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인에게 ‘그루밍’ 당하던 인어소녀…그를 구한 건 왕자였을까[김유진의 구체적인 어린이]

기자 2022. 11. 21. 21: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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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 어린이·청소년의 성
‘인어공주’를 물 밖으로 부른 건
왕자에 대한 연모였지만
‘인어소녀’를 수조 밖으로 구출한 건
친구 리비아와의 ‘우정’

그래픽노블 <너와 나의 빨강>(릴리 윌리엄스·카렌 슈니먼 지음·비룡소·2022)의 부제는 ‘우정과 생리에 관한 숨김없는 이야기’다. 원제는 ‘GO WITH THE FLOW’지만 한국어 번역본 제목이 내용을 더 분명히 드러내준다. 부제대로 ‘생리’가 이 책의 주제다. 번역본 제목의 ‘빨강’ 그리고 낮은 채도의 빨간색들로만 그려진 이미지가 상징하는 게 바로 생리다.

공동저자들은 책머리의 헌사에서 “이 책을 생리를 하고 있거나 앞으로 하게 될 모두에게 바칩니다. 당신은 혼자가 아니에요”라고 썼다. 생리를 한다는 게 독자로 부름받을 만큼 대단한 일인가? 혼자가 아니고 함께여야 할 필요가 있나? 순간 의아할 수 있겠지만 여성들이 겪어온 생리의 역사가 대개 억압의 역사(?)임을 골몰히 떠올려본다면 여태 이런 어린이·청소년책이 없었다는 게 오히려 의아해진다.

내 의지나 기대와 상관없이 어느 날 갑자기 시작된 첫 생리는 ‘비로소 여성이 되었다’며 장미와 케이크로 난데없는 축하를 받을 일이었지만 그 후 생리는 감추어야 할 일로 여겨졌다. ‘생리’라는 말을 입에 올리면 큰일 나는 양 ‘멘스’ ‘그날’ ‘마법’ 등 단어로 대체해 부르던 시절도 있었다. 생리를 처리하는 도구와 방법에 대한 정보는 오직 엄마에게서만 전수됐다. 생리용품은 절대 남의 눈에 띄면 안 될 물건인지 휴지나 밴드처럼 덜렁 손에 쥐고 화장실로 달려가는 광경은 보기 힘들다. 얼마 전에는 생리대를 샀더니 봉지값을 요구하지도 않고 검은 비닐봉지에 담아주는 배려(?)를 받았다. 내 어머니의 생리부터 딸들의 생리까지 수십 년간 의학이 눈부시게 발전했어도 생리통과 생리 전 증후군은 여전히 매달 겪어야 할 고통으로 남아있다.

너와 나의 빨강 릴리 윌리엄스·카렌 슈니먼 지음 | 김지은 옮김 | 비룡소 | 2022년

이 책을 보면 미국 청소년의 사정도 크게 다르지 않은 것 같다. 이야기는 헤이즐턴 고등학교의 전학생 사샤가 첫 생리에 바지가 젖자 온 학교의 놀림감이 되는 데서 시작한다. 며칠 후 사샤의 사물함 문짝에는 탐폰과 ‘피의 메리’라는 붉은 낙서가 붙어 있고, 사샤는 전학 온 학교에서 외톨이가 될 거라는 두려움에 떤다. 하지만 따뜻하고 의리 있는 브릿, 크리스틴, 애비가 사샤의 친구가 되어 생리의 모든 것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다가 공적인 문제 제기를 하기까지 이른다.

애비는 사샤가 첫 생리를 하던 날 화장실 자판기에 생리용품이 떨어져 곤란했던 걸 떠올리며 교장 선생님께 자판기가 늘 비어있지 않도록 관리해 달라고, 나아가 생리용품을 무료로 제공해 달라고 건의한다. “생리는 건강에 관한 문제예요. 그리고 이 문제는 우리 학교의 절반이 넘는 사람과 관련된 문제고요”(116면) “모든 공중화장실에서 휴지는 무료인데, 생리대나 탐폰은 왜 무료가 아닌 거야? 사람들이 피를 흘리잖아! 그건 자연스러운 현상이고.”(53면) 애비의 주장과 근거는 너무나 지당해 왜 여태 이런 생각을 못했는지 충격일 정도다. 지금껏 생리를 여성 개인이 감당할 사사로운 영역으로만 여겼기 때문일 테다.

첫 생리를 성장의 과정으로 기뻐할 수는 있지만
진정한 ‘여성’이 된 양 축하하는 게
과연 ‘여성’으로서의 존재를
잘 살피는 일일까

여성의 성과 생식에 관련된 신체 건강이 소홀하거나 은밀하게 취급되면서 공적 영역에서 소외된 면이 있다. 생리를 터부시하거나 감춰온 오랜 역사도 물론이다. 그리고 이 모든 배경에는 성차별이라는 근본 원인이 자리한다.

