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라만상 ‘창조’의 비밀을 풀기 위해 만들어진 ‘꿈의 공장’

이정호 기자 2022. 11. 20. 21: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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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전 기초과학연구원 ‘중이온가속기연구소’ 가보니
대전 소재 기초과학연구원(IBS) 중이온가속기연구소의 전경. 총 11개동의 건물이 들어서 있다. 중이온가속기연구소 제공
인류의 과학기술 진전에 촉매가 될 아직 찾아내지 못한 ‘동위원소’ 탐색
총 예산 1조5183억원 투입…이렇게 많은 돈이 들어간 연구시설 드물어
권면 사업단장 “세계 8번째지만 독특한 한국형”…가장 진보된 성능 갖춰

첫인상은 깨끗하게 관리된 수도권의 물류창고 단지를 연상하게 했다. 탁 트인 대지 위에 직육면체 형태의 낮고 넓은 건물들이 즐비했고, 주변에선 주거지나 상업지역을 찾기 어려웠다. 대전 소재 기초과학연구원(IBS) 중이온가속기연구소의 풍경이었다.

지난 15일 중이온가속기연구소가 각종 시설들을 언론에 공개했다. 일단 가장 눈에 띄는 건 광활한 규모였다. 부지 면적이 무려 95만㎡였다. 축구장 137개, 여의도의 3분의 1 크기다.

가속기 구축 사업이 시작된 건 2011년이고 시설물은 지난해 완공됐다. 건물은 총 11개동이다. 건물을 짓는 데 사용된 철근 길이만 2만5500㎞에 달한다. 예산은 총 1조5183억원이 투입됐다. 한국에서 이렇게 많은 돈을 쏟아부어 이토록 큰 규모로 과학연구시설을 짓는 일은 드물다. 대규모 지원의 결과물은 어떤 모습을 하고 있을까. 연구소 관계자의 안내에 따라 ‘라온’이란 이름으로 불리는 중이온가속기와 관련 시설들을 살펴봤다.

■ 100m 넘는 기차 같은 가속기

중이온가속기의 핵심 시설들은 지상이 아닌 지하에 자리 잡고 있었다. 계단을 따라 지하 10여m를 내려가자 긴 터널 같은 장비가 설치된 공간이 나타났다. 층고가 웬만한 콘서트홀만큼 높을 정도로 전체 규모가 널찍한 장소였다.

그곳에서는 ‘입사기’와 ‘초전도 선형 가속기’가 위용을 뽐내고 있었다. 입사기는 중이온에 전기를 걸어 약한 속도로 가속을 시작하는 역할을 맡는다. 축구로 따지면 ‘킥오프’이다. 이렇게 움직임이 시작된 중이온에 강한 가속력을 붙이는 것이 초전도 선형 가속기다. 축구로 치면 상대 문전을 향한 롱패스다. 선형 가속기는 기차 같은 형상을 띤 길이 106m짜리 대형 구조물이었다.

양전하나 음전하를 가진 원자 또는 분자를 뜻하는 ‘중이온’을 가속하려면 가속기 전체를 매우 차갑게 만들어야 한다. 이때 필요한 것이 액체헬륨이다. 연구소 관계자를 따라 들어간 또 다른 시설에는 액체헬륨 저장탱크가 여러 개 설치돼 있었다. 컨테이너만 한 덩치의 탱크에 든 액체헬륨을 쓰면 영하 268도로 온도를 떨어뜨릴 수 있다. 달 표면보다 차갑다.

■ 동위원소는 ‘새 세상의 문’

이런 복잡하고 예민한 시설들을 대거 사용해 중이온을 가속하려는 이유는 뭘까. 권면 중이온가속기연구소 사업단장은 “이론적으로 있을 것으로 예측되지만 아직 발견되지 않은 ‘희귀 동위원소’를 찾으려는 것”이라고 밝혔다. 그는 “현재 발견한 동위원소는 3000~4000종, 아직 발견되지 않은 동위원소는 8000~1만종에 이를 것으로 예상된다”고 설명했다.

동위원소는 원래 같은 원소였지만, 중성자의 수가 달라지면서 질량과 성질이 본래 원소와 달라진 원소를 뜻한다. 알지 못했던 동위원소를 더 많이 얻어낼수록 인류는 전에는 실현할 수 없다고 믿었던 과학적 탐구와 경제적인 혜택을 경험할 방법을 얻는다. 이동수단은 마차밖에 없다고 믿던 중세 마부가 타임머신을 타고 현대로 건너와 스포츠카를 경험하는 상황에 빗댈 수 있다. 새로운 세상이 열리는 것이다.

중이온가속기로 만든 동위원소를 이용하면 우주에 있는 미지의 암흑물질을 규명하고 감마선 폭발의 시작을 가늠할 수 있다. 손실이 일어나지 않는 전기 저장 기술을 찾는 것도 가능하다. 인체를 손상시키지 않는 암치료용 동위원소를 탐색하고 새로운 품종의 작물을 만들 수 있다. 이산화탄소를 저감할 물질을 알아내는 데에도 응용할 수 있다.

‘입사기’(왼쪽 사진)는 중이온을 가속하기 위한 출발지 역할을 한다. 입사기에서 느린 속도로 움직이기 시작한 중이온을 ‘초전도 가속기’(오른쪽)가 전달받아 빛 속도(초속 30만㎞)의 절반 수준까지 빠르게 밀어붙인다. 이정호 기자·중이온가속기연구소 제공

■ 외국보다 진보된 기술 방식

연구소는 중이온을 전기의 힘을 이용해 빛 속도(초속 30만㎞)의 절반까지 밀어붙인 뒤 비교적 가벼운 이온을 우라늄 같은 무거운 표적 물질에, 반대로 무거운 이온을 탄소 같은 가벼운 표적에 충돌시키는 방식을 병행하며 희귀 동위원소를 규명한다. 총탄으로 부서진 과녁의 파편에서 새 물질을 찾는 격이다.

권 단장은 “이렇게 두 가지 가속 방식을 섞어 쓰는 일은 외국에는 없다”고 말했다. 한국은 미국과 중국, 일본 등에 이어 세계에서 8번째로 중이온가속기를 만들었지만, 가장 진보된 성능을 갖고 있다는 뜻이다.

연구소는 현재 저에너지 가속기까지 마련해 놓은 상태다. 아직 완제품은 아닌 셈이다. 더 많은 전기를 쓰는 고에너지 가속기는 2025년까지 다양한 연구·개발을 수행한 뒤 시설 구축을 추진한다. 홍승우 중이온가속기연구소장은 “2011년 처음 연구시설을 구축하려고 할 때 여러 어려움이 있었지만 과학자들의 꿈과 열정으로 이겨내고 지난해 10월 첫 가동에 성공했다”며 “앞으로 세계 최고가 돼야 하는 과정이 남은 만큼 연구진을 지켜봐 달라”고 말했다.

이정호 기자 run@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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