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현진의 돈과 세상] [98] 추일서정
초록이 지쳐 단풍이 드는 계절이다. 시인 서정주는 이때 “그리운 사람을 그리워하자”고 했다. 가수 김광석은 “흐린 가을 하늘에 편지를 쓴다”고 했다. 그 정도의 감수성이 없더라도 늦가을 낙엽을 밟고 걷다 보면 누구나 조금씩 시인이 된다.
그런데 정작 어떤 시인은 굉장히 세속적이다. 지천으로 널린 낙엽을 보고 인플레이션부터 떠올렸다. 김광균이다. 그가 1940년 초 발표한 추일서정(秋日抒情)이라는 시는 “낙엽은 폴란드 망명정부의 지폐/포화에 이즈러진/도룬 시의 가을 하늘을 생각케 한다”로 시작한다. 폴란드 망명정부가 뿌리는 돈이 낙엽처럼 무가치하다는 탄식이다.
김광균은 겨우 열세 살의 나이에 등단하여 정지용, 김기림 등과 함께 모더니즘을 개척한 시인이다. 본업은 고무공장 사장이었다. 본인은 문학에 좀 더 시간을 바치고 싶었지만, 여의치 않았다. 동생이 일찍 죽는 바람에 집안의 사업을 이어받아 회사를 경영해야 했다. 사업을 하다 보니 외국 사정에는 밝았다. 1939년 9월 나치가 폴란드를 침공하자 누구보다 그 사실을 빨리 입수하고 자기 시의 소재로 끌어왔다. 아주 독특하고 모던한 발상이었다.
김광균은 사업이 바빠서 세 권의 시집밖에 남기지 못했다. 그러나 그의 자취는 금융계에 많이 남아 있다. 미 군정 시절 김진형(훗날 한국은행 총재)과 장기영(경제부총리) 등 금융계 중견간부들과 수요회라는 친목 모임을 만들고 스폰서가 되었다. 그리고 수요일 점심시간에 만나 일본이 남긴 금융 용어들을 우리말로 바꿨다. 수표(일본어 小切手), 어음(手形), 환(爲替), 환전(兩替) 같은 말들이 그때 확정되었다.
그는 표현의 대가였다. “분수처럼 흩어지는 푸른 종소리”니 “구겨진 넥타이처럼 풀어진 길”이라는 그의 은유와 직유들은 지금 봐도 감각적이다. 1993년 오늘 김광균이 타계했다. 그는 떠났지만, 추일서정은 남아 있다. 세계 도처에서 돈 가치가 낙엽 같다는 걱정들이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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