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물상] 천덕꾸러기 된 종이책

김태훈 논설위원 2022. 11. 23. 03: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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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러스트=박상훈

책을 많이 읽는다고 장서가가 되는 것은 아니다. 누를 수 없는 소유욕이 있어야 진짜 장서가다. 이탈리아 기호학자 움베르토 에코가 생전에 살던 집은 작은 도서관을 방불케 했다. 사람들이 “이 많은 책을 다 읽으셨냐?”고 물으면 “다 읽은 책을 뭣 하려고 집에 두나? 여기 있는 책은 지금부터 읽을 것들”이란 말로 기를 죽였다. 소설가 김영하는 “책이란 읽으려고 사는 게 아니라 사 놓은 것 중에 읽는 것”이란 말로 장서가들의 책 욕심을 표현했다.

▶종이가 없던 시절, 양피지로 300쪽짜리 책 한 권 만들려면 양 100마리가 필요했다. 필경사의 작업도 더뎌서 1년에 2권 정도 필사했다. 15세기 영국 케임브리지 대학 장서가 겨우 122권이었다. 중세 직업 중엔 필사할 책을 찾아 유럽 전역을 돌아다니는 책 사냥꾼도 있었다.

▶구텐베르크 이전엔 책값도 터무니없이 비쌌다. 독일 바이에른에선 포도밭을 팔아야 책 한 권 샀다는 기록이 있다. 책 한 권이 품은 가치도 오늘날과 비할 수 없었다. 동로마제국 수도 콘스탄티노플이 15세기 오스만튀르크에 함락당하자 그곳 학자들이 애지중지하던 장서를 들고 서유럽으로 피신했다. 그중엔 1000년간 잊혔던 플라톤과 소포클레스 등이 포함돼 있었다. 그 때 넘어간 책은 고작 230여 권이었지만 르네상스 시대를 여는데 일조했다.

▶평생 책을 읽고 수집한 이들이 책을 기증하려 해도 받아주는 도서관이 없어 애태운다는 기사가 본지에 실렸다. 실제 그런가 싶어 인근 도서관에 기증 절차를 물었더니 ‘우리 도서관 취지에 맞는 전문 도서로 최근 5년 이내 출판된 것’ 같은 까다로운 조건이 붙었다. 10여 년 전만 해도 책을 기증받으면 감사장을 주던 도서관들이 이처럼 태도를 바꾼 것은 책이 넘쳐나기 때문이다. 한국에서만 해마다 약 8000만권이 쏟아져 나온다. 가정에서도 책장을 차지하는 종이책은 천덕꾸러기 신세다.

▶영화 ‘매트릭스’에선 주인공이 부피도 무게도 없는 전자책으로 가득한 가상 서가에 접속해 지식을 얻는 장면이 나온다. 그러나 전자책은 단점도 뚜렷하다. 자체 발광 디스플레이가 끊임없이 뇌를 교란해 독서의 집중력을 떨어뜨린다. 전자책을 읽을 때 뇌는 대강 훑어보거나 핵심만 추린다는 연구도 있다. 미국에서 전자책의 경쟁 대상은 가벼운 읽을 거리를 담은 문고본이란 말이 나오는 이유다. 그간의 기술 발전 속도로 볼 때, 전자책의 한계도 곧 극복할 것이다. 도서관 장서가 어떻게 바뀌든 지식 축적의 보고라는 본연의 기능만은 바뀌지 않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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