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민번호 뒷자리가 1이든 2든, 모두 저 박에디인데 말이죠”

장수경 2022. 11. 19. 12: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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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S] 기획][한겨레S] 기획 _ 인권활동가 에디의 성별 정정 분투기
판결문엔 수술 여부 주로 언급
“그동안 겪은 고뇌 빠져 씁쓸”
성별 정정 뒤 정보 변경 복잡
업체서 명의 변경 요구하기도
엠티에프(MTF) 트랜스젠더 여성인 박에디씨가 지난달 24일 인터뷰에서 법적 성별 정정 과정에서 겪었던 고충을 설명하고 있다. 이정용 선임기자 lee312@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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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딩~딩.”

뭔가 나타날 것 같은 분위기의 음악에서 현이 돌출되듯 튕겨진다. 심상찮은 음악이 점점 고조되고, 이윽고 방문이 열린다. 곧이어 의료진과 병원 침대에 누운 한 여성이 등장한다. 성별 확정 수술을 막 마친 박에디(활동명·35)다.

에디는 올 1월 말 타이(태국)의 한 병원에서 수술을 마치고 병실로 들어오는 모습을 찍은 영상을 자신의 페이스북에 올렸다. 댓글엔 ‘영웅 탄생’ ‘슈퍼히어로’ 등이 달렸다. “게임이나 영화를 보면 영웅이 태어났을 때 배경음악이 깔리잖아요. 함께 태국에 간 지인들에게 병실에 들어섰을 때 다시 태어난 느낌으로 웅장하고 멋진 노래를 틀어달라고 했어요.” 에디가 선택한 곡은 게임 ‘어쌔신 크리드 오디세이’에 나오는 메인 테마곡 ‘레전드 오브 디 이글 베어러’(Legend of the Eagle Bearer)​이다. “병실에서 노래가 들렸을 때 ‘아차’ 싶었어요. 마취가 덜 깨서 비몽사몽이었는데 창피하더라고요. 안정을 취해야 하는데 말이에요.(웃음)”

 다섯줄짜리 성별정정 판결문

에디는 엠티에프(MTF, 스스로를 여성으로 정체화한 지정 성별 남성) 트랜스젠더 여성이다. 올해 초 성별 확정 수술을 받기 전까지 약 5년간 청소년성소수자 위기지원센터 띵동에서 활동가로 일하며 청소년 성소수자들의 ‘든든한 백’이 돼왔다.

성별 확정 수술은 에디가 오랫동안 기다렸던 일이었지만, 뻔한 활동가 수입으로 몇천만원이나 하는 수술비를 충당하기는 어려웠다. “주변 도움이 컸죠. 비용을 모금해 주기도 하고, 수술 뒤 한국에 돌아왔을 땐 사골국을 끓여주기도 했어요. 고맙죠.” 덕분에 몇개월 동안 몸을 회복하고, 올 6월 법원에 성별 정정을 신청했다.

성별 정정 신청 서류를 준비하는 건 만만치 않다. 먼저 가정법원에 등록부 정정 허가 신청을 해야 한다. 신청서와 가족관계등록부의 기본증명서, 가족관계증명서, 주민등록표등(초)본은 필수로 제출해야 한다. 출입국 증명서, 혼인관계증명서, 정신과 진단서, 수술확인서, 의사 소견서, 성장환경진술서, 인우보증서, 신용정보조회서 등은 2020년 3월 대법원 예규가 개정됨에 따라 참고 서면으로 바뀌었지만, 대체로 함께 제출하는 편이다. “의사 소견서를 제출하면서 의아했어요. 성별 확정 수술을 받았다는 수술확인서가 있는데 국내 병원에서 몸을 보여주며 생식능력이 없음을 다시 확인을 받아야 하거든요. 출입국 증명서도 함께 제출했는데 ‘나는 범죄를 일으키지 않는다’ ‘사회에 해를 끼치지 않는다’는 걸 계속 증명하는 과정 같았어요.”

법원에 성별 정정 신청 서류를 제출하고 난 뒤엔 기약 없는 기다림이 이어졌다. 다행히 2개월여 만에 심문기일이 잡혔다. “판사가 ‘언제부터 여성으로 인식했냐’고 묻더라고요. 문제적인 질문이거든요. 왜냐면 지금 내가 여성이 아니라는 전제가 있는 거니까요. 그래도 그냥 넘기고 답했어요. 판사 심기를 거슬러서 좋을 게 없으니까요.” 심문은 10여분 만에 끝났다.

