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스크의눈] 책임정치와 사과의 실종

이우승 2022. 11. 22. 23: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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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중의 분노 동력 ‘증오 정치’ 난무
이태원 참사 책임 미루는 정부·與
李 사법리스크 유감 표명 없는 野
20년 전 ‘DJ 대국민사과’ 되새겨야

2002년은 특별한 해다. 모두가 그해 대선이나 한·일 월드컵을 떠올리겠지만, 개인적으로는 다르다. 10월27일 일요일 출근길 서울중앙지검 1층 로비를 지나 기자실에 들어섰다. 주말 청사 내 주요 사건이 정리된 화이트보드 오른쪽 하단엔 작은 글씨로 “26일 ○○부 피의자 사망”이라는 메모가 있었다. 전 국민에게 엄청난 충격을 안기며 검찰 수사 관행이 혁파되는 계기가 된 ‘서울지검 피의자 구타사망’ 사건은 그렇게 언론에 알려졌다. 사건 발생 9일 만에 이명재 검찰총장은 “수사의 최고 책임자로서 마땅히 모든 책임을 지겠다”며 사퇴 의사를 밝혔다.

이 사건 약 넉 달 전인 6월21일에는 김대중 전 대통령의 대국민 사과가 있었다. 서울중앙지검 기자실 TV를 통해 그 장면을 지켜봤다. 김 전 대통령은 5월 셋째 아들 홍걸씨 구속에, 직전 둘째 아들 홍업씨마저 비리에 연루돼 구속되자 직접 대국민 사과를 했다. 참담한 마음을 토로하고 “제 자식들은 법의 규정에 따라 엄정한 처벌을 받게 될 것”이라고 밝혔다. 검찰을 출입하며 그동안 두 아들이 연루됐던 사건을 비롯해 숱한 권력형 비리 취재 현장에 직접 있었던 터라 이날 사과는 ‘게이트 정국’의 피날레와 같은 느낌으로 기억에 남아 있다.
이우승 정치부장
이때부터 정확하게 20년이 지났다. 언제부터인가 책임을 인정하고, 사과하는 정치 문화가 사라졌다. 정치적 내전이 격화하면서다. 책임 인정은 사과를 부르고, 이는 더 높은 수준의 사과 압박에 시달리는 나비효과를 만들어 결국 진영 전체가 무너진다는 두려움에서다. 스토킹을 방불케 하는 김건희 여사에 대한 비난, 대통령 전용기 추락을 바라는 저주, 특정 단체를 거론하며 이태원 참사를 기획된 사건으로 몰아가려는 주장에는 서로를 향한 증오와 광기가 담겨 있다.

이렇게 된 데에는 정치 지도자들의 탓이 적지 않다. 당장의 정치 권력을 위해 대중의 분노를 자극하고 이를 동력으로 영향력을 행사하는 증오의 정치를 해왔다. 민주당은 노무현 전 대통령의 트라우마가, 국민의힘은 세월호와 박근혜 전 대통령 탄핵에 대한 기억이 있다.

책임 인정과 사과는 법과 제도의 존중이라는 또 다른 의미가 있다. 법과 제도에 대한 불신은 개개인의 편의적인 법 해석과 집행, 사적 제재를 부추겨 결국 국가를 병들게 한다.

여야는 두 가지 크고 어려운 국면에 직면해 있다. 정부·여당은 이태원 참사의 수습이다. 민주당은 이재명 대표의 사법 리스크다. 참사 수습은 누구의 책임인지를 밝히고, 책임질 사람의 범위를 정하면 된다. 피의자 구타사망 사건에서 법무장관과 검찰총장이 동반 사퇴했다. 서울지검장과 3차장 검사가 교체됐고, 부장검사는 검복을 벗었고, 담당 검사와 관련 수사관은 독직폭행 등 혐의로 구속기소됐다. 직접 관련자는 법적 책임, 포괄적 지휘의 책임선상에 있던 인사는 정치적인 책임을 졌다. 조직의 수장으로 권한을 행사하고 명예를 얻었다면 정치적 책임은 도의다.

책임 인정과 사과에 인색하기는 야당도 같다. 이태원 참사를 책임지라며 목소리를 높이지만 공허한 메아리가 되는 것은 스스로를 돌아보지 못하고 있다는 대중의 인식 때문이다. 최측근 인사가 연이어 구속됐지만, 이 대표는 검찰 수사가 기획·조작이라며 반발하고 있다. 민주당도 다르지 않다. 사과나 유감을 표명한 논평은 기억에 없다. 국가 미래에 대한 책임이 오롯이 정부·여당에만 있는 것은 아니다. 국가 운영의 한 축으로서 책임과 의무가 야당에도 있다. 김 전 대통령이 대국민 사과와 함께 법적 처벌을 언급한 것은 법 앞에 평등 그리고 사법 시스템에 대한 존중의 정신이 담겨 있다. 정치 지도자가 불신하는데 국민 누가 이를 신뢰하겠는가. 야당 내에서도 최소한의 유감 표명이 필요하다는 이야기가 나오는 것에는 다 이유가 있다.

“The buck stops here.” ‘모든 책임은 내가 진다’는 의미로 미국의 33대 대통령인 해리 트루먼의 좌우명이다. 공직자의 무한 책임을 강조한 문구다.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이 5월 방한해 윤석열 대통령에게 이 문구가 새겨진 명패를 선물했다고 한다. 비단 대통령에게만 해당하는 것은 아니다. 정치는 실종됐고, 협치는 사라졌다. 미래 없는 내전을 끝내려면 우리 사회 공직자와 정치 지도자들이 새겨야 한다.

이우승 정치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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