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년째 늪에 빠진 사내 … 비밀의 정원으로 함께 갈까요? [명사와 걷다]

신익수 2022. 11. 20. 16: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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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포늪 기록자 정봉채 사진작가
정봉채 작가가 직접 찍은 우포늪.

'우포의 비경을 봤다고 하는 이들은 알지 못한다. 아름다움을 취하려면 내가 가진 한 부분을 내어놓아야 한다는 것을.

하루에 2000컷에서 3000컷의 사진을 찍는다. 나는 늪이 준 내 병을 사랑하기로 했다./ 지독한 끌림(정봉채) 중에서'

창녕 우포늪. 하필이면 늪에 빠졌다. 늪 옆에 갤러리 작업실 집까지 손수 지었다. 예순이 넘은 그는 지금도 매일 집에서 5분 거리 우포늪을 향한다.

나가면 2000~3000장을 찍는다. 22년째다. 셔터에 잠긴 우포늪 사진만 2000만장이다. 그야말로 '지독한 끌림'이다. 겨울 초입, 그를 찾았다.

늪처럼 차분하고 온화한 표정. 우포만 찍는 사진가 정봉채는 늪이 되어가고 있었다.

◆ 지독한 끌림, 우포늪

"웍 우우우~ 우웍웍웍." 인터뷰 도중 전화벨이 울린다. 낯선 소리다. 그가 쑥스럽게 말한다. "우포늪 새들이 놀랄까봐, 벨소리까지 새소리로 바꿨죠." 우직하게 22년째 우포늪만 찍는 이 남자, 정봉채다. 복사나무 과수원에 둘러싸인 이곳, 공씨마을에 터를 잡은 지는 벌써 15년째. '거대한 자연 캠버스' 우포와는 차로 불과 5분 거리다.

"참으로, 미쳤었지요. 우포늪 촬영만 10년 계획했으니. 하나의 주제를 제대로 담으려면 그만큼의 시간이 필요하다고 생각했어요. 그러다 찍어도, 찍어도 다를 게 없었던 제 사진이, 차원이 달라지는 '사건' 하나가 일어납니다." 10년 한우물, 쉽지 않다. 정신적 육체적 고통을 떠나, 경제적으로 무너졌다. 결국 모든 것을 정리하고 칼국수 가게나 차릴까 할 때 마법 같은 순간이 펼쳐졌다.

"우포늪 한편이었죠. 저 먼 곳에서 야생 고라니 한 마리가 나를 향해 다가오는 겁니다. 도망가지도 않고요. 사진을 찍으려는데, 메모리카드가 부족하고 차는 멀리 있고…." 작품도 포기. 그저 바라볼 뿐인 그 순간, 기적이 일어난다. 고라니가 코앞까지 다가와 그의 눈을 물끄러미 바라본 거다. 무의식 중에, 손을 들어 고라니를 쓰다듬었다. 그 야생의 고라니를.

야생 고라니와의 비현실적 만남은 정봉채 명사의 세계관을 완전히 뒤바꿔 놓는다. 그때 그의 머릿속을 관통한 게 '상호시선'이다.

"망치로 머리를 한대 쾅 맞은 느낌이었죠. 그 전까지 저는 (나만의) 렌즈를 통해 나의 시선으로만 그들, 우포늪과 그 생명체를 본 거였지요. '그들'이 보는 시선이 있다는 걸 까맣게 잊고 말이죠. 제 사진이 그랬던 거죠. (그들의 시선을 모른 채) 일방적 시선으로만 사물과 자연을 담기만 했으니."

정봉채의 시선은 이때부터 바뀐다. 자연에 다가가는 일방적 시선을 멈추자, 자연이 다가왔다. 그때야 보였다. 숲에서, 늪에서, 보이진 않지만 나를 보고 있는 수많은 작은 동식물의 존재들. 그때부터 자연과 생명체는 그의 사진에 오히려 와서 담겼다. 찍는 게 아니라, 그저 담길 뿐이었다.

그렇게 담긴 우포의 세계가 모여 있는 곳이 정봉채 갤러리다. 그의 대표작 중 하나인 '백로'. 달빛 아래 가시연잎에 앉아 자고 있는 1000마리 백로가 300㎜ 망원렌즈에 담겼다. 하나에 2m나 되는 큼지막한 연잎에 이토록 많은 백로가 몰려온 건 기적 같은 일이다.

"원래 그 자리에, 그렇게 있던 모습인데, 그게 보이지 않았죠. 상호시선을 알고 난 뒤, 비로소 보인 겁니다."

