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수록 모르겠고, 그래서 재밌는 것이 소리”···음악극 ‘괴물’ 무대 서는 소리꾼 김율희[인터뷰]

선명수 기자 2022. 11. 22. 18: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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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악극 <괴물> 무대 서는 소리꾼 김율희
소설 <프랑켄슈타인> 에서 모티프 얻은 모노 드라마
이야기 빚고 생동하게 하는 판소리의 힘
작창·소리·연기까지 70분간 극 이끌어
17~27일 국립정동극장_세실 무대에 오르는 <괴물>은 영국의 소설가 메리 셸리와 그의 소설 <프랑켄슈타인>에서 모티프를 얻은 1인 음악극이다. 소리꾼 김율희가 작창과 주연을 맡아 홀로 무대 위에 오른다. 이준헌 기자

무대 위에 선 소리꾼이 굿을 하기 시작한다. 신들린 듯 사설을 하고, 바라를 치며 무덤 사이에서 그가 불러내는 것은 이미 땅속에 묻힌 망자들. 본래 망자를 저승으로 잘 떠나보내는 의례가 굿이라면, 그의 굿은 ‘망자를 살리는’ 굿이다. 어느새 ‘무당’이 된 소리꾼은 죽은 이들을 불러 “나의 피조물, 나의 남편, 나의 자식”인 ‘괴물’을 소환한다.

오는 27일까지 국립정동극장_세실 무대에 오르는 <괴물>은 영국 작가 메리 셸리와 그의 소설 <프랑켄슈타인>에서 모티프를 얻은 1인 음악극이다. 국가무형문화재 제5호 판소리 춘향가 이수자이자 직접 작창(作唱)한 소리로 2018년 평창 동계올림픽 폐회식 무대에 섰던 소리꾼 김율희(34)가 홀로 무대에 오른다.

이 공연에서 소리는 물론 판소리 작창까지 맡은 김율희는 홀로 이야기 속 수많은 등장인물들을 연기하며 70분간 극을 끌어간다. 지난 18일 서울 국립정동극장 연습실에서 만난 김율희는 “1인극의 매력에 빠져 있다”며 “고등학생 때 김성녀 선생님의 <벽 속의 요정>을 처음 보고 모노드라마가 가진 힘에 매료됐는데, <괴물>을 만나며 열아홉살 때 마음속에만 담아뒀던 꿈을 다시 꺼내놓게 됐다”고 말했다.

공연은 전기수가 등장해 “어디서 읽은 건지, 들은 건지 알 수 없는 이야기”를 관객들에게 들려주며 시작된다. ‘메리’의 이야기는 18세기 유럽이 아닌, 20세기 초반으로 추정되는 한반도에서 되살아난다. 전기수로 무대에 오른 김율희는 관객들에게 옛이야기를 들려주고 능청스럽게 관객 호응을 유도했다가도, 세상이 금지한 사랑에 빠진 ‘메리’가 돼 판소리 ‘사랑가’로 객석을 단숨에 휘어잡는다. 곧이어 홀로 남은 ‘메리’에게 손가락질을 하며 무성한 소문을 쏟아내는 마을 사람들이 되는가 하면, 쏟아지는 혐오 속에서 ‘괴물’을 창조하는 이야기 속 박사가 되기도 한다.

<괴물>은 창자가 아니리를 통해 이야기를 자유자재로 전달하는 판소리의 매력을 한껏 살린 공연이다. 판소리 특유의 극성이 현대적인 1인극에서도 수많은 인물과 시공간을 만들어내며 독특한 세계를 창조한다.

“판소리 완창을 하면 그 안에 굉장히 많은 인물들이 등장합니다. 그런 점에서 1인극과 판소리가 닮아 있는 면도 있어요. 다만 판소리에선 특정 인물을 표현할 때도 어느 정도는 제3자의 시선이 깔려 있어서 인물과 거리를 두는데, <괴물>의 경우 극중 인물에 단숨에 몰입해야 하는 것이 저에겐 새로운 도전이었어요. 판소리에서 했던 적당한 연기 그 이상을 보여줘야 한다는 압박에 처음엔 힘들기도 했어요. 이젠 무게감을 좀 내려놓고 무대 위 순간순간에 집중하며 관객과 만나고 있습니다.”

<괴물>에는 여러 층위의 이야기가 겹쳐있다. 전기수의 이야기 속엔 사랑을 좇아 집을 떠나는 여성 ‘메리’가 등장하고, 여기에 메리가 쓴 소설 속 이야기가 더해진다. 그러나 극이 진행될수록 각 이야기들 간 경계는 희미해진다.

시신을 얼기설기 끼워 맞춰 ‘괴물’을 창조한 것이 메리가 쓴 소설 속 ‘박사’인지, 아니면 메리 자신인지 공연은 의도적으로 흐려 놓는다. 작품 속 ‘괴물’은 인간의 혐오가 빚어낸 존재다. ‘미친 여자’로 불리며 세상에서 고립된 메리는 ‘괴물’을 만들어내고, “나는 지금 괴물이 되었다”고 말한다. 김율희는 “메리 셸리와 <프랑켄슈타인>에서 모티프를 얻었지만 작품 속 ‘메리’는 실제 작가와 다른 완전히 새로운 작품”이라고 말했다.

