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진현의 창(窓)과 창(槍)]스포츠의 예능화, 그리운 땀냄새와 소중한 사람의 향기

고진현 2022. 11. 22. 19: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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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포츠서울 | 고진현전문기자]스포츠의 전성기? TV 수상기를 틀면 눈에 익은 스포츠 스타들 천지다. 승부 세계에서 다져진 비장미가 제격인 이들의 어색한 웃음은 마치 물에 젖은 피륙을 걸친 것처럼 갑갑하게 느껴진다. 지금이 어느 시대인데 개인의 삶의 선택에 왈가왈부하는 꼰대기질이냐며 비난할 수도 있겠지만 적어도 스포츠의 가치와 본령이 훼손되는 일은 없었으면 하는 간절한 바람에 펜을 들었다.

스포츠를 관통하는 두 가지 중요한 가치는 공정성(fairness)과 정직함(honesty)이다. 각각의 경기 주체에게 공평한 룰을 적용하며 정정당당한 승부를 보장하는 게 공정성의 핵심이라면 정직함은 스포츠의 긍정적 특징을 설명할 때 자주 거론되는 가치다. 흘린 땀은 결코 배신하지 않다는 게 스포츠의 정직함을 가장 잘 설명해주는 아포리즘(aphorism)이 아닐까 싶다. 사람들이 스포츠에 매료되고 열광하는 가장 큰 이유는 무엇일까. 스포츠가 엄혹한 현실에 좌절하고 방황하는 나약한 자아의 희망섞인 탈출구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스포츠의 세계는 공정하지 못한 현실, 땀 흘려도 보상받지 못하는 부조리한 사회와는 사뭇 다른 팬터지를 엿볼 수 있다. 나약한 자아는 걸출한 스타플레이어와 자기 동일화를 경험하며 스포츠에 몰입하고 열광한다. 스포츠가 꿈과 희망을 안겨주는 사회적 묘약이라 불리는 이유다. 그런 스포츠에는 감동의 눈물과 진실한 땀의 냄새가 가득하고 흘린 땀이 고스란히 결과로 이어지는 숭고한 프로세서에 대한 열렬한 신앙이 살아 숨쉬기 마련이다.

시나브로 스포츠가 예능의 옷으로 갈아입는 시대다. 다매체 시대에서 시청률을 끌어올리는 효과적인 수단의 하나로 스포츠가 적극 활용되는 걸 무턱대고 비난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다만 이러한 현상이 스포츠의 핵심 가치를 훼손하고 스포츠의 본령을 무너뜨린다면 얘기는 달라진다.

최근 모 연예인이 실용사격 국가대표 선수로 선발돼 세계선수권대회에 참가한다는 소식이 화제를 뿌렸다. 이 단체가 대한체육회 회원종목 단체인 대한사격연맹과 무관하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과연 얼마나 될까. 그렇다고 이 단체의 권위와 역량을 폄훼하거나 해당 연예인의 노력과 재능을 깎아내리려는 의도는 추호도 없다. 다만 올림픽 및 아시안게임 종목 국가대표 선수들이 얼마나 힘든 과정을 거쳐 태극마크를 달 수 있는지 제대로 알았으면 하는 바람으로 이 케이스를 언급하게 됐다. 사격연맹의 한 관계자는 “국가대표가 그렇게 쉽게 될 수 있느냐는 문의전화가 얼마나 많이 걸려오는지…. 솔직히 이런 전화를 받으면 힘이 빠진다”며 안타까움을 나타냈다. 오해는 금물이다. 대한체육회에 속한 종목단체,특히 올림픽 및 아시안게임 종목 국가대표는 그리 호락호락한 게 아니다. 전문 선수의 뜻을 세우고 인고의 세월을 견뎌낸 뒤 치열한 경쟁의 승리자가 되고서야 달 수 있는 훈장과도 같은 것이다. 얼마나 고된 훈련이었으면 마치 ‘죽음의 냄새’를 맡는다고 할까. 태극마크의 신성함이 사람들의 호기심을 자극하는 수단으로 변질되어선 곤란하다.

또 다른 케이스 하나도 걱정스럽다. 당구는 최근 ‘음지의 잡기(雜技)’에서 ‘양지의 스포츠’로 거듭났다. 이제 한술을 더 떠 한 예능 프로그램이 시청률 사냥에 나섰다. 지난 추억을 자극하는 방송의 레트로 흐름과 맞물려 스포츠 예절과 정서에 벗어나는 콘셉트로 호기심을 자극했다. 이 프로그램은 기껏 힘겹게 쌓아올린 ‘스포츠 당구’를 또다시 ‘음지의 잡기’로 끌어내리는 우를 범하고 말았다. 러닝셔츠 차림에 자장면을 시켜 먹는 그런 장면은 재미와 흥미라는 요소를 고려하더라도 아쉬움이 많이 남는 대목이다.

물론 스포츠의 예능화는 스포츠의 외연을 넓히고 사람들의 관심을 모은다는 장점도 다분히 있다. 그러나 역기능 또한 만만치 않다. 스포츠의 예능화는 체육영역의 황폐화로 이어지고 있다는 지적이다. 스포츠를 통해 부와 명예를 거머쥔 스타플레이어들이 더이상 체육계에서 역할을 다하지 않고 이탈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체육 지도자는 일종의 암묵지(暗默知)를 전수하는 사람들이다. 학습과 경험을 통해 체화된 노하우를 전수하는 건 무척 힘든 작업이다. 최근 한국 체육의 국제 경기력이 급전직하하는 것도 우수 인력의 체육계 이탈현상과 무관하지 않다. 훌륭한 선수들이 은퇴 뒤 체육이 아닌 방송과 연예계 진출을 선호하는 현상은 체육계로선 큰 손실이 아닐 수 없다.

웃음 속에 숨어 있는 화폐의 가치보다 짙은 땀냄새가 밴 체육의 진실된 가치가 소중하다. 체육의 암묵지는 아무나 전수하는 게 아니다. 거친 호흡 속에서 ‘죽음의 냄새’를 맡아본 사람만이 그 가치를 알고 제대로 가르쳐 줄 수 있기 때문이다. 예능에 휩쓸린 한국 스포츠의 가벼움이 안타깝다. 진실한 감동, 짙은 땀냄새,역경을 이겨낸 영웅에게 풍기는 따뜻한 인간의 향기…. 흥미와 재미 그리고 천박한 웃음에게 자리를 내준 이런 것들이 너무나 그립다.

<jhkoh@sportsseou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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