까망 얼룩 고양이로 다시 태어나고 싶은 ‘해방촌 수호시인’
38년 지켜본 해방촌
신흥시장엔 억센 장터 여인들 삶 존재
산동네 해방촌엔 힘든 오르막이 많아
지름길은 모두 오르막이란 진리 깨쳐
캣맘 아닌 캣테이커
15년이 넘도록 고양이 밥 주며 살아와
삶도 밥 주는 시간 중심으로 빙빙 돌아
고양이 밥집서 보거든 모른 척 해주길
젊은 시인 황인숙이 밖으로 나가기 위해 건물 좁은 계단을 내려오고 있었다. 이때 바로 아래층에 살고 있던 한 아줌마가 말을 걸어왔다. 오랫동안 시장에서 야채를 팔던 여성이었다. 다소 통통한 체격에 얼굴색이 조금 까무잡잡해 보이는 순하고 선한 인상이었다.
“너, 시 쓴다며?” 황 시인은 깜짝 놀랐다. 아직 이십대로 세상 물정을 잘 알지 못하던 그녀에게 40대 야채장사 여성은 그냥 아줌마였다. 억척스러운 모습은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시와 인연 있을 것 같지도 않던 아줌마였다. 자신의 가슴 한쪽에서 뭔가 찌르르한 느낌이 들었다. 아줌마가 말을 이었다. “나는 네가 노래하는 줄 알았어.”
황 시인에게 해방촌과 그곳 사람들, 고양이들은 어떤 의미일까. 그녀의 문학적 여로는 앞으로 어디로 향해 나아갈까. 황 시인을 지난 16일 서울 후암동 한 커피숍에서 만났다.
―‘장터의 사랑’은 강렬한 시인데.
“장터라는 곳은 치열함이 묻어나는 생활전선이다. 특정인이 있다기보다는 건강하고 당당하게 자기 삶을 헤쳐 나가는 장터의 사람, 제가 보아온 장터 여인을 상정해 쓴 것이다. 신흥시장 속 건물에 살았지만 거의 집 안에만 있거나 시내를 싸돌아다녔기에 시장 사람들을 자세히 알지는 못했다. 건물 아래 상인들을 봤지만, 그곳 상인들이 오히려 저를 더 보고 있었을 것이다. 시장 아줌마들은 시인인 저에 대해 무슨 창을 하는 여자라고 말았는데, 야채장수 아줌마가 너 시 쓴다며 말할 때 어떤 애틋한 느낌이 들었다.”
표제시 ‘내 삶의 예쁜 종아리’에는 해방촌에서 사는 시인의 삶 한 자락이 담겨 있다. 세상의 모든 지름길이란 반드시 오르막이라는 슬픈 진리도 함께. “오르막길이/ 배가 더 나오고/ 무릎관절에도 나쁘고/ 발목이 더 굵어지고 종아리가 미워진다면/ 얼마나 더 싫을까/ 나는 얼마나 더 힘들까// 내가 사는 동네에는 오르막길이 많네/ 게다가 기름길 꼭 오르막이지/ 마치 내 삶처럼”(‘내 삶의 예쁜 종아리’ 전문)
―해방촌에 오르막이 제법 많은 것 같다.
“산동네이니까 당연히 오르막이 많다. 저는 언덕도 좋아하고, 오르막도 좋아한다. 고양이 밥을 주러 매일 거기를 오르내려야 하는데, 아마 유난히 힘든 날이 있었을 것이다. 다들 밥벌이를 위해 열심히 살아도 힘들 것이다. 저는 열심히 살지 않았으니 힘든 것도 당연하고 억울하진 않지만, 그래도 힘든 건 힘든 것이다.”
