몽환적인 물안개처럼 … 초월의 풍경을 그리다
국제갤러리 서울·부산 전시
"세상은 흐리거나 혼란스러워
회화는 물질의 감각·그림자"
물안개가 자욱한 숲에 유령처럼 으스스한 버드나무가 서 있다. 나무 아래 수변에는 그림자가 드리웠다. 사람도 집도 없다. 오직 고요뿐이다.
이기봉(65)의 회화 속 풍경은 몽환적이다. 숲과 나무를 그린 풍경은 거리를 가늠할 수 없다. 원근법을 깨뜨리는 요소는 화법이 아닌 재료다. 캔버스에 풍경을 그리고 그 위에 플렉시글라스(얇은 아크릴판)를 겹쳐 올리고 그림을 덧그린다. 두 번 그린 풍경은 자연스레 흐릿한 원경(遠景)과 선명한 근경(近景)으로 나뉜다. 1㎝가 안 되는 '틈'이 거리감을 만들고 물안개가 피어오르게 하는 비법. 원경 속 숲은 흐릿해진다. 나무는 조연일 뿐이며, 주연은 물안개다.
이기봉의 국내 5번째 개인전이 2008년 이후 14년 만에 국제갤러리 서울점 K1·2와 부산점에서 12월 31일까지 열린다. 1986년 대한민국미술대전 대상을 수상했고 2010년 부산비엔날레, 2011년 모스크바비엔날레 등에 참여한 작가의 오랜만의 외유다.
근작 50여 점을 소개하는 전시 개막일에 만난 작가는 "안개를 좋아해서 주연으로 그렸다. 첫째와 두 번째 레이어가 서로 포옹을 하면서 환영을 만든다. 인간에게 필수적인 것이라 환영 없이 사는 건 죽음이지 않겠나. 내 그림이 그 사실을 환기시켜 줬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국제갤러리 K1 입구에는 이번 전시에서 드물게 색채를 쓴 녹색의 풍경을 만날 수 있다. 전시 주제이기도 한 'Where You Stand' 시리즈다. 이 작품 앞에서 작가는 독일 낭만주의 화가 카스파르 다비드 프리드리히를 호명했다. 쓸쓸하다 못해 황량하고 종교적인 숭고함마저 내포한 풍경들을 그린 화가. '안개 바다 위의 방랑자'를 그는 10여 년 전에 만났다.
작가는 "물안개를 그리기 시작할 때쯤 마음을 흔들어 놓은 그 작품을 만났다. 뭐가 먼저랄 것도 없이 스며들고 영향을 주었을 거다. 저에게 이 세상은 흐리거나 혼란스럽거나 둘 중 하나다. 작품 앞에서 '내가 서 있는 곳'을 느껴줬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조연이 되는 그림의 안쪽을 가리키며 탄식하기도 했다. 그는 "작업을 할 때 좌절감이 큰데, '안에 숨겨진 그림이 더 멋있는데'라는 생각을 한다. 거기서도 진실을 얻게 되는 게 이렇게 뼈와 살을 내줘야 어떤 보상을 받는구나 싶다. 그래서 작업은 '투쟁'이기도 하다"고 털어놨다.
물안개 풍경들은 K2에서 수묵화처럼 흑과 백만 남은 거친 추상화처럼 변모한다. 화폭은 더 커지고 표현은 과감해진다. 습도가 사라지고, 타버린 재처럼 온도만 남아버린 숲처럼 보인다.
그는 회화의 모든 작업 과정은 하나의 엔지니어링이라고 설명했다. 곤지암 인근 산 중턱, 자연 깊숙이 들어가 작업실을 열었다. 안개가 매일 찾아오는 곳이다. 그는 "회화라는 조건은 안개처럼 참 미스터리하고 우리가 그것을 깊이 파악하기가 쉽지 않다. 회화는 뇌 안의 세계를 반영하고 작동하는 기계적인 활동"이라고 설명했다. 그러면서 "생각이 물질이 되고, 물질을 강조할 때 표현이 풍부해진다. 회화는 물질의 감각이다. 물질의 환영들이 이렇게 될 수 있구나 싶다. 만져보고 싶지 않나"라고 물었다. "그래서 제 그림은 그림자 게임처럼 보인다. 제가 서 있는 곳의 그림자."
거대한 풍경화의 향연이지만 그의 전시는 관조적이고 철학적이다. 20년째 읽고 있다는 인생의 책 비트겐슈타인의 '논리 철학논고'의 텍스트를 그려 넣은 회화도 있다. 풍경 속에 숨어 있는 가장 독특한 작품은 흰색의 누워 있는 거대한 책 모양의 설치작업 'A Thousand Pages'다. 세계를 향한 탐구를 거듭하던 물질성의 회화는 결국 책이 되고야 말았다.
"이 작품은 일종의 책이다. 일종의 인생처럼 넘겨 보는 거다. 우리는 텅 빈(Empty) 시스템에서 살고 있다. 인생은 천천히 한 페이지씩 넘어가고 뒤 페이지를 볼 수 없다. 너는 몇 페이지를 읽고 있니? (좁은 폭을 손으로 그리며) 저는 요 정도는 온 거 같다. 인생을 천천히 읽어 나가야겠다."
[김슬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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