닭모가지를 비틀어도, 양심에 털이 나도···

조상인 미술전문기자 2022. 11. 20. 16: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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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닭'이라 써야 하는데, 받침 위 글씨를 뒤집어 적었다.

그 옆에 걸린 은색 바탕의 작품에는 '기억나지 않습니다'라고 적혀 있다.

위장용 군복 무늬인 카모플라쥬 배경 위에는 BTS라 적혔고, 빙하가 녹아가는 극지방 풍경이 나란히 놓였다.

고대 석상에서 떨어져 나온 발 조각과 병실에 누운 환자의 발, 마구잡이로 뻗어난 식물 뿌리와 건물을 뒤덮을 정도로 치렁치렁한 전선, 삼계탕에서 추린 닭뼈와 잔뜩 쌓인 폐자전거 등 닮은 듯 다른 사진들을 함께 배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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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윤동천 개인전 'Pairs 쌍-댓구'
글자 표면에 잔뜩 돋아난 털 등
우화·속담 소재로 현실 꼬집어
갤러리시몬서 내달 21일까지
윤동천 '새벽은 온다'. '닭'이라는 글자의 받침 윗부분을 비튼 형태다. /사진제공=갤러리시몬
윤동천 개인전 'Pairs 쌍-댓구' 전시 전경. /사진제공=갤러리시몬
[서울경제]

‘닭’이라 써야 하는데, 받침 위 글씨를 뒤집어 적었다. 작품 제목은 ‘새벽은 온다’. 옳거니, 글자 윗부분 ‘닭 모가지’를 비틀어도 새벽은 온다는 뜻이렷다. 그 옆에 걸린 은색 바탕의 작품에는 ‘기억나지 않습니다’라고 적혀 있다. 가까이서 표면을 살펴보면 글자 위에 털이 잔뜩 돋아있다. ‘양심에 난 털’을 은유한다. 쓴웃음 짓게 하는 ‘풍자미술’로 유명한 개념미술가 윤동천의 신작들이다. 종로구 통의동 갤러리시몬에서 한창인 그의 개인전 ‘Pairs 쌍-댓구’에서 선보였다.

윤동천 '이상한'. '기억나지 않습니다'라고 적힌 글씨 위에 털이 잔뜩 돋아있는 작품이다. /사진제공=갤러리시몬
윤동천의 '이상한'의 세부. /조상인기자

커다랗게 높이 걸린 북은 21세기형 신문고(申聞鼓)인 듯하다. 막상 두드려 본 북은 그러나 조용하다. 단단하게 느껴진 북 표면은 팽팽하게 당겨놓은 패브릭 소재라, 소리 없이 채를 튕겨낼 뿐이다. 그 옆에 붙은 문구 ‘정의는 강자의 이익’은 소크라테스와 정의에 대해 설전을 벌인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 트라시마코스가 남긴 말이다. “고등학생 때, 이 말을 처음 들었을 때만 해도 ‘말도 안되는 소리’라며 분노했었는데 이제는 강자에 의해 그때 그때 정의가 다르게 정의된다는 사실을 인정하게 됩니다.” 윤 작가는 울리지 않는 북을 비롯해 머리가 맞붙은 망치, 다리가 묶인 선글라스, 마주 선 칫솔 등 대립과 소통 부재로 제 기능을 상실한 사물들을 층마다 배치했다.

윤동천 설치작품 '정의는 강자의 이익'

윤동천은 1990년대 다원주의 한국 현대미술을 대표하는 작가다. 그는 ‘모더니즘 추상미술’과 ‘현실참여 민중미술’이 대립하던 1980년대를 지나 1988년 서울올림픽을 기점으로 한 문화변혁기를 관통하며 작가로 자리잡았다. 윤동천 만의 독자적 미학은 현실에 대한 날 선 비판의식을 가장 ‘미술답게' 보여주며, 대중과의 공감할 수 있는 유머와 풍자를 활용했다는 점에서 특별하게 빛난다. ‘한글’을 활용한 언어유희와 한국적 일상용품을 작품으로 끌어들인 점은 후배작가들에게도 큰 영향을 끼쳤다. 일상을 새롭게 혹은 낯설게 다시 보게 하는 것이 현대미술의 역할이라고 할 때, 가장 탁월한 작가 중 하나로 윤동천이 손꼽히는 이유다.

색면 추상화로 보이는 1층 대작은 ‘블랙핑크’에서 출발했다. 이름 그대로 검정과 분홍이다. 그 옆은 파랑과 노랑, 하양·파랑·빨강이다. 우크라이나와 러시아 국기임을 알아챌 수 있다. 위장용 군복 무늬인 카모플라쥬 배경 위에는 BTS라 적혔고, 빙하가 녹아가는 극지방 풍경이 나란히 놓였다. 대중의 뜨거운 관심을 끄는 ‘핫’한 소재지만 정작 대응은 ‘쿨’하기만 한 주요 이슈를 펼쳐놓은 윤동천 방식의 ‘리얼리즘’이다.

2층에는 ‘도처에 놓인 아름다움’이라는 주제 아래 코뚜레·호미·바구니 등을 간략하게 표현한 작품들이 셋씩 짝지어 전시됐다. 윤 작가는 “사물에 대한 사전 지식이나 고정 관념을 버리면 요강도 도자기처럼 고와보일 수 있다”면서 “단순하고 하찮은 것이지만 기능을 배제한 그 형태만을 제대로 한 번 보자는 의도”라고 말했다.

3층 영상작업은 짝으로 나란히 함께 볼 때 그 의미가 증폭되는 사진들을 엮었다. 고대 석상에서 떨어져 나온 발 조각과 병실에 누운 환자의 발, 마구잡이로 뻗어난 식물 뿌리와 건물을 뒤덮을 정도로 치렁치렁한 전선, 삼계탕에서 추린 닭뼈와 잔뜩 쌓인 폐자전거 등 닮은 듯 다른 사진들을 함께 배치했다. 설명 없이 함께 보여주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 구구절절하지 않기에 관객의 상상력이 증폭될 여지가 더 커진다. 30년간 서울대에서 후학을 키운 작가가 정년퇴임 후 처음 선보이는 개인전이다. 미술관 전시를 중심으로 활동해 온 작가가 모처럼 연 갤러리 전시이기도 하다. 12월21일까지.

조상인 미술전문기자 ccsi@se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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