끝없는 갯벌 산책로... 서산 갯마을에선 '신비의 바닷길'이 일상 [자박자박 소읍탐방]
인터넷 지도에서 ‘서산 갯마을’을 검색하니 10여 곳이 넘는다. 대개는 식당이다. 어촌마을의 넉넉한 인심과 짭조름한 바다 내음이 연상되기 때문인 듯하다. 갯마을은 바닷물이 드나드는 갯가에 위치한 마을이지만 꼭 그런 것만도 아니다. ‘서산 갯마을’은 충남 서산뿐만 아니라 경기 부천 오산 충북 보은에도 있다. 삼면이 바다이니 전국에 갯마을이 수두룩한데 서산만큼 갯마을과 어울리는 곳이 없다. 1972년 발표된 동명의 가요가 큰 영향을 미쳤다. “굴을 따랴 전복을 따랴 서산갯마을 / 처녀들 부푼 가슴 꿈도 많은데 / 요놈의 풍랑은 왜 이다지 사나운고 / 사공들의 눈물이 마를 날이 없구나”로 시작한다. 서산 지곡면 왕산포구에 노래비가 세워져 있다.
가로림만에는 ‘신비의 바닷길’이 일상
왕산포구는 바닷물이 내륙 깊숙이 파고든 가로림만에서도 제법 안쪽에 위치한다. 가로림만은 길이 25㎞, 폭 2~3㎞에 달하는 물길이 서산과 태안 사이 남쪽으로 길게 만입된 지형이다. 조수간만의 차가 심하고 수심이 얕아 갯벌이 잘 발달돼 있다. 간조 시에는 만 전체의 3분의 2가 갯벌로 드러난다. 아직까지 이렇다 할 관광시설도 거의 없어 주변 갯마을도 한적하다. 자연 그대로의 풍광 속에서 광활한 바다와 어촌의 정취를 즐기기에 딱 좋은 곳이다.
가로림만 주변 육지는 해발고도 100~300m 안팎의 낮은 산지와 완만한 구릉이다. 갯벌은 해안에서 바다로 갈수록 모래에서 개흙으로 바뀐다. 모래갯벌, 혼성갯벌, 펄갯벌이 고루 분포한다는 의미다. 그래서 갯마을마다 모래갯벌을 따라 바다로 수 킬로 미터에 달하는 길이 나 있다. 어민들은 이 길을 따라 경운기와 트럭을 타고 갯벌로 나가 낙지며 바지락, 굴 등을 채취한다. 바닷길은 물때에 따라 잠겼다 드러나기를 반복한다. 아주 드물게 발생하는 일이라 ‘모세의 기적’ ‘신비의 바닷길’이라 불리는 현상이 가로림만에선 일상이다.
가로림(加露林)이라는 말맛이 이국적이면서도 부드럽다. 한자어 그대로 풀면 이슬이 모여 숲을 이뤘다는 의미다. 아침저녁은 물론이고 한낮에도 수시로 바다안개가 깔리기 때문이라 해석한다. 바닥에 얇게 퍼진 안개는 하얗게 수평선을 이뤄 주변의 섬과 육지를 때때로 몽환 속으로 밀어 넣는다.
왕산포구 바로 앞에도 작은 섬이 있다. 물이 빠지면 시멘트로 포장된 길을 따라 섬으로 들어갈 수 있다. 섬과 포구 사이 바다는 간조 때에도 완전히 물이 빠지지 않고 갯골이 형성돼 있다. 마을의 작은 어선도 이곳에서 물이 들어오기를 기다린다. 이따금씩 외지에서 온 강태공이 낚싯줄을 드리우고 있고, 어민들은 갯벌에서 캐온 굴을 짭조름한 바닷물에 씻는다.
