시작한다. 60m 하강을 한 번 더 해서 오아시스까지 내려오니 거짓말처럼 비가 그친다. 얼른 배낭을 찾아 셔츠와 재킷을 꺼내 입었다. 살았다는 안도감에 온몸의 힘이 풀린다.

오아시스에서 60m 로프로 한 번 더 하강하면 인수봉 하단이다. 하강을 완료하니 점점 구름이 걷힌다. 이내 구름 사이로 파란 하늘이 나타나고 인수봉에 따스한 햇볕이 내리쬔다. 30분 남짓 비가 내렸을까. 그 짧은 시간 동안 지옥을 다녀온 느낌이다. 살면서 잘못한 일이 있었는지 곱씹어본다. 안이하게 배낭을 두고 오른 게 화근이었다. 인수봉 산신령님께서 조심하라고 짓궂은 장난을 친 것 같다. 산에서는 한순간도 방심하면 안 된다는 교훈을 절절히 깨닫는다.

알록달록한 로프를 따라서 사람들이 하나둘씩 내려온다. 모두가 거짓말 같았던 날씨와 기상청에 대해서 한마디 한다. 다행히 무사히 등반을 마쳤다. 이기범 강사의 말대로 우리에게는 재밌는 이야깃거리가 하나씩 생겼다.

1971년 의대길을 개척한 6명 중 4명. 왼쪽부터 김성환, 허준평, 이병달, 오규철. 

원래 이름은 '의대길' 아닌 '귀바위스라브'

등반을 마친 뒤 저녁(9월 23일)에는 의대길 개척 50주년 기념행사가 롯데호텔 서울에서 진행되었다. 이날 행사에는 오규철(66학번), 이병달(66학번), 허준평(70학번), 김성환(71학번)씨 등 개척의 주역을 포함해 서울의대산악부 OB, 한국대학산악연맹 및 각종 산악단체 내빈 등 총 100여 명이 참석했다. 이날 행사에서 의대길 개척에 참가한 이병달씨의 생생한 개척기를 들을 수 있었다.

의대길은 1971년 8월과 9월 사이에 개척되었다. 의대길 개척에는 이남규와 오규철을 주축으로 최태식, 이병달, 허준평, 김성환 총 6명 참가했다. 이들은 처음부터 새 루트를 내겠다는 생각은 없었다.

당시 본과 4학년이던 오규철과 이남규는 여름방학을 맞아 암벽등반이나 실컷 해보자는 생각으로 7월 말 북한산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이 둘을 따라 후배 4명이 합류한다. 때마침 인수산장이 생긴 지 얼마 안 되었을 때라 이들은 산장에서 지내며 매일같이 인수봉을 올랐다.

20일 남짓한 기간 동안 인수봉에서 27개의 등반 코스와 10개 정도의 하강 코스를 확인했다. 이들은 코스 간의 연결 관계와 하강 코스를 확인하기 위해 8월 26일 인수A 코스를 따라 귀바위를 올랐다. 그곳에서 지금의 의대길 방면으로 듈퍼식 하강을 하던 도중 사람이 올라설 수 있는 밴드를 발견하게 된다.

등반 가능성을 확인한 그들은 자유 등반을 시도했다. 그곳이 바로 지금의 의대길 4피치 슬랩에 해당하는 부분이다. 때마침 인수봉 너머로 해가 지기 시작하면서 바위 면에 홀드 그림자가 뚜렷하게 보였다. 그렇게 자유등반에 성공했고, 젊은 의대생들은 '하나 건졌다'는 생각에 고조되었다.

해당 구간은 예전에는 등반이 가능할 거라 생각지도 못해 본 곳이었다. 인수봉을 멀리서 바라봤을 때 귀바위 아래 코처럼 튀어나온 의대길 부근에는 뚜렷한 크랙이나 등반선이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이들은 다음날 다시 올라 나머지 코스 간의 연결 관계를 확인해 보았다.

의대길 정상인 귀바위 테라스에 오르자마자 비가 쏟아져 내렸다.

문제는 지금 의대길의 고빗사위인 2피치였다. 자유등반이 쉽지 않았지만 2피치에 하켄을 몇 개 설치해 등반할 수 있었다. 3피치는 자유등반이 불가능했다. 코스를 잇기 위해 2m 간격으로 5개의 볼트를 설치해 인공등반 구간이 되었다.

"이 아름다운 코스에 누가 볼트를 안 박았겠습니까. 가만 뒀으면 나중에 누군가가 개척해서 의대길이 아니라 다른 이름이 붙어 있었을 겁니다. 다행히 우리한테 걸려서 의대길이 되어버렸죠."

개척을 완료한 서울의대산악부는 1971년 10월 등반보고회에서 이 코스를 '귀바위스라브(슬랩)'이라고 명명했다. 코스명에 클럽이나 개인의 이름이 아니라 바위의 특징을 담았다. '귀바위스라브'가 '의대길'이 된 데에는 이들의 개척 과정을 지켜본 인수산장지기 이경구씨의 공이 크다. 이경구씨는 산장을 찾는 등반가들에게 '저 길이 서울대 의대생들이 낸 코스'라는 말을 반복해서 되뇌었고, 그 덕에 지금의 '의대길'이라는 이름으로 굳어버렸다.

혹자는 이들이 운이 좋아 의대길을 개척했다고 말할 수도 있다. 하지만 그들은 한 달 동안 인수봉을 평지 걷듯 오르내리며 바위의 면면을 방향별로 구분해 등반 선을 검토했다. 기회는 누구에게나 주어지지만 준비된 자만이 쟁취하는 법이다. 이들이 의대길을 발견하게 된 것은 바위를 사랑한 젊은이들에 대한 인수봉의 선물이 아닐까.

월간산 11월호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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