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구려 역사를 찾는 고향, 국내성 [고구려사 명장면]
[고구려사 명장면-161] 고구려 역사를 찾는 고향, 국내성
이번 회를 시작하기 전에 먼저 독자분께 양해의 말씀부터 드리겠다. 본 <고구려사 명장면> 연재를 여러 사정으로 부득이 올해 안으로 마무리하고자 한다. 지난 142회에서 고구려 역사를 다시 되짚어 보기 위해 <고구려 역사현장 명장면을 찾아서>라는 주제로 연재를 이어가겠다는 말씀을 드렸는데, 이를 마무리하지 못해 송구스러울 따름이다.
전에도 말씀드렸듯이 애초 50~60회 정도로 예상했던 연재가 160회까지 이어질 수 있었던 데에는 무엇보다 독자분들의 따뜻한 격려와 질책 덕분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본 연재를 이어갈 수 있도록 귀한 지면을 선뜻 내어주고, 또 6년여 동안 내내 아무말 없이 제 원고를 받아주었던 ‘매일경제 프리미엄’의 무언의 배려에도 큰 감사를 드려야겠다.
이렇게 감사의 말씀으로 시작하니 마치 이번 회로 마무리하는 듯한 인상이지만, 그래도 160회를 넘긴 연재인데 불쑥 고별 인사로 끝내기는 못내 아쉽기도 해서, 앞으로 3~4회 정도 나머지 이야기를 집약해서 말씀드리고자 한다.
앞서 고구려 역사현장을 중심으로 풀어가고자 고구려의 첫 도성인 졸본(지금 중국 요녕성 환인) 현장으로 시작하였다. 다만 그 뒤 연재에서 역사현장 보다는 건국신화 등 초기 전승을 다룬 내용이 다소 많았다. 그런데 졸본 땅에서는 오녀산성[흘승골성] 말고는 딱히 고구려의 건국지이면서 초기 도성을 찾는 감동을 주는 유적지가 마땅치 않다. 주요 역사 현장 등이 환인 저수지 물 속에 잠겨 있기 때문이다. 그나마 상고성자고분군, 하고성자토성 등이 남아 있지만, 고구려인의 자취를 찾기에는 많이 허전하다.
물론 오녀산성 하나만으로도 환인을 찾는 방문객의 마음은 고구려 역사로 가득 찬다. 고구려인들이 건국지로 추앙했던 오녀산성은 멀리서 바라보는 그 경관이 지금도 여전히 신비로우며, 오녀산성에 올라 굽어보는 혼강과 환인 시가지 경관 역시 아득하게 먼 과거로의 상념에 빠져들기에 충분하다. 그래서 환인의 졸본 도성은 오늘날 우리같은 방문자에게도 마치 설화로 남은 현장과도 같은 느낌이다. 사실 초기 역사 자체가 건국 신화부터 여러 설화들이 중첩되어 신화와 설화의 세계가 펼쳐지는 분위기이다. 그래서 굳이 변명하자면 본 연재에서도 여러 전승 등을 두루 다루면서 역사와 설화의 경계를 탐색하는 작업을 했던 것이다.
고구려 역사 현장을 찾는 본격적인 탐방은 두번째 수도 국내도성[중국 길림성 집안시]에서 시작할 요량이었다. 어떻게 보면 국내성에 남아있는 고구려 유적은 오늘 우리에게는 행운과도 같은 존재이다. 왜 행운이라고 했는지는 가보시면 바로 실감할 수 있다.
우리에게도 삼국시대 고대 도성이 여러 곳 남아 있다. 백제의 수도 한성[서울]은 워낙 변형되고 파괴되어 예외로 치더라도, 웅진[공주]과 사비[부여], 그리고 신라의 수도 서라벌[경주]에 가면 저절로 역사 여행을 하는 느낌을 갖게 된다. 특히 천년 수도였던 경주에서 많은 고분과 성곽, 폐사지 등 수많은 역사 현장에 서면 과거로 시간 여행을 하는 기분을 느끼기에 충분하다. 그런데 고구려 국내성은 그 몇 배쯤이나 역사 현장답다는 생각이다. 그만큼 고구려 시대의 유적이 집안 시내 곳곳에 눈을 돌리는 곳마다 발길 가는 곳마다 남아 있다.
