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딸로 태어난 그녀는 언제나 포로" 노벨상 글릭 시집 3권 국내 첫 출간
페르세포네 차용 '아베르노' 등
시의 정수로 불릴 책 3권 출간
고전은 늘 망각으로부터 자유로우며, 당대 독자에게 거듭 읽힘으로써 꾸준히 재맥락화된다. 그런 점에서 어떤 시집은 애초에 고전의 가능성을 품고 태어난다. 수천 년 시간을 초월하며 형성된 여성의 목소리이자 신과 인간 사이에 놓인 자연의 시점(視點)에서 문장을 남겼다는 점에서 미국 시인 루이즈 글릭(79)의 글은 이미 시의 전범으로 은유될 만하다.
2020년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루이즈 글릭의 책이 출판사 시공사에서 국내 처음으로 출간됐다. 2년 전 10월, 국내에 번역된 시집이 단 한 권도 없어 독자들의 아쉬움이 컸던 바로 그 시인의 시집이다. 정은귀 한국외대 교수가 번역한 글릭의 이번 시집은 총 3권으로 1992년 작 '야생 붓꽃', 2006년 작 '아베르노', 2014년 작 '신실하고 고결한 밤'이 우선 출간됐다.
노벨문학상 발표 당시 한림원이 특별히 언급했던 명저 '아베르노'부터 펼치지 않을 수 없다.
아베르노(Averno)는 이탈리아 나폴리에서 서쪽으로 10마일 떨어진 작은 호수의 이름이다. 고대 로마에서 아베르노는 지하세계로 가는 입구로 이해됐다. 글릭은 아베르노란 장소적 의미를 환기하면서 그리스 신화 속 절세미인 페르세포네를 소환한다. 페르세포네는 하데스에게 납치돼 하계로 끌려갔다가 풀려난 여성이다. 글릭은 비명을 지르며 전차에 실려갔던 페르세포네에게서 '떠남과 돌아옴'을 사유한다. 페르세포네는 단지 한 사건의 피해자가 아니라 2000년 역사에서 폭력의 대상이었던 여성들의 상징이 된다.
'그녀가 딸로 태어난 이상 계속 포로였다는 것을. 그녀를 기다리는 그 끔찍한 결합들이 그녀의 남은 인생을 몽땅 삼킬 것이다.'(시 '페르세포네 그 방랑자' 일부)
글릭에게 여성의 세계는 누구도 이 세계가 무엇인지 말할 수 없는 세계로 이해되고(시 '프리즘'), 한쪽에선 영혼이 헤매고 다른 한쪽에선 공포를 살아가는 인간들이 놓인 처소로 언급되기도 한다(시 '아베르노').
퓰리처상 수상 시집 '야생 붓꽃'엔 식물의 목소리, 인간(시인)의 목소리, 신의 목소리로 삼분화되는 작품 58편이 담겨 있다. 글릭은 식물을 응시하는 인간이 아닌, 식물이 인간에게 건네는 목소리라는 설정의 실험적인 시를 썼다.
꽃은 매해 씨앗으로부터 태어나 만개한 뒤 늦가을에 이르러 소멸한다. 일종의 한바탕의 축제다. 글릭에 따르면 꽃의 틔움과 시듦은 한편의 생(生)과 같아서 꽃은 전생과 후생 사이를 걸어가는 연속성 사이의 현시다. 그 때문인지 글릭은 '다른 생에서 내 죄는 무엇이었을까요. 이번 생에서 내 죄가 슬픔이듯'(시 '나팔꽃' 일부)이라며 꽃으로부터 다른 생을 사유하기도 하고, '살아 있는 것들이 모두 똑같을 정도로 빛을 필요로 하지는 않아요. 우리 중 일부는 우리 자신의 빛을 만들어요'(시 '광대수염꽃' 일부)라며 꽃의 속성에서 인간이 걸어가야 할 길을 발견하기도 한다.
전미도서상 수상작 '신실하고 고결한 밤'은 글릭의 2014년 최근작이다. 노년에 이른 글릭이 가장 아끼는 시집으로 알려져 있다. 한 예술가가 만년에 이르러 자신의 과거를 돌아보는 이야기인데, 글릭은 예술이 만들어지는 과정을 혼성적인 목소리로 발화한다. '열린 창문'이란 시가 가장 눈에 띈다. 종이 끝에 '끝'이라고 쓰는 습관이 있던 한 예술가는 텅 빈 페이지들을 마지막 페이지 위에 얹어두었다. 어느 날 여름 창문을 열었는데 바람이 종이를 휘휘 저어 페이지들이 뒤섞인다. 글릭은 '그 종이들 사이에 끝이 있었다'며 혼돈 속에서 피어나는 예술과 예술의 종착역을 가만하게 들여다본다.
[김유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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