처음 생리를 시작하는 여성 어린이와 청소년에게 생리를 마냥 신성시하지도, 숨기지도 않는 이야기를 더 많이 들려주어야겠다. 첫 생리를 여성 어린이와 청소년의 신체가 성장하는 과정으로 기뻐할 수는 있겠지만 진정한 ‘여성’이 된 양 축하하는 게 과연 ‘여성’으로서의 존재를 잘 살피는 일인지도 되돌아봐야겠다. 생리용품을 살 돈이 없던 여성 청소년에게 이제 생리용품 지원금이 제공되는 걸 보면 초점을 어디에 둘지 명확해진다. 여성 어린이와 청소년의 생리는 신체와 건강의 일로 보다 공적인 차원에서 접근할 여지가 여전히 남아 있다. 그럴 때 여성 어린이와 청소년은 자신의 몸을 더 잘 알고 긍정적으로 받아들이면서 몸과 마음의 건강을 기르는 일을 시작할 수 있을 것이다.

인어소녀 도나 조 나폴리 지음 | 데이비드 위스너 그림 | 심연희 옮김 | 보물창고 | 2018년

성과 관련한 여러 이슈 중 그래도 생리는 어린이와 청소년 독자에게 이야기하기 어렵지 않은 축에 속한다. 이에 비해 성폭력이라는 주제는 어떤 재현 방식이 가능하며, 윤리적인지에 대한 성찰을 줄곧 부른다. 그래픽노블 <인어소녀>(데이비드 위즈너 그림·도나 조 나폴리 글·보물창고·2018)는 좋은 해답 하나를 보여주는 텍스트다.

그림을 그린 데이비드 위즈너는 유명 그림책상인 ‘칼데콧 상’을 세 번이나 수상하고 현재 가장 사랑받는 그림책 작가이며 이 책은 그의 첫 그래픽노블로 더 주목을 끌었다. <인어소녀>는 현실과 환상의 경계를 넘나드는 재현 방식을 통해 ‘그루밍(Grooming) 성폭력’을 말한다. ‘그루밍 성폭력’이란 가해자가 친분을 악용해 피해자를 심리적으로 지배하며 저지르는 성범죄로 특히 아동 성폭력의 대표적인 형태다.

해안가의 작은 아쿠아리움 ‘오션 원더스’는 ‘인어소녀’가 있다며 관람객을 끌어들인다. 실제 존재하는 ‘인어소녀’는 주인 아저씨가 시키는 대로 절대 관람객에게 들키지 않으면서 호기심만 불러일으키며 수조 안에 살고 있다. 아저씨는 ‘인어소녀’에게 거듭 상기시킨다. “나를 절대로 화나게 하지 마라. 내게 어떤 힘이 있는지 똑똑히 보게 될 테니”(8면)라고 권력을 과시하며 협박한다. “사람들은 경찰을 부를 거다”(21면) “그러면 과학자들이 널 실험실로 데려갈 거야. 넌 실험 대상이 되겠지. 그들이 널 칼로 가른다고! 사람들은 널 혐오할 거다”(22면)라며 거짓말로 겁주고 수조 안에 묶어 놓는다. “잘 들어. 너는 내 거야. 내 보물이지. 나는 널 사랑하는 사람이야”(23면)라며 심리를 조종한다. “사람들은 나처럼 널 소중하게 대하지 않을 거야”(157면) “넌 나 없이 살 수 없다고!”(163면) 등등의 대사는 판타지라는 재현 방식에서도 그루밍 성폭력의 면면을 적실하게 드러낸다.

“아저씨는 날 보호하고 싶어 해”(21면), “날 혼내지는 않았으면 좋겠는데”(21면)라고 생각하며 수조 안에서만 살아가던 ‘인어소녀’에게 구조의 손길을 뻗는 건 또래 여성 청소년 리비아다. 리비아가 작은 벨을 선물해주고, 직접 그린 그림으로 바깥 세상을 알려주고, 피자를 가져와 나눠 먹는 가운데 ‘인어소녀’는 점점 수조 밖을 궁금해하며 한밤중에 몰래 수조 밖으로 나와본다. 옛이야기 ‘인어공주’처럼 ‘인어소녀’에게도 물 밖에서 두 다리가 생긴다. “폐가 있다고 헛된 생각은 하지 마라”(23면)는 아저씨의 말은 거짓이었다. 자신이 물을 조종하는 신이라는 말 또한 기계 장치로 파도를 일으키며 바다의 신 넵툰을 연기하는 것일 뿐이라는 사실을 ‘인어소녀’는 그제야 알아챈다.

어느 날 태풍이 치고 아쿠아리움이 무너지면서 ‘인어소녀’는 드디어 수조 밖으로 나오고 리비아와 만난다. ‘인어공주’를 물 밖으로 부른 건 왕자에 대한 연모였지만 ‘인어소녀’를 수조 밖으로 구출한 건 친구 리비아와의 우정이었다.