그리고, 9월2일 오랫동안 원했던 결과를 받았다. 하지만 막상 판결문을 확인하고는 좀 씁쓸했다. 다섯줄짜리 성별 정정 허가 이유엔 생식능력과 수술에 대한 언급이 주를 이뤘다. “그동안 제가 고민하고 혼란스러워했던 시간, 고뇌를 다 적어 냈는데 그런 언급이 없어서 성별 정정엔 수술 여부만 중요했던 건가 싶었어요. 씁쓸했죠.”

예상보다 빠른 성별 정정은 반가웠지만, 복병은 성별 정정 이후였다. 법원으로부터 성별 정정을 허가받더라도 가족관계등록부, 주민등록증, 여권 등은 신청인이 따로 변경 신청을 해야 했다. 주민번호 뒷자리 ‘1’로 가입된 서비스업체에 연락해 주민번호 뒷자리 ‘2’로 바뀐 개인정보 변경도 신청해야 한다. 상당수 업체는 ‘주민번호 1 박○○’과 ‘주민번호 2 박서연’을 같은 인물로 보지 않았다. “개인정보를 변경하는 칸에 주민번호를 바꾸는 칸은 없었고, 업체에 연락했더니 시스템상 명의를 바꿔야 한다고 하더라고요. 둘 다 같은 사람인데 ‘박○○’에서 ‘박서연’으로 명의를 변경하는 게 말이 안 되잖아요.”

알뜰폰 통신사에선 가입 이벤트로 1년여간 매달 받아왔던 50기가 데이터를 ‘명의 변경’ 탓에 더 이상 지급할 수 없다는 답을 듣기도 했다. 시스템 부재로 ‘개인정보 변경’이 아닌 ‘명의 변경’을 하면서, 그 책임도 고객에게 넘긴 셈이었다. “문제제기 했더니, 뭐가 문제냐는 식이더라고요. 온라인 서비스를 가입하거나 이용하려면 통신사 인증이 필수잖아요. 그래서 통신사 개인정보 변경이 가장 시급했던 문제라 싸우고만 있을 순 없더라고요. 업체 말대로 명의 변경하고 매달 받던 데이터도 날렸죠.”

비슷한 일은 다른 온라인 금융사에서도 이어졌다. 개인정보를 변경하는 게 아니라 ‘주민번호 뒷자리 2’ 박서연으로 새로 가입해야 했다. 예를 들어 송금서비스 앱인 ‘토스’에서는 과거 박○○으로 가입해서 토스에 연결했던 금융사의 계좌를 불러올 수 없었다. “새로 은행 계좌를 트지 않는 이상 이전에 사용하던 계좌는 사용을 할 수가 없더라고요. 비슷한 상황에 계신 분께 조언드리자면, 그냥 새로 계좌 만드세요. 제일 속 편합니다.(웃음)”

 주홍글씨로 남는 성별정정 이력

실제 트랜스젠더들은 성별 정정 이후 에디처럼 정보 변경에서 어려움을 겪는다. 공익인권변호사모임 ‘희망을만드는법’ 류민희·박한희·조혜인·한가람 변호사가 트랜스젠더 70명을 설문조사해 낸 2018년 연구보고서 ‘트랜스젠더의 성별정정 절차 개선을 위한 성별정정 경험 조사’에 따르면, 성별 정정 이후 ‘보험, 인터넷, 학교 등 개별 정보를 일일이 변경해야 하는 어려움을 겪었다’고 답한 이가 응답자 33명 중 25명(75.8%)에 이르렀다. 다음으로 ‘공문서에 변경 사실이 드러났다’가 51.5%였다. 서술형 응답에는 ‘고등학교·대학교 선생님·행정실에 성전환 사실을 알리고 수정을 부탁드려야 했다’(사실상의 강제 커밍아웃), ‘주민등록초본과 기본증명서에 남겨진 성별 정정 기록을 지우고 싶다’ 등이 있었다. 특히 트랜스젠더에 대한 부정적 인식이 높은 한국 사회에서 주민등록초본 등에 남는 성별 정정 이력은 ‘주홍글씨’와도 같다. 에디가 말했다. “취업을 준비하는 트랜스젠더 같은 경우엔 기업에서 초본을 요구하면 강제 아우팅이 되잖아요. 부정적인 낙인이 되는 상황에서는 마이너스가 될 수밖에 없죠.”

성별 정정 뒤 2개월간 까다로웠던 정보 변경을 마치고 요즘엔 트랜스젠더 여성의 삶을 다룬 다큐멘터리 촬영과 에세이 집필에 집중하고 있다. “책이 잘 팔리면 좋겠지만 돈을 번다는 생각은 안 하고 있어요. 트랜스젠더 당사자분들이나 경험을 듣고 싶은 앨라이(성소수자 차별에 반대하는 이들)가 되고 싶은 분들이 읽으면 좋겠다 싶어요.”

장수경 기자 flying710@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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