“ ‘옛날 옛날, 그런데 또 아주 오래되지는 않은 어느 한 옛날’이라는 식으로 모호한 시공간 속에 이야기가 펼쳐집니다. 시대를 특정할 순 없지만, 동시에 시대를 관통하는 이야기를 담고 있는 작품이에요. 이 작품이 담고 있는 혐오의 문제는 특정 시대를 떠나 오늘을 살고 있는 우리들에게도 생각할 것들을 던져주는 것 같아요. 무대에 서는 배우 입장에서도 이 이야기가 정확히 언제 벌어진 일인지, 괴물을 만든 게 ‘메리’인지 ‘박사’인지 구분을 명확하게 하지 않았어요. 공연 마지막 전기수가 다시 등장해 이야기를 마무리하는데, 그 때도 ‘나는 전기수이자 메리이자, 박사이자 동시에 괴물’이라는 생각으로 대사를 합니다. 이야기 책을 덮고 책에 메리의 노리개를 꽂는 마지막 장면에선 울컥하기도 해요. 세상의 혐오 속에 매장당하고 숨어 살아야 했지만, 자신만의 글을 쓴 한 사람의 이야기를 잘 보낸다는 마음으로 노리개를 꽂습니다.”

음악극 <괴물> 무대에 오르는 소리꾼 김율희. 이준헌 기자
이야기를 빚고 생동하게 하는 소리의 힘

책 더미가 곳곳에 놓인 단출한 무대, 김율희는 소리만으로 이야기를 만들고 형체 없는 존재들을 생동하게 한다. 무덤에서 망자들을 불러내 괴물을 만드는 장면은 긴 사설과 즉흥성을 특징으로 하는 무가(巫歌)에서 모티프를 얻어 새롭게 작창했다. 김율희는 “기존의 굿음악을 그대로 사용하기 보다는 제 안에 있던 소리를 자연스럽게 풀어내고자 했다”며 “제가 진도씻김굿을 바탕으로 음악을 하는 국악그룹 ‘우리소리 바라지’에서 활동을 하고 있다보니 굿 음악 자체에 더 편안하게 접근할 수 있었던 것 같다”고 말했다. 아이들이 부르는 ‘구미호 노래’는 누구나 쉽게 따라부를 수 있는 구전 민요의 느낌으로 만들었다. 김율희가 작창한 판소리와 민요, 음악감독 류찬이 작곡한 서양음악의 선율이 어우러지며 극의 독특한 분위기를 꾸며낸다. 건반과 첼로, 대아쟁, 북 등 동서양 악기가 소리를 떠받친다.

음악극 <괴물>은 2018년 한국문화재재단, 2019년 국립정동극장의 ‘창작 ing’ 쇼케이스를 거쳐 세상에 나온 작품이다. 쇼케이스 공연에서 관객들의 호응을 얻어 3년 만에 정식 공연으로 다시 무대에 올랐다. 김율희는 “3년 전 쇼케이스가 작은 공간에서 소규모로 열린 공연이었다면 이번 공연은 조명 등 무대와 음악도 더 풍성해졌다”며 “첼로 2대와 건반을 사용했던 지난 공연과 달리 대아쟁으로 국악적인 시김새를 더한 것도 달라진 점”이라고 말했다.

9세 때 소리에 입문한 김율희는 전통 소리를 바탕으로 레게, 재즈 등 장르의 경계를 넘나드는 작업을 해온 창작자다. 다양한 무대에 서고 도전을 즐기면서도 “전통이라는 뿌리”는 그가 늘 단단하게 다듬고자 하는 영역이다. 2016년 흥보가 완창을 시작으로 지난해 춘향가 완창까지 그가 꾸준히 판소리 완창에 도전하는 것도 그런 이유에서다. 김율희는 “완창을 마치고선 정말 뼈가 부서지는 느낌이 들 정도로 힘들었는데, 스스로 ‘다음 단계로 갔다’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소리꾼으로선 도전하고 싶은 욕망이 생기는 작업”이라며 “제 뿌리인 소리가 튼튼하지 않으면 어떤 작업을 해도 수박 겉핥기밖에 안 된다는 확신이 있다”고 말했다.

“제가 어렸을 때, 지금은 돌아가신 인간문화재 선생님이 인터뷰하시는 걸 우연히 옆에서 들은 적이 있어요. 그때 이미 70대 후반이셨는데 ‘이제 내가 소리를 조금은 알 것 같다’고 하시더라고요. 그때는 선생님이 대체 무슨 말씀을 하시는 건가, 그냥 겸손의 말씀 아닌가 싶었는데 이젠 그 뜻을 조금은 알 것 같아요. 20대 때 제가 했던 소리와 지금이 다르고, 앞으로 나이가 더 들면 얼마나 달라질지, 더 깊어질 수 있을지 기대와 흥미로움이 있습니다. 알면 알수록 더 모르겠고, 그래서 재밌고 생각할 것이 많은 게 소리인 것 같습니다.”

음악극 <괴물> 무대에 오르는 소리꾼 김율희. 이준헌 기자

선명수 기자 sms@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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