포구에서 오른쪽 해안으로 1㎞ 남짓한 수상 산책로가 조성돼 있다. 깔끔하게 목재 덱을 깔아 걷기에도 편한데, 이용하는 사람이 거의 없어 넓은 바다와 갯벌을 독차지하는 기분으로 바다 산책을 즐길 수 있다. 3군데 쉼터에서 바닥으로 내려가는 계단이 있다. 물이 빠지면 단단한 모래갯벌을 걸어도 좋다.
대산 읍내를 거쳐 서쪽으로 해안도로를 따라가면 웅도가 있다. 하늘에서 본 모습이 곰이 웅크리고 있는 모양이라는 섬이다. 웅도 역시 조수에 따라 육지와 연결되기도, 섬마을이 되기도 한다. 동편말, 큰말, 큰골, 장골 등의 자연마을이 있고 농경지가 많아 작지만 자급자족이 가능한 섬이다. 40~50가구가 살고 있는데 대개는 소규모 농사와 갯벌에 의지해 살아가는 주민이고, 최근엔 귀촌한 이들의 별장이나 펜션도 제법 들어섰다.
마을 주차장에 차를 대고 한적하게 섬을 둘러볼 수 있다. 남쪽 해안의 수상 덱을 걸어도 좋고, 1시간 정도면 섬을 가로질러 북측 해안까지 다녀올 수도 있다. 단번에 눈길을 잡거나 감탄사가 나올 만큼 도드라진 볼거리는 없지만, 요모조모 섬마을의 매력을 음미할 수 있다.
섬 중앙 언덕배기에 수령 400년 쯤 되는 반송 한 그루가 자라고 있다. 밑동부터 아홉 개의 굵은 가지가 부챗살처럼 퍼져 멋들어진 수형을 자랑한다. 오래된 나무를 신성하게 여기는 건 웅도라고 다르지 않다. 이 반송도 주민들에게 마을의 안녕을 지켜주는 수호신으로 대접받는다. 주변을 정리하지 않아 다른 나무들과 섞여 있지만 한눈에 알아볼 수 있다.
북측 해변 바닷길 어귀에 홀로 덜렁 놓인 ‘둥둥바위’가 있다. 바닷물이 차거나 아침에 물안개가 끼면 구름 위에 둥둥 떠 있는 듯하다고 해서 붙은 별명이다. 둥둥바위에서 직선으로 약 1.5㎞ 떨어진 무인도까지 어민들이 이용하는 바닷길이 나 있다. 소형 트럭이 다닐 만큼 넓고 단단해 물이 빠지면 별다른 준비 없이 드넓은 갯벌을 산책할 수 있다.
섬 남쪽에도 가로림만 중간에 떠 있는 작은 섬으로 바닷길이 연결돼 있다. 바닷길이 물에 잠기면 해안 산책로를 이용하면 된다. 웅도 어촌체험장에서부터 해상 덱이 놓여 있다. 해질 무렵 웅도항 방향으로 걸으면 정면으로 갯마을의 아름다운 노을이 번진다. 작은 어선들이 쉬는 갯골 양쪽으로 펼쳐진 차진 갯벌에도 붉은 기운이 번들거린다. 해가 떨어지면 수상 덱에 설치된 가로등이 또 작품이다. 장대 모양 가로등에 새긴 게, 소라, 바지락, 낙지 문양이 색깔을 달리하며 불을 밝힌다. 가로림만에 많이 나는 해산물이다.
웅도에서 서쪽 땅끝으로 이동하면 벌천포가 있다. 벌말이라고도 부르는 이곳의 행정지명은 대산읍 오지리. 한자 표기는 ‘나 오(吾)’ 자이지만, 지형이나 거리로 볼 때 서산에서 오지에 속하는 곳이다. 조선시대부터 천일염을 생산해 국가 재정에 크게 기여했고 광복 후에는 대규모 염전이 조성됐지만, 지금은 일부 업체가 명맥만 이어가고 있다.