아동 성폭력을 아동청소년문학에서 재현하는 일은 쉽지 않은 만큼 작품이 많지는 않다. <운하의 소녀>(티에리 르냉 지음·비룡소·2002), <제프가 집에 돌아왔을 때>(캐서린 애킨스 지음·문학과지성사·2009), <유진과 유진>(이금이 지음·밤티·2020·개정판), <안녕, 그림자>(이은정 지음·창비·2011) 등을 손꼽을 수 있다. 이 중 2004년 출간된 <유진과 유진>은 아동 성폭력 주제를 국내 아동청소년문학에서 거의 처음 이야기한 작품으로 여전히 널리 읽힌다. 또 <안녕, 그림자>는 여성 어린이들이 연대해 가해자에 맞서는 용기와 당당함을 잘 그려냈다.

너를 위한 증언 김중미 지음 | 낮은산 | 2022년

최근 출간된 청소년소설 <너를 위한 증언>(김중미 지음·낮은산·2022)은 성폭력을 역사와 사회 현실의 장에서 바라보는 시야로 접근하는 점에서 남다르다. <인어소녀>가 현실과 환상을 오가며 보다 넓은 연령층의 어린이, 청소년 독자에게 다가갈 수 있던 데 비해 이 청소년소설은 김중미 작가 고유의 리얼리즘 방식으로 성폭력의 내외를 치밀하면서도 진중하게 드러낸다.

작품의 여성 인물들은 성폭력 생존자이거나 그들의 가족, 친구다. 고등학생인 가온과 결이가 중심인 서사는 가온의 엄마 지영과 결이의 언니 하늘에게로 확장된다. 가온과 결이는 지영의 고통이 성폭력 트라우마이며, 하늘이 친족 성폭력의 피해자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작품에서 성폭력은 일탈적인 개인의 범죄이기보다는 과거의 정치 사회 현실과 가부장 구조가 결합해 발생한 폭력의 역사로 조망된다. 1980년대에 시위 주동자로 수배되어 도피 중인 남성과 과거 학생운동 경력을 배경 삼아 승승장구하는 남성이 성폭력 가해자로 밝혀진다.

“우리 아빠도 학생운동 하다가 강제 징집 당해서 군대 갔다가 유학 갔대. 아빠는 그때 얘기할 때마다 자기가 영웅이었던 것처럼 말해. 자기가 어떻게 고난의 시간을 넘었는지, 이 나라의 민주주의에 어떤 기여를 했는지 엄청 강조해. 근데 나는 그런 얘기 듣는 게 진짜 싫거든. 고1 때 너랑 미래랑 극장에서 ‘1987’이랑 ‘택시 운전사’ 보고 나서 그랬잖아. 엄마 아빠 세대가 존경스럽다고. 그때 나는 그런 생각이 조금도 들지 않았어. 오히려 아빠의 이중적인 모습을 더 적나라하게 알았다고나 할까?”

“어떤 모습?”

“민주주의 어쩌고저쩌고하는데 우리 집에는 민주주의 따위는 아예 존재하지 않거든.”

-<너를 위한 증언> 56면

민주주의가 존재하지 않는 건 ‘우리 집’뿐만이 아니다. 과거 민주화운동의 현장에서조차 여성과 남성의 관계에서 민주주의란 없었기에 성폭력이 발생했다. 이 책의 여성 인물들이 죽음에 이르기까지 고통스러운 이유가 성폭력이라는 사실이 연이어 밝혀질 때마다 세대가 바뀌어도 근절되지 않는 성폭력의 현실을 직시하기가 괴롭다. 그럼에도 여성 인물들이 세대를 잇는 사랑과 우정으로 연대의 고리를 만들고, 결국 성폭력 피해자가 생존자로 일어서는 장면은 다시 한 걸음 내디딜 힘을 준다. 지영의 남편 기환은 세상만사를 담고 있는 소설 중에서도 “지영과 같은 일을 겪은 여성을 다룬 소설은 찾기 힘들었다”고 말하는데 이 청소년소설은 바로 그 소설이 된다.

비민주적인 성별 권력에 저항하면서 청소년 인물들은 불의한 권력과 제도에 좌우되지 않고, 새로운 사회 구성 원리를 꿈꾸며, 자신의 길을 찾아 나선다. 집안 어른들에게 인정받기 위해 자해까지 일삼으며 공부하던 결이는 “무엇이 되지 않아도, 무엇을 성취하지 않아도, 목표가 분명하지 않아도 괜찮은 사람이라는 것을 배워 가고 있어요”(285면)라고 말한다. 청소년의 성장 과정이 흔히 반항이라고 일컬어지는 건 권력의 작동을 의심하고 불의한 권력에 저항하면서 비로소 새로운 세대로 성장하기 때문일 거다. 오랜 시간 여성 신체에 작동해온 성별 권력을 비판적으로 사유하고 변화에 나서는 가운데 오늘날 어린이와 청소년은 성장의 과정 하나를 넘어설 수 있을 것이다.

■김유진



아동문학평론가·동시인. 동시집 <나는 보라> <뽀뽀의 힘>, 청소년시집 <그때부터 사랑>, 아동문학평론집 <언젠가는 어린이가 되겠지>를 출간했고, ‘토닥토닥 잠자리 그림책’ 시리즈를 썼다.

아동문학 작품 속에서 어른과 어린이가 좀 더 자주 만나고, 좀 더 가깝게 이어지는 날이 올 수 있기를 바란다.

김유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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