이렇게 고구려 시대의 유적이 거의 그대로 남아있게 된 이유는 고구려가 멸망한 이후 이곳 국내성에 한번도 주요 도시가 자리잡지 못했기 때문이다. 단지 중국 세력과 한반도 세력이 접하는 변경지대였고, 그저 최변방의 한가로운 농촌 마을이 있었을 뿐이다. 그러하니 고구려시대의 유적과 그 유적이 보여주는 영화로운 경관이 그대로 남아있을 수 있었다.
이런 고구려 역사와 유적이 흘러 넘치는 국내성이란 역사현장을 이번 한 회에 일별하기도 쉽지 않다. 그래서 독자분들이 중국 집안시 국내성에 갔을 때 둘러보게 될 유적을 중심으로 간략하게 가이드 같은 말씀을 드리고자 한다. 사실 2년여 넘게 팬데믹이 있기도 했고 아직도 여전히 중국 여행은 거의 불가능한 상황이다. 필자도 집안에 다녀온지 5년여 시간이 지났기에, 요새는 다시 집안으로 고구려 역사 여행이 가능해질 날을 손꼽아 기다리고 있을 뿐이다.
아마도 그동안 집안 그곳도 여러 변화가 있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무엇보다 고구려 유적을 둘러보는 탐방객의 발길이 거의 끊어져 있었을 테니, 다시 집안에 가게 되면 고구려 유적 탐방에 대한 허가 내지 관광 안내 등의 방식이 달라졌을 수도 있겠다. 독자분들은 의아하게 여기실 지도 모르지만, 집안시 뿐만 아니라 만주 지역에서 고구려 유적을 허락없이 마음대로 둘러볼 수 있지는 않다. 그나마 집안시는 대표적인 관광지로 개발되어서 형편이 나은 정도이다.
고구려 시대 왕성이 있었던 국내성은 집안시 구 시가지에 위치하고 있기 때문에 다행스럽게 입장료도 없고 허가도 필요없이 마음대로 둘러볼 수 있다. 아침 일찍 산책 겸 국내성을 한바퀴 둘러보시기를 권해드린다.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하는 과정 및 그 이후에 국내성 성벽을 차지하고 있던 민가와 시장을 철거하고 성벽을 복원하여서, 과거 국내성벽의 면모를 실감할 수 있어서 다행스럽다. 필자가 집안 답사를 시작했던 90년대만 해도 아파트 사이에 있던 북쪽 성벽 외 나머지 3개 성벽은 민가와 시장으로 가로 막혀 제대로 볼 수 없었다. 국내성벽은 전체 둘레가 2,7Km 정도이니 제법 규모를 갖추고 있으며, 성문과 옹성, 치, 각루 등 고구려 축성술의 이모저모를 엿볼 수 있어, 가벼운 산책길로 나섰지만 대체로 좀더 진지한 탐방길로 바뀌어 가게 마련이다.
집안시에서 탐방객의 눈길을 모으는 1순위 왕릉은 뭐니뭐니해도 장군총이다. 규모로 따지자면 장군총은 집안의 고구려 고분 중에서 열손가락에 겨우 들어갈 정도이지만, 가장 완벽하게 남아있으며, 그 입지도 높은 구릉 위에 자리잡고 있기 때문에 고분의 크기에 관계없이 장중힌 위용을 갖추어 이미지상으로는 다른 왕릉들을 압도하고 있다. 장군총에 대해서는 굳이 이런저런 말을 덧붙일 필요는 없을 터인데, 혹 집안을 탐방하게 되면 장군총의 현존 상태를 눈여겨 보기 바란다. 오랜 세월을 꿋꿋이 버텨왔는데 근자에는 조금씩 여기저기서 짜맞춘 돌 틈이 벌어지거나 기울어지는 상황이라 안타까운 마음이다.
다음 장군총 앞에서 서남쪽을 바라보면 우선 가장 가까운 거리에 광개토왕비와 태왕릉이 눈에 들어온다. 그리고 그 너머 멀리에 집안 시내가 아스라이 펼쳐진다. 이 경관을 꼭 보시기 바란다. 왜냐하면 장군총은 아직 그 고분 주인공이 누구인지를 놓고 논란이 많다. 가까이에 광개토왕비와 태왕릉이 있으니, 결국 광개토왕의 왕릉이 장군총이냐 아니면 태왕릉이냐 하는 논쟁이다.