최근엔 벌천포해수욕장이 외지인에게 조금씩 이름을 알리고 있다. 가느다랗게 연결된 땅끝에 약 600m 길이의 자갈 해변이 아담하게 곡선을 그리고 있다. 굵기에 따라 층을 이룬 반질반질한 자갈이 물살에 쓸릴 때마다 파도소리와 환상의 하모니를 이룬다.
좁은 도로를 사이에 두고 해수욕장과 붙어 있는 갯벌에 ‘뭍으로 올라온 황발이’ 조형물이 설치돼 있다. 황발이는 ‘흰발농게’의 다른 이름이다. 한쪽 집게발만 커다란 흰발농게는 간척과 해안 개발로 서식지를 잃어가고 있어, 2012년부터 멸종위기종으로 지정해 보호하고 있다. 갯벌 너머로 대산석유화학단지의 대형 시설이 위압적이다. 마치 흰발농게가 뭍으로 황급히 도망치듯 보인다. 그래도 여전히 굴을 캐고 조개를 잡는 어부의 모습을 볼 수 있다는 점은 다행이다.
철새는 죄가 없건만… 버드랜드와 간월암
서산 북쪽에 가로림만이 있다면 남쪽에는 천수만이 있다. 가로림만이 자연 그대로의 해안선을 유지하고 있는 데 비해, 천수만 상류는 대규모 간척으로 지형이 완전히 바뀌었다. 서산A·B지구 2개의 제방이 완공되며 광활한 농경지와 담수호가 생겼다. 덕분에 매년 260여 종 50여만 마리의 철새가 이곳에서 겨울을 나거나 거쳐간다. 올해도 이미 수많은 철새가 찾아들어 아침저녁으로 호수와 들판을 무리 지어 이동하며 장관을 이룬다.
갯벌을 잃고 새를 얻었다고 할 정도로 겨울 철새는 서산의 상징이 됐지만 ‘탐조여행’은 조류인플루엔자(AI) 확산 우려로 일찌감치 중단되고 말았다. 망원경으로 자세히 관찰할 기회는 사라졌지만, 방조제 양쪽 도로로 이동하면 아침저녁으로 환상적인 군무를 감상할 수 있다. 두 방조제 사이에 서산버드랜드가 있다. 상징물인 둥지전망대에 오르면 천수만 들판과 호수가 시원하게 내려다보인다.
방조제 아래 간월암은 무학대사가 수도 중에 달을 보며 깨달음을 얻었다는 작은 암자다. 썰물 때는 육지와 연결됐다가 만조 때는 섬이 되는 지형으로, 바다 위에 떠 있는 듯한 몽환적 이미지로 관광객이 즐겨 찾는다. 작은 갯바위에 올려진 형상이지만 내부로 들어가면 10개의 전각이 제법 짜임새 있게 배치돼 있다. 관음전과 종무소 건물 앞에는 각각 250년 된 사철나무와 150년 된 팽나무가 뿌리를 내리고 있다. 밖에서 볼 때 사찰의 역사와 운치를 더하는 존재다.
부남호와 간월호 사이 도비산 서쪽 자락에 부석사가 있다. 신라 문무왕 17년(677) 의상대사가 지었다고 전하는 천년 고찰이다. 경북 영주 부석사와 이름뿐만 아니라 창건 설화도 비슷하다. 의상대사가 당나라에 유학할 때 그를 흠모했던 선묘낭자의 넋을 기리기 위해 절을 짓기로 하는데, 용으로 변한 낭자가 커다란 바위를 띄워 사찰 건립에 반대하는 무리를 물리쳤다는 내용이다. 뜬 바위는 절에서 10㎞ 거리의 바다에 떨어져 ‘검은여’로 불린다고 한다. 바다였던 천수만 상류는 이제 드넓은 들판으로 변했다. 영주 부석사와 마찬가지로 해 질 녘 노을이 아름다운 절이다.
서산=글·사진 최흥수 기자 choissoo@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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