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보 기금화’로 재정 투명성 제고?···다른 대안은 없을까

민서영 기자 2022. 11. 20. 16: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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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상의료운동본부 회원들이 지난 8월29일 서울 서초구 건강보험정책심의위원회 회의장 앞에서 ‘2023년도 건강보험료율 결정 앞둔 시민사회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성동훈 기자

올해 말로 재정 국고 지원이 만료되는 건강보험을 ‘기금화’하자는 논의가 최근 정부와 여당에서 나오고 있다. 전문가들은 재정 투명성 제고를 위해 장기적으로는 기금화가 불가피하다면서도, 현재 보장률 수준으로는 시기상조라고 지적했다.

국고지원 일몰에 정부·여당 ‘기금화’ 카드···시민단체, “보장성 악화” 강력 반발

건보 기금화는 20년 넘게 꾸준히 논의되고 있다. 건보는 국민연금 등 나머지 사회보험처럼 적립식 기금 형태가 아니다. 단기보험으로 당사자 간 자치 원칙에 따라 1년 단위로 수지 균형을 유지한다. 기금 형태의 사회보험은 ‘기금관리기본법’에 따라 기금 운용 계획안과 결산에 대해 국회 심의를 받는다. 건보 재정은 국회 통제 없이 보건복지부 장관 승인 아래 운용된다. 현재 건보료율 등 건보 관련 주요 정책은 가입자와 공급자, 공익위원이 8명 동수로 참여하는 건강보험정책심의위원회(건정심)에서 결정한다.

최근 고령화와 보장성 확대 등으로 건보 재정이 줄어드는 가운데 올해는 일몰제로 운영되던 건보재정에 대한 국고지원이 종료된다. 일몰이 다가오자 야당은 일몰 조항을 삭제해 국가가 항구적으로 건보 재정을 지원하도록 하는 법안을 발의했다. 반면, 정부와 여당은 ‘기금화’ 카드를 꺼내 들었다. 서정숙 국민의힘 의원이 지난 8일 대표 발의한 ‘국민건강보험법’ ‘국민건강증진법’ ‘국가재정법’ 개정안을 보면, 2024년부터 건보를 기금화해 국가재정법을 적용하고 국회 심사를 거치도록 하고 있다. 기금화를 통해 건보 재정이 국회 통제를 받게 해 재정 운용의 투명성을 강화하고, 동시에 재정 악화와 보험료 부담 급증을 막자는 것이다.

건보노조 등 관련 단체는 강하게 반발하고 있다. 40여개 시민단체들이 참여하는 ‘의료민영화 저지와 무상의료 실현을 위한 운동본부’는 지난 14일 성명을 내 “건강보험 재정 자체를 기재부가 통제하면서 수십조원을 입맛에 맞게 운용하려는 것”이라며 “건강보험 재정이 각종 증권에 투자되면 천문학적 손실을 볼 수 있고, 그 손실은 보장성 악화, 보험료 인상 등으로 이어질 것”이라고 비판했다.

“기금화하면 신속한 대응 어려워···민주적 거버넌스 더 훼손될 것”

전문가들은 건보 재정 운용을 통제하고 투명하게 관리해야 한다는 점에는 공감한다. 그러나 이에 대한 대안으로 곧바로 기금화를 하는 건 섣부르다고 말한다. 신영석 한국보건사회연구원 선임 연구위원은 기자와 통화에서 “지금 이미 (복지부 예산이) 100조 시대에 도달했고 1년 단위 재정 소요 금액은 아마 최고로 클 텐데 따라서 분명하게 (건보 재정이) 투명성 있게 관리돼야 하는 것은 맞다”면서도 “건강보험은 보장성 확대나 신약·신의료 기술 등을 수시로 빨리 판단해서 급여화하는 등 즉각즉각 대응해야 할 특성을 갖고 있는데, 현재는 보장성도 충분하지 않고 행위별 수가제 등 지불보상제도도 여러 군데 손을 봐야 하는 상황에서 기금화가 되면 의도는 좋지만 제도를 반쪽짜리로 만들어 버릴 수도 있다”고 밝혔다. 건보 재정이 매번 국회의 심의를 받는 기금이 된다면 탄력적인 재정 운영과 신속한 의료 대응에 어려움이 있을 수 있다는 지적이다.

기금화하면 국회와 재정당국이 건강보험을 좌지우지하면서, 현재도 잘 지켜지지 않는 당사자(보험자, 가입자, 공급자)간 자치 원칙이 더 훼손될 수 있다는 우려도 있다. 남은경 경제정의실천시민연합 정책국장은 “지금도 건정심이라는 건강보험 거버넌스(관리방식) 자체가 엄청 형식적이고 거의 다 복지부가 주도하면서 (가입자는 배제하고) 공급자들하고만 밀접하게 연관이 돼 있어 문제가 많은데, 섣불리 기금화로 갔을 때 오히려 재정당국에 의해서 보장성 확대 등 취지가 많이 후퇴하거나 훼손될 우려가 있다”고 말했다. 가입자의 목소리가 더 반영되는 민주적인 거버넌스에 대한 고민이 부재한 기금화는 “복지부가 좌지우지하던 걸 기재부가 좌지우지하겠다는 얘기”밖에 안 된다는 것이다.

기금화 대신할 대안은···내부적 통제로 재정 투명성 높여야

상당수 전문가는 장기적인 관점에서 건보 기금화는 불가피하다고도 본다. 다만 건보 기금화는 지금보다 보장성이 강화된 후에야 다시 논의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한국의 건보 보장률은 2020년 기준 65.3%로 주요 선진국들보다 낮은 수준인데, 보장률이 70% 정도로 오를 것으로 예측되는 2028~2030년 사이에 다시 기금화 논의를 해도 늦지 않다는 얘기다.

현재의 보장률 수준에선 당장 기금화 대신 내부적인 통제 방안을 만들어 재정 건전성과 투명성을 높여야 한다는 제안도 있다. 신 연구위원은 “예를 들면 의사결정기구인 건정심이 지나치게 정부가 원하는대로 구성이 된다는 지적들이 많은데, 정부가 임의로 지정하는 공익위원 대신 그 자리를 국회가 선임하든지, 또 재정과 관련된 변동 사항이 발생할때는 상시적으로 국회에 보고하는 등의 조정이 필요할 것 같다”며 “결국 ‘당사자 간 합의에 의해 결정이 되는구나’ ‘국민의 뜻이 반영되고 있구나’가 분명하게 드러날 수 있도록 거버넌스 틀을 바꿔주는 게 필요하다”고 말했다.

민서영 기자 mins@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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