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평로] ‘대장동’, 플리바게닝 있었다면 의혹 풀렸을 것

최원규 논설위원 2022. 11. 23. 03: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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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명숙·조국… 김용도 진술 거부
헌법상 권리지만 진실 확인 방해
거악 범죄 진술자 선처하는 ‘한국형 플리바게닝’ 도입 필요

이재명 민주당 대표의 최측근 김용 민주연구원 부원장은 검찰 조사 내내 진술을 거부했다. 대장동 일당에게 불법 대선 자금을 받았다는 그의 혐의와 관련해선 돈을 댄 사람과 전달자 모두 돈을 줬다고 시인했다. 그게 사실이 아니라면 해명하면 될 텐데 김 부원장은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이유는 뻔하다. 검찰 조사에서 자기 허점 노출하지 않고, 수사 내용 파악한 뒤 법정에서 검찰의 허점을 파고들겠다는 계산일 것이다.

김용 민주연구원 부원장이 경기도 대변인 시절인 2019년 12월 자신의 출판기념회에 참석한 이재명 당시 경기도지사와 손을 맞잡고 있다. /김용 네이버블로그

그런 전례를 만든 사람이 한명숙 전 국무총리다. 뇌물, 불법정치자금 수수 혐의로 두 차례 재판을 받았던 그는 검찰에선 진술을 거부했고 법정에서도 검찰 신문엔 함구했다. 그 덕분인지 뇌물 사건에선 무죄를 선고받았지만 불법정치자금 사건에선 받은 돈 중 수표 1억원이 여동생 전세금으로 쓰인 증거가 드러나 유죄 판결을 받았다. 조국 전 법무장관도 진술거부권을 행사했다. 얼마 전엔 ‘n번방 사건’ 주범이 ‘계곡 살인 사건’으로 수감된 범인들에게 “진술을 거부하라”는 황당한 편지를 보낸 일도 있었다. 과거엔 드물었던 진술 거부가 이젠 무슨 유행이 된 듯하다.

헌법상 권리인 진술 거부를 탓할 수는 없다. 다만 분명한 것은 그것이 수사와 재판을 어렵게 만든다는 것이다. 뇌물 등 부패 사건에선 더욱 그렇다. 과학수사 해야 한다고 말하는 이도 있지만 말처럼 쉬운 게 아니다. 자금 세탁 등 범죄 수법은 지능화되고 있고, 5만원권 등장 이후 검은돈은 현금으로 오가 계좌 추적도 효용성을 잃고 있다.

이런 상황이라면 우리도 ‘사법협조자 형벌 감면제’ 도입을 검토할 때가 됐다고 본다. 피의자가 타인의 더 큰 범죄를 진술해 수사에 협력하면 형벌을 낮춰주거나 불기소하는 제도다. 일본은 ‘협의·합의제도’라는 이름으로 2019년부터 이 제도를 도입했다. 범죄는 지능화하는데 증거 수집은 어려워진다는 판단에 따른 것이라고 한다. 피의자가 혐의를 인정하는 조건으로 가벼운 범죄로 기소하거나 형량을 낮춰주는 미국식 ‘플리바게닝(유죄협상제도)’에서 유래한 것이지만 약간 성격이 다르다. 프랑스·독일 등 유럽 선진국들도 변형된 형태로 플리바게닝을 운용하고 있다.

이 제도엔 “정의 관념에 배치된다”는 비판이 늘 따라붙는다. “형벌은 협상 대상이 돼선 안 된다”는 것이다. 검찰의 남용 우려도 있다. 법무부가 2011년 이와 비슷한 ‘내부증언자 면책제도’를 도입하는 법 개정안을 냈다가 무산된 것도 그런 이유 때문이었다. 물론 이상적인 건 범죄 관련자들을 다 처벌하는 것이다. 하지만 현실에선 진술 거부나 막무가내식 부인(否認)에 막혀 제대로 처벌하지 못하는 경우가 적지 않다. ‘대장동 사건’도 그중 하나다. 그렇다면 공범 일부를 선처하더라도 자백을 끌어내 이른바 ‘몸통’을 처벌하는 게 사법 정의에 더 부합하는 것 아닌가. 관련자들의 뒤늦은 자백으로 이제야 실체가 드러나는 대장동 사건도 이 제도가 있었다면 훨씬 빨리 진실 규명이 이뤄졌을지 모른다.

지금도 검찰에선 공범의 범행을 증언하면 구형량을 줄여주거나 불구속 처분하는 식으로 이를 활용하고 있긴 하다. 하지만 제도화가 안 돼 있어 진술의 증거 능력 등이 논란이 될 때가 많다. 그럴 바엔 차라리 법에 근거를 명시해 도입할 필요가 있다고 본다. 부패·테러·마약 등으로 대상 범죄를 국한하고, 변호인 동의를 받아 합의한 뒤 판사 앞에서 허가받게 하는 절차를 두면 검찰의 남용 우려도 줄일 수 있을 것이다. 형량 감경에 제한을 두고, 거짓 자백은 가중처벌하는 것도 생각할 수 있다. 검찰권을 키우자는 게 아니라 거악 척결을 위한 ‘한국형 플리바게닝’을 논의해보자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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