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은 자의 이름을 움켜쥐고 사는 사람들[플랫]

플랫팀 기자 2022. 11. 22. 10: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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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의 숫자가 너무 많으니까 죽음은 무의미한 통계 숫자처럼 일상화되어서 아무런 충격이나 반성의 자료가 되지 못하고 이 사회는 본래부터 저러해서, 저러한 것이 이 사회의 자연스러운 모습이라고 여기게 되었다.”

“죽음조차 두려움을 불러일으키지 못하고, 나와 내 자식이 그 자리에서 죽지 않은 행운에 감사할 뿐, 인간은 타인의 고통과 불행에 대한 감수성을 상실해간다.”

이 문장은 2019년 11월 경향신문 특별기획 <매일 김용균이 있었다>와 관련하여 인터넷 홈페이지 인터랙티브에 실린 작가 김훈 글 ‘빛과 어둠-김용균 노동자의 죽음에 부쳐’ 일부분이다. 글 아래, 1748이라는 숫자를 클릭하면 수많은 사람의 형체가 화면을 채운다. 일터에서 집으로 돌아가지 못한 1748명 노동자의 구체적 형상이 점멸한다. 사람 모양을 클릭하면 사고 유형, 재해 일시, 업체명과 재해자, 행정조치와 송치 의견, 사고원인이 뜬다. 추상적 숫자에 감춰져 있던 산업재해 피해자의 실존이 감각적으로 깨어난다. 그날, 누군가의 아들이자 딸, 친구, 시민으로 살아가던 그들의 이야기가 갑작스럽게 중단된 것이다. 안타깝게도 김훈의 문장과 겹쳐 떠오르는 사건은 줄지 않고 점점 늘어만 간다.

📌[인터랙티브] 매일 김용균이 있었다

지난 4일 넷플릭스에 공개된 <에놀라 홈즈> 두 번째 이야기는 여성 실종 사건을 다룬다. 제대로 된 첫 번째 사건을 의뢰받은 에놀라는 인권은커녕 생명권조차 제대로 보장되지 않던 19세기 런던의 공장과 빈민가를 헤집고 들어간다. 사건을 의뢰한 소녀는 13살 정도로 보인다. 노동을 시작하던 당시 런던의 공장 여성 노동자 나이가 대개 그랬다. 뿐만 아니다. 영화에선 이러저러한 핑계로 벌금을 가해 그 적은 박봉에서 뺏어간다. 이 역시 사실이었다. 무엇보다, 실종된 여성 노동자 사라 채프먼은 1888년 성냥공장 여성 노동자 파업을 이끈 실제 인물이었다.

에놀라 홈즈 스틸컷. 넷플릭스 제공

에놀라 홈즈는 가상의 여성 탐정이지만 영화 속 상황들은 역사적 사실과 긴밀히 닿아 있다. 출근길에 여성 노동자들의 입속을 검사하는 장면도 그렇다. 티푸스 검진인 척하지만 사실 성냥에 바르는 백린으로 인한 인중독성 괴사를 살피는 것이었다. 당시 성냥공장주들은 이를 알면서도 이윤 때문에 방치했을 뿐만 아니라 노동자 부주의 탓으로 몰았다. 수많은 여성 노동자들이 치명적 백린중독으로 사망했다. 사라 채프먼은 이 사실을 언론에 알리고 백린 사용을 거부하며 영국 런던 동부 브라이언트 앤 메이 성냥공장에서 여성 노동자들의 파업을 이끌어 낸 인물이다.

눈에 띄는 것은 영화 속 사라 채프먼의 행위이다. 공장 노동자인 그는 백린이 치명적 질병의 원인임을 눈치채고, 중독으로 죽은 여성 노동자들의 이름이 적힌 명부를 찢어 훔쳐낸다. 그는 그들의 이름이 잊히도록 내버려 둘 수 없었다며, “그것은 성냥공장 여성 노동자들의 죽음에 대한 증거물이자 그들이 알고 그랬다는 증거예요”라고 강변한다. 이에, 사건을 묵인했던 고위 관료는 사라 채프먼이 손에 쥐고 있던 명부를 빼앗아 불태워 버린다. 고위 관료에게 사망자 명단은 자신이 저지른 잘못의 증거이자 잠재적 위험일 뿐이다. 처벌과 예방적 조치를 위해 쓰여야 할 명단은 단지 몇몇 고위 관료의 일신과 안위를 위해 소각돼 버린다.

성냥공장 여성 노동자들의 시위현장을 그린 삽화. 1871년 6월 6일자 <더 데이즈>. 위키피디아

법은 언제나 늦다. 실제 역사에서도, 사라 채프먼이 파업을 하고 난 이후 20년이 지나서야 백린사용금지법안이 하원을 통과했다. 사라 채프먼의 이야기를 통해 우리는 태워진 명단과 더불어 사라질 뻔한 희생자의 삶을 볼 수 있다. 희생자와 피해자를 기록하고, 그들의 끊어진 이야기를 매듭짓는 것은 죽음을 애도하는, 공동체적 책임의 아주 오랜 방식이다. 참사는 대개 급작스러운 개인사의 종결이기에 마무리 짓는 작업에 있어 한 명 한 명의 생애를 보듬는 작업은 반드시 필요하다.

이 당연한 일이 행정편의주의의 성급함 속에서 유례없는 논쟁의 대상이 되어 버리고 말았다. 이미 되어 버렸다면 문제는 그다음이다. 논쟁이 거세지면 상처 입은 자들은 무기력해질 뿐만 아니라 두려워진다. 덮고 싶은 쪽은 둔감해지는 게 생존에 유리하다며 잊으라 권한다. 하지만 그것은 일신의 안위를 위한 이기적 생존법일 뿐이다. 지금 필요한 것은 이야기하고 싶어도 하지 못하는 자의 편에 선, 섬세한 공감이다. 사라진 건 단지 이름이 아니라 이름을 갖고 살았던 자들의 이야기다.

햄릿은 죽어가며 친구 호레이쇼에게 부탁을 남긴다. “괴롭더라도 이 험한 세상을 살아남아 내 이야기를 전해주게”라고 말이다. 살아남은 자가 할 수 있는 일은 죽은 자의 이야기를 전하는 것이다. 결국, 잊지 않는다는 것은 그 이야기를 움켜쥐고 사는 것일 테다. 괴롭더라도 이 험한 세상을 살아남아 그 이야기를 전해야 한다.

강유정 영화평론가·강남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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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랫팀 기자 areumlee2@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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