약자가 약자를 외면할 때… ‘아마겟돈 타임’은 다가온다

라제기 2022. 11. 20. 16: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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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등학생 폴(뱅크스 레페타)은 장난꾸러기다.

폴은 부모의 기대에 미치지 못한다.

폴은 부모의 기대를 마냥 외면할 수 없다.

폴의 부모와 조부세대는 사회적 약자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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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일 개봉 영화 '아마겟돈 타임'
폴(왼쪽)은 허물없이 대화를 주고받는 할아버지 애런으로부터 많은 영향을 받는다. 유니버설픽쳐스 제공

초등학생 폴(뱅크스 레페타)은 장난꾸러기다. 수업시간에 담임선생님을 우스꽝스럽게 묘사한 그림을 그렸다가 벌을 받아도 웃는다. 폴의 아버지 어빙(제레미 스트롱)과 어머니 에스더(앤 해서웨이)는 엄격하다. 폴이 공부를 열심히 해 좋은 대학에 가기를 염원한다. 폴은 부모의 기대에 미치지 못한다. 그는 반항적인 흑인 낙제생 죠니(제일린 웹)와 친구가 되고 평생 잊지 못할 사건과 마주한다.

영화 ‘아마겟돈 타임’은 1980년 뉴욕이 배경이다. 미국은 급변을 앞두고 있다. 신자유주의를 내건 로널드 레이건이 대통령 당선을 눈앞에 두고 있다. 함께 사는 사회보다 각자 알아서 사는 시대가 도래할 참이다. 영화는 어린 주인공의 사연을 통해 당시 시대의 공기를 품는다.

폴은 공립학교 같은 반인 죠니와 금방 친해진다. 두 사람은 어른들의 간섭 없이 자유롭게 지내기를 바라며 모종의 일을 꾸민다. 유니버설픽쳐스 제공

폴의 부모가 자녀 교육에 유난스러워하는 이유가 있다. 폴은 우크라이나계 유대인이다. 집안은 조부세대 때 미국으로 이민 왔다. 항상 폴의 편에 서 주는 할아버지 애런(앤서니 홉킨스)은 차별받으며 미국에 착근했다. 자식세대, 손주세대는 어엿한 미국인으로 살길 원한다. 그래서인지 폴의 부모는 교육열을 폭력적으로 드러낸다. 폴이 공립학교에서 학업을 제대로 이루지 못한다는 생각에 사립학교로 전학시킨다. 집안 형편에 맞지 않게 많은 돈이 들어가니 폴을 더 다그친다. 폴은 부모의 기대를 마냥 외면할 수 없다.

폴이 새로 다니는 사립학교는 다르다. 한 반 학생 수부터가 적다. 여러 인종이 섞여 다니는 공립학교와 달리 백인 일색이다. 부동산 개발업자 프레드 트럼프(도널드 트럼프 전 미국 대통령의 아버지)가 학교 후원자다. 폴의 동급생들은 레이건에 열광하고 인종 차별 발언을 서슴지 않는다. 폴이 철책 너머 죠니와 잠시 대화를 나누는 것만으로도 수상쩍게 여긴다. 자유분방한 성격에 예술가로 살고 싶은 폴은 기가 꺾인다.

영화는 시대의 분기점인 1980년 사회상을 통해 미국을 에둘러 비판한다. 폴의 부모와 조부세대는 사회적 약자였다. 자식은 미국사회에서 차별받지 않고 살아가길 바란다. “우리 애들은 모든 특권을 누려야 해”(어빙)라고 말할 정도다. 하지만 주변 사람들의 불우한 처지에는 눈을 감는다. 어빙은 냉대 속에 살았고 민주당 지지자인데도 아시아인에 대한 차별적인 시선을 지녔다. 그는 폴이 중국 음식 배달을 주문하자 ‘칭총챙(중국어를 흉내 낸 동아시아인 비하 단어) 푸드’라고 이죽거린다. 정의롭지 않은 행동을 하기도 한다. 죠니가 부당한 처벌을 받을 상황에서 자기 자식만 챙기고 없던 일로 여기려 한다. 약자가 자신보다 못한 약자를 외면하는 모습들이 이어진다.

폴의 부모는 교육열이 뜨겁다. 양육 방식이 엄하기도 하다. 자유분방한 폴은 어머니, 아버지와 늘 부딪힌다. 유니버설픽쳐스 제공

제목은 ‘지구 종말의 시간’을 의미한다. 지구가 소행성과 충돌하거나 외계인이 침범하는 내용의 영화에 쓰일 만하다. 영화는 무시무시한 제목과 달리 서정적이다. 아이들의 우정이 나오고 가족애가 그려진다. 폴은 치기 어린 일탈 끝에 생각지 않은 비극과 맞닥뜨리고 무정한 현실을 깨닫는다. 지독한 편견이 갈등과 불평등을 조장하고 세상을 지옥처럼 만든다고 영화는 폴의 사연을 통해 말하려 한다. 제목이 ‘아마겟돈 타임’인 이유다.

미국 인디 영화의 간판인 제임스 그레이 감독이 연출했다. 감독의 자전적 영화다. 지난 5월 제75회 칸영화제 경쟁 부문에서 첫 상영됐다. 내년 3월 열릴 제95회 미국 아카데미영화상 시상식 주요 부문 후보로 거론되고 있다. 23일 개봉, 12세 이상 관람가.

라제기 영화전문기자 wenders@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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