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지리산 레인저] 술이 원수, 대피소 이용객은 무슨 죄?

조형구 지리산국립공원경남사무소 자원보전과장 2022. 11. 21. 09: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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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립공원 금주령 왜 내렸나
지리산 대피소 취사장 그늘에서 식사하는 등산객들. 음주가 금지되기 전엔 대부분 술이 함께했다.

우리나라 국립공원에서 술을 못 마시게 된 지 4년이 지났다. 음주금지 조치가 취해지기 전, 국립공원 대피소에선 술과의 전쟁이 끊이지 않았다.

어느 해인가 9월 중순 장터목대피소에서 있었던 일이다. 한 탐방객이 야외 데크·취사장에서 지인과 저녁식사를 한 후 늦게까지 술을 과하게 먹고 대피소 실내에서 잠을 자다 옆자리에서 자고 있는 다른 탐방객에게 토해 옆 사람의 침낭과 옷을 다 젖게 했다.

피해를 입은 탐방객은 사무실로 올라와 우리에게 하소연했다. 우선 나는 피해를 입은 탐방객에게 사과의 말씀을 드렸다. 그리고 동료 직원과 함께 수건으로 오물로 뒤범벅이 된 자리를 깨끗이 닦았다. 피해자에게 우선 여분의 옷을 전달해 탈의실에서 갈아입게 했다.

사무실에 같이 들어와서 다시 한 번 사과의 말을 전하며 따뜻한 차를 한 잔 권했고, 한 번도 사용하지 않았던 비상용 새 담요 3개를 모포실에서 가져왔다. 모포를 안고 피해 탐방객과 함께 비어 있는 자리로 갔다. 짐도 조용히 옮긴 뒤 탐방객에게 잘 주무시라고 안내한 후 사무실로 올라왔다.

일은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오물로 젖은 침낭과 옷을 직접 손세탁해서 밤새 따뜻한 사무실에서 말렸다. 그렇게 말린 침낭과 옷을 다음날 아침 사무실에서 피해 탐방객에게 돌려주면서 "본의 아니게 불편을 드려 죄송하다. 다음에 지리산 천왕봉 일출 보러 장터목대피소에 예약해 오게 되면 꼭 팀장인 나에게 연락을 달라. 천왕봉까지 안내해 드리겠다"고 말했다. 다행히 큰 갈등으로 번지진 않았던 사건이라 탐방객과 레인저 간의 작은 추억이자 인연으로 간직됐다.

현재처럼 예약제가 정착되지 않았던 시절의 대피소 풍경.

사소한 오해로 멱살잡이까지

술과의 전쟁은 벽소령대피소에서도 일어났다. 과거 벽소령대피소에는 건물 지하층(하동 방향)에 취사장이 있었다. 취사장에서 A탐방객 일행은 저녁식사를 하고 있었고, B탐방객 일행은 대피소 앞 1층 야외 데크에서 저녁식사 겸 술자리가 있었다. 당시엔 음주가 불법 무질서행위가 아니었기에 단속 대상은 아니었다.

B탐방객 일행 중 한 명이 술을 많이 마신상태여서 본인의 예약자리 3호실로 자러 갔다. 다른 탐방객들은 저녁을 일찍 먹고 피로도 많이 쌓인 상태라 일찌감치 배정된 자리에 가서 자고 있었다.

다만 A탐방객 일행은 식사가 길어져 일행들의 자리가 많이 비어 있었다. 문제의 B탐방객은 그냥 비어 있는 곳이 본인의 자리라고 착각했는지 A탐방객 일행의 자리에 들어가 무작정 코를 골고 음식물을 토한 상태로 잠들어 버렸다.

저녁식사를 마친 A탐방객 일행이 3호실에 들어와서 자기들 자리에서 잠을 자려고 하는데 다른 사람이 본인 일행의 자리에서 잠을 자고 있어 기가 차고 많이 기분이 상했다. 그래서 B탐방객을 깨워 자기 자리에 가서 자라고 왜 남의 자리에서 잠을 자고 있냐면서 실랑이를 벌였다. 술에 취한 상태라 이 실랑이는 금방 고성방가로 확대됐다.

3호실에서 자고 있던 다른 탐방객이 사무실로 와서 현재 싸우고 있는 상황을 얘기해 나랑 동료 직원이 내려갔다. 나는 다른 탐방객이 자고 있어 피해를 주니까 밖으로 나가서 우선 이야기로 해결하자고 설득한 후 밖으로 실랑이 대상자와 잠에서 깬 일부 A탐방객을 데리고 나왔다.

대피소 취사장. 현재는 음주가 금지돼 있다.

1층 야외 데크는 아직 야식을 먹는 B일행들이 있었다. 지하층에서 야식을 먹고 있던 A탐방객 일행들도 1층 야외 데크로 다 올라왔다. 두 일행들은 다시 심하게 다투었다. 조용한 밤이라 말소리가 울리고 컸다.

나는 차근차근 상대방 의견을 다 듣고 최소한의 중재를 했다. 술 한 잔 들어가 취하고 기분도 많이 상한 상태여서 쉽게 조율이 되지 않았다. 특히 서로의 연고를 말하는 와중에 술에 취해 자다 올라왔던 A탐방객 일행이 B탐방객 일행의 멱살을 잡는 바람에 분위기는 더 격앙되었다. 모처럼 친구들과 지리산 종주하러 오면서 새로 사 입었을 윗옷의 단추가 다 떨어져 나갔다.

이제는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서로 기분이 상했고 심하게 고성을 지르며 서로 밀치며 다투기에 이르렀다. 다른 일행은 경찰을 불러달라고 우리 직원에게 요청했다.

소란은 밤 12시가 넘도록 계속됐다. 원만한 화해는 물 건너갔고 우선 서로 전화번호를 주고 하산한 뒤 해결하는 것으로 정리했다. 또 다른 탐방객들에게 소음으로 수면을 방해하는 것도 그렇고 내일 각자의 산행일정도 있으니 인솔자 간에 소란행위를 마무리하도록 합의한 후 모두 잠들었다.

다음날 아침 대피소 모포 정리와 청소를 하고 있는데 지난밤 문제의 B탐방객 일행이 모포실 앞 중앙홀로 와 간밤에 있었던 음주 소란에 대해 사과했다. 그들은 "원만히 해결하는 데 많은 도움을 줘서 고맙다"면서 세석대피소로 계속 산행했다.

월간산 11월호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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