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정아의 아트 스토리] [455] 수확의 계절

우정아 포스텍 교수·서양미술사 2022. 11. 22. 03: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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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네데토 안텔라미, 11월, 1200년경, 석재, 이탈리아 파르마 세례당 소재.

건장한 농부가 실하게 자란 순무를 두 손 가득 뽑아 들었다. 유럽에서 순무는 16세기에 비로소 남미로부터 감자가 들어오기 전까지 주식으로 쓰이던 고마운 작물이다. 남자 뒤에 11월의 별자리인 궁수가 있다. 11월은 이처럼 뿌린 것을 거두는 달이다.

단순하지만 사실적이고 생동감이 넘치며, 고된 농사일 중에도 고귀한 품격을 지닌 이 인물상은 1200년경 이탈리아 북부 파르마에서 활동했던 조각가이자 건축가 베네데토 안텔라미(Benedetto Antelami·1150~1230년경)의 작품이다. 당시 장인들이 대부분 익명이었던 것과 달리 그의 이름은 작품에 뚜렷이 새겨져 있어 마침내 유능한 한 개인의 업적을 드러내 널리 알리는 시대가 됐음을 보여준다. 그는 중세 유럽 건축의 백미로 꼽히는 파르마의 세례당을 설계했고 조각 일체를 도맡았다. 이 조각은 나머지 열한달의 노동과 각각의 별자리 및 봄, 겨울의 상징과 함께 팔각형인 세례당의 내부 벽감을 빙 둘러서 놓여있다. 원래는 사계절을 모두 만들어 열여섯점을 채우고자 했을 것이다.

열두달의 상징은 3월에 피리를 불며 한 해를 시작해 가축과 농기구를 다듬고, 밀을 거두고, 포도를 키워 와인을 만들며, 씨앗을 뿌리고, 수확을 한 다음, 땔감을 마련하는 등 바쁘고 고된 삶을 보여준다. 신 중심의 세계였던 기나긴 중세에 이처럼 일해야 먹고사는 평범한 인간이 대대적으로 신의 전당에 등장한 게 바로 이즈음이다. 조용히 앉아 기도하는 것보다도 일한 만큼 거두는 정직한 삶이 신의 뜻에 따르는 거룩한 길이라는 깨달음이 있었던 것. 열심히 일한 베네데토 안텔라미 또한 신 앞에 자기 이름을 적으며 망설이지 않았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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