하필이면 왜 늪이었을까. "스펀지를 떠올려 보세요. 홍수가 나면, 그 물을 품어 자연을 살립니다. 모성의 존재 같은 느낌이죠. 천박한 자본주의가 자연 파괴와 기후 위기를 만들죠. 농토나 도로가 되어 사라지는 늪을 보면서, 그 모성을 살려야 한다는 생각을 했어요. 제 우포늪 사진의 본질은 '정화'로 흘러갑니다. 오염된 인간의 마음을 맑게 되돌리고 싶지요."

◆ 정봉채의 아지트 '비밀의 정원'

참으로 영광이다. 우포늪을, 우포늪 사진 명사와 걷다니. 게다가 그가 설명까지 해준다. 22년을 다녔으니, 눈감고도 길을 간다.

9.7㎞의 탐방로를 한 바퀴 돌면 3시간30분가량 걸린다. 정봉채 명사가 가장 좋아하는 코스는 징검다리를 건너 '비밀의 정원'이라 부르는 사초 군락지를 돌아보는 길이다. 이곳 시작은 징검다리다. 너비 1m만 한 돌박을 10여 개 밟고 넘어야 한다. 비가 오면 탐방은 불가능하다.

"한편은 갈대, 또 반대쪽은 (저렇게) 물억새 군락이 펼쳐지죠. 제가 이곳에 이름을 붙였어요. 비밀의 정원이라고. 특허를 냈어야 했는데, 요즘은 누구나 다 쓰더라고요." 100여 m쯤 들어가자 몸을 꼬고 있는 초대형 왕버들 한그루가 눈에 띈다. 속이 텅 빈 노송이지만, 물에 산소를 공급하는 소중한 기능을 해내고 있다. 키 작은 갈대와 깊은 버드나무 터널을 지나자 은빛 우포늪의 깊은 숨구멍이 드러난다. 참꽃 군락지로 유명한 비슬산과 화황산 능선이 먼 곳에 멋지게 걸린 늪지에는 왜가리 서너 마리가 연신 물속을 주시하는 중이다. 멀리 갈 것도 없었다. 그가 왜 우포늪에 빠졌는지, 22년을 찍고도 아직 더 찍을 게 남았는지. 조금 깊이 들어가니, 상쾌한 향기가 콧잔등을 때린다. 마음이 차분해지는 독특한 향. 그의 입이 또 열린다.

"이게 늪 냄새예요. 과부가 밤꽃에 미친다는 말 아시죠? 전 늪 냄새가 진동하면 미쳐버리죠."

30여 분을 돌고, 돌아오는 길. 아까부터 기분 나쁜 소리가 들린다. 숲 양편에서 '사각사각' 하며 뭔가 따라오는 느낌. 도대체 뭘까.

"이게, 상호 시선이에요. 우리가 길을 가는데, 숲속 그들이 따라오는 거죠. 우리는 몰라도 그들은 늘, 우리를 따라오며 우리를 보고 있는 겁니다."

조곤조곤 설명을 이어가는 그의 옷깃에 들사마귀 한마리가 붙어 있다.

"이 녀석이 보고 싶었나 보네. 가끔 이렇게 아는 척하는 녀석들이 있어요." 세상에. 우포늪과 함께한 지 22년의 내공. 그는 늪이 '되고' 있는 게 아니라, 이미 늪이 '되어' 있었다.

[창녕/신익수 여행전문기자·사진/정봉채 작가]

▶▶정봉채 명사와 함께하는 우포늪 사진 산책

'정봉채갤러리'에서 정봉채 명사와 함께 그가 20여 년간 우포늪을 담아 온 사진을 감상하고, 우포늪으로 이동해 사진 촬영하는 프로그램이다. 스마트폰, 디지털카메라 소지자뿐만 아니라 카메라 없이 두 눈으로 담고 싶은 체험자까지 참여할 수 있다. 목포 코스(2시간 소요)를 기본으로 목포, 우포, 사지포 등 우포늪 전체의 핵심 스폿을 이동하며 산책하는 전체 코스(8시간 소요) 중 선택할 수 있다. 정봉채 명사가 날씨에 따라 '우포늪 촬영'에 최적화된 장소로 안내한다. * 장소:정봉채갤러리 (경상남도 창녕군 이방면 노동길 77). 체험비 1인 5만원(전 연령 가능, 최소 10인 이상, 최대 30인까지). 관련 홈페이지(blog.naver.com/photobong1)

▶▶정봉채 작가는

1957년 12월 6일, 경남 하동 출생. 개인 전시 '우포 지독한끌림' 한새뮤지움 외 30회. 단체전 아트바젤·스위스 등 300여회. 2008년 세계 람사르총회 공식 사진 작가. 2013년 미국 예술아카데미 예술대학원 초빙교수. 2022년 한국관광공사 지역명사 선정. 2022년 람사르환경재단 홍보대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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