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산에 빠진 외국인] "고향 미네소타 숲엔 늑대…안전한 한국산 좋아요"

한효희 2022. 11. 23. 0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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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서 취직 안 돼 한국 왔다가 산악마라톤 빠진 美 안나 툼스
북한산 숨은벽 능선을 처음 갔을 때.

하이원 운탄고도 스카이레이스, 성남누비길 32k, 거제지맥, 코리아50k, 트랜스제주50k, 오들로북한산둘레길논스톱 28k.

안나Anna Toombs(@anna_dalyora)씨가 올해 참가한 트레일러닝 대회 목록이다. 한국살이 12년차인 그는 우연히 한국에 왔다가 산에 빠졌다. 몇 년 전부터는 트레일러닝에 심취해 대회란 대회는 모두 참가 중이다. 인터뷰 날 기준으로 다음 주에는 춘천마라톤 풀코스에 도전한다.

한라산은 북한산 다음 두 번째로 좋아하는 산이다.

돈 벌러 왔다 산에 빠져

미국인 안나씨는 2010년 한국에 처음 왔다. 그는 연세대에서 한국현대문학 석사학위를 취득해 현재 한영 번역가로 일하고 있다. 그가 한국에 오게 된 건 K팝도, K드라마도 아닌 돈 때문이었다.

대학에서 스페인어를 전공한 그는 졸업하자마자 글로벌 금융위기가 터져 좋은 일자리를 구할 수 없었다. 그때 마침 아는 선배를 통해 '한국에 일자리가 있으니 한번 놀러오라'는 말을 듣게 된다. 안나씨는 그길로 한국에 와서 영어를 가르치다 지금까지 눌러앉게 되었다.

안나씨의 고향은 미국 북부에 위치한 미네소타다. 한국에 오기 전 그는 등산에 관심이 있었지만 산에 자주 가보지는 못했다. 한반도와 비슷한 크기인 미네소타에는 산이 없다. 대신 광활한 숲이 있다. 운동을 좋아했던 그는 숲에서 뛰어놀고 캠핑을 하며 자랐다. 그는 미국 서부와 유럽에서 산을 처음 올랐다. 페루에서 유학할 때는 안데스의 산을 오르기도 했다. 한국에 와서 그를 산으로 이끈 건 부처님이었다.

"2010년 4월 한국에 처음 왔는데 며칠 뒤가 부처님 오신 날이었어요. 원주에 살고 있었는데 아는 선배가 치악산 구룡사에 함께 가자고 했어요. 그때 처음 치악산을 보고 바로 첫눈에 반했어요."

꽃피는 봄날 찾은 치악산은 너무나 아름다웠다. 안나씨는 그길로 한국산에 빠지게 되었다. 국토의 70%가 산인 한국은 천국과 같은 곳이었다. 매주 산을 가는 그는 서울에 있는 모든 산과 둘레길을 다 가봤다. 달리기를 좋아해 산에서 걷는 것보다 뛰는 걸 더 좋아한다. 몇 년 전 재미삼아 남한산성 트레일러닝 대회에 참가했다가 산악마라톤의 매력에 빠지게 되었다.

북한산 둘레길 러닝.

가장 기억에 남는 산행은 불수사도북 종주

안나씨가 한국에서 가장 좋아하는 산은 북한산이다. 집도 북한산과 가까운 강북구에 얻었다. 그는 북한산을 밥 먹듯이 오른다. 인터뷰 날 오전에도 백운대를 올랐다.

"북한산은 제 고향 같은 산이에요. 너무 익숙한 곳이고 갈 때마다 행복해요."

안나씨는 가장 기억에 남는 산행으로 불수사도북 종주를 꼽았다. 불수사도북은 불암산, 수락산, 사패산, 도봉산, 북한산을 잇는 총 45km 거리의 종주 코스다. 그는 지난 5월 친구 2명과 함께 새벽 1시부터 종주를 시작해 완주에 성공했다.

"산에 우리만 있었어요. 수락산에서 일출을 봤는데 아주 아름다웠어요. 도봉산 신선대에 가서는 너무 힘들었어요. 그런데 백운대가 가까워질수록 다시 힘이 났어요. 친구들과 함께 추운 날씨도 버티고 힘들게 산을 올라서 더 아름다웠어요. 끝났을 때는 정말 뿌듯하고 기뻤어요."

강원도 인제 원대리 자작나무숲에서 눈길을 달렸다

작지만 매운 한국산

"서울에서는 사람들이 거칠고 냉정한데 산에서는 착해지는 것 같아요. 산에서 달릴 때 응원도 많이 받아요. 그리고 한국 산에는 어르신들이 많은 게 신기해요. 할아버지 할머니들이 신발도 안 신고 산을 올라요."

안나씨가 꼽은 또 다른 신기한 등산문화는 패션이다. 그가 보기에 한국 사람들은 동네 뒷산을 오를 때도 멋지고 예쁜 등산복을 입는다. 그리고 히말라야에 가는 것처럼 전문적이고 비싼 등산복을 입는 사람이 많다.

"한국산은 사람이 많고 접근성이 좋아요. 도시와 가까운 뒷산도 많고 지하철이나 버스를 타고 가기 편해요. 산 아래에는 편의점이나 화장실도 잘 갖추어져 있어요. 특히 등산로 관리가 잘 되어 있어요."

안나씨가 생각하는 한국산의 특징은 작지만 맵다는 점이다. 높지 않으면서 위험하지도 않고 적당히 힘들다는 것. 동네 뒷산도 언덕 수준이 아니라 적잖이 가팔라 등산하는 맛이 난다. 그의 표현을 빌리자면 한국산은 정상에 올랐을 때 '꼭대기 느낌'이 든다.

"외국인 친구들도 '작은 산이라고 쉬운 줄 알았는데 힘들다'고 많이 얘기해요. 한국산은 악산이 많고 재밌어요."

북한산 칼바위 능선.

화대종주가 꿈인 진짜 한국인

한국에서 이루고 싶은 목표가 무엇이냐는 기자의 질문에 안나씨는 "산 근처에 집을 사는 거"라고 대답했다. 그는 인터뷰 날 기준으로 2주 뒤에 한국 국적을 취득해 진짜 한국인이 된다. 그는 미국으로 돌아가지 않고 한국에서 쭉 살 계획이다.

"한국은 훨씬 개발된 나라고 기본적인 복지가 잘되어 있어요. 한국에 처음 오자마자 혼자서 산에 갈 수 있는 자유, 밤에 혼자 달리기 할 수 있는 자유를 느꼈어요. 한국은 총도 없고 미국에 비해 안전해요. 미국에서는 뭔가 불안해요. 미네소타에는 숲에 늑대도 있어요."

안나씨의 소박한 꿈은 지리산 화대종주를 가는 것과 트레일러닝 대회에서 시상대에 오르는 것이다. 그는 멋진 전망 속을 달리며 자연을 느끼는 게 좋다고 말했다. 특히 산행이 끝나고 근처 식당에서 막걸리 마시는 걸 최고의 행복으로 꼽았다. 그가 가장 좋아하는 음식은 도토리묵이다.

"도토리묵, 막걸리, 손두부, 산채비빔밥, 감자전…. 웃긴 게 도토리묵 처음 먹었을 때는 정말 싫어했어요. 느낌이 젤리 같은데 도토리 맛이 나서요. 그런데 먹을수록 맛있어졌어요."

월간산 11월호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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