황 시인은 20년 가까이 고양이들에게 밥을 챙겨주고 있다. 그런데 이게 만만치 않다. 왜냐하면 고양이를 싫어하는 사람들과 맞서야 하기 때문이다. “‘날이 따뜻해지니까 벌레만도 못한 놈들이/ 벌레처럼 기어 나오네!’// 정말이지 나는/ 옹알이하는 젖먹이만큼이나/ 욕을 할 줄 몰랐다/ 지금은 할 줄 아는 게/ 욕밖에 없는 것 같다/ 방금도// 동네 한 바퀴 돌고/ 돌아오는 길에 보니/ 고양이 밥그릇이 사라졌다/ 나는 돌아버렸다/ ‘어디서!’/ 어디선가 숨어서 지켜볼 노인 남자 들으라고/ 나는 목청을 높였다/ ‘어디서 고양이 사료보다도 지능이 떨어진 놈이!/ 번번이!’/ 골목이 떠나가라 소리를 질렀다/ ‘지옥에 떨어질 거야!’/ ‘저승길 편하려면 이렇게 살지 마세요!’/ 근처에서 서성거리다 다가온 고양이들이/ 나 때문에 겁먹고 시무룩해졌다/ ‘그래, 그래, 미안, 미안.’// 아, 이 좋은 봄밤/ 라일라 향기 속에서/ 나는 입에 마른 거품 물고 욕으로 목이 메네”(‘봄의 욕의 왈츠’ 전문)
―고양이 밥주기를 두고 갈등하는 모습이 리얼하다.
“어느 봄날 한 노인이 고양이 밥그릇을 치워버렸다. 노인이 들을지 안 들을지 모르지만, 어디서 숨어서 지켜보겠지, 하면서 욕을 했다. 더 심한 일도 많다. 중성화되고 귀 잘린 고양이들이 한꺼번에 사라지기도 했다. 옆집에서 뻔히 키우는 고양이인데도 약을 놓아서 죽이는 사람도 있다. 혹시 이런 일이 생길까 봐 조마조마해 매일 스트레스 상태다. 고양이에 밥을 줄 때 누가 순한 말을 시키는 것도 싫고, 보는 것도 싫다.”
‘삶이 곧 시’가 되고, ‘시가 곧 삶’ 자체인, 그래서 “천상 시인”(나희덕 시인)인 황인숙의 하루 일정은 고양이 밥 주는 시간을 중심으로 빙빙 돌아간다. 그러니까 오후 6, 7시부터 시작해 새벽 3시까지 해방촌 곳곳을 돌며 고양이 밥을 주는 것에 우선적으로 열과 성을 다한다. 그 나머지 시간에 간헐적으로 메모를 하거나, 시를 쓰거나, 잠을 자거나, 사람을 만나거나…. 그리하여 한 곳에서 시작한 고양이 밥집은 서른 군데를 훌쩍 넘어선 반면, 날로 줄어든 수면 시간 탓에 그녀는 늘 졸린 가수면의 포로가 됐다.
만약 어느 저녁 해방촌 일대에서 조용히 고양이 밥을 주는 그녀를 보거든, 생명 사랑의 시를 쓰고 있다고 생각해 모르는 척해주시길. 혹여 고양이에게 밥을 주는 것을 놓고 악다구니가 벌어지더라도, ‘욕의 왈츠’를 추더라도 시의 삶이라고 넓게 혜량해 주시길. 그리하여, 이 가난한 ‘고양이들의 수호성인’이 ‘슬픈 열대’를 무사히 넘어갈 수 있도록 응원해 주시고, 마침내 다음 세상에선 까망 얼룩 고양이로 태어나길 함께 간절히 소망해주시길….
“이 다음에 나는 고양이로 태어나리라./ 윤기 잘잘 흐르는 까망 얼룩 고양이로/ 태어나리라./… 내 잠자리는 달빛을 받아/ 은은히 빛나겠지./ 혹은 거센 바람과 함께 찬비가/ 빈 벌판을 쏘다닐지도 모르지./ 그래도 난 털끝 하나 적시지 않을걸./ 나는 꿈을 꾸리라./ 놓친 참새를 좇아/ 밝은 들판을 내닫는 꿈을.”(‘나는 고양이로 태어나리라’ 부문)
김용출 선임기자 kimgija@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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