90년대만 해도 장군총 위에 올라갈 수 있었다. 그곳에서 집안 시내를 바라보면서 이 장군총 자리가 마치 국내 지역 전체를 보위하는 입지라는 느낌이 절로 들었다. 그렇다면 국내시대 최후의 왕인 광개토왕 왕릉이 아닐까하는 생각으로 이어졌다. 물론 논증이라기 보다는 심증에 가깝다는 점도 숨기지 않겠다. 하지만 이런 면이 역사 현장에서만 깨달을 수 있는 이른바 ‘현장 감각’인데, 필자는 이런 현장성을 중시하는 편이다. 부지런히 만주 지역을 누비고 다닌 이유이다.
장군총 답사 뒤에 광개토왕비와 태왕릉을 함께 둘러보면 고구려 역사 현장에 왔음을 온전히 실감하게 된다. 장군총과 더불어 집안에서 고구려 역사 상징물이라고 할 수 있는 이들 유적에 대해서는 굳이 더 언급할 필요가 없을 게다. 여기서도 하나 더 눈에 담고 가시는게 좋다. 광개토왕비에서 동북쪽을 바라보면 아주 가까이 제법 높은 구릉 위에 거대한 고분 1기가 눈에 들어온다. 이른바 ‘임강총’이다. 이름대로 과거에는 압록강변 가까이 면해 있었던 고분이었다. 고구려 왕릉 중 가장 동쪽 편에 위치하고 있어 동천왕의 무덤으로 보는 데에 이견이 없다. 동천왕 때에는 조위의 장수 관구검이 침공하여 수도 국내성이 함락된 아픈 경험이 있었다. 이른바 밀우와 유유 등이 활약하는 전승이 말해주는 바로 그 전쟁이다.
고구려 왕 이름 중에서 동천왕-중천왕-서천왕-미천왕으로 이어지는 이 4왕은 동쪽으로부터 서쪽으로 집안 분지 일대에 차례로 왕릉을 조영한 왕들이다. 앞서 이야기한 가장 서쪽에 있는 서대총은 미천왕의 무덤으로 추정한다. 그러하니 현 집안 시내에서 동천, 중천, 서천, 미천에 해당되는 물길을 찾으면 대략 이들 네 왕의 왕릉은 비정이 가능하다고 생각했다, 그 뒤 중국에서 세계문화유산 등재를 위해 왕릉급 발굴 조사를 실시하였고, 필자는 그 결과를 토대로 고구려 왕릉을 비정한 바 있다.
집안 답사에서 절대 빼놓아서는 안되는 곳이 환도산성이다. 삼국사기 고구려본기에는 산상왕 때 환도성을 쌓았다고 기록되어 있다. 물론 지금 남아있는 성벽은 그 뒤에 다시 개축한 것이다. 환인의 오녀산성과 그 입지의 특성을 비교하면, 고구려 산성이 갖는 또다른 특징을 파악할 수 있는 좋은 사례이다. 오녀산성이 산정상에 자리한 산정식이라,면 환도산성은 계곡을 끼고 있는 포곡식이다. 환도산성 역시 자연 지형을 최대한 잘 이용한 대표적인 고구려 산성의 좋은 사례이며, 근래에 남쪽 성벽을 대대적으로 발굴조사 복원하여 좀더 실감나게 고구려 성의 분위기를 살펴볼 수 있다.
무엇보다 산성 아래에는 크고 작은 수많은 고구려 시대 고분이 자리하고 있다. 통상 “산성하고분군”이라고 부르는데, 고분 수가 약 1,600기에 이른다. 초기 고분부터 전형적인 계단식 적석무덤, 봉토 석실무덤 등 다양한 고구려시대 고분 형식이 모두 포함되어 있다. 이들 고분 사이로 난 길을 따라 산책하면 고구려 시대로의 시간 여행하는 기분을 맛볼 수 있다.
마지막으로 오회분 5호묘를 소개하겠다. 국내성과 태왕릉 사이에 거대한 봉토무덤 5기가 동서로 나란히 자리잡고 있는데 이를 오회분이라고 부른다. 그 중 4호묘와 5호묘가 사신도 벽화고분인데, 5호묘를 그동안 관광객에게 개방하고 있었다. 고구려 벽화고분에 들어가서 그 벽화 실물을 본다는 것은 주요한 관광 자원임은 분명하다. 그만큼 오회분 5호묘 벽화는 이미 필자가 조사한 시점인 2013년 무렵에 상당한 정도로 훼손되고 있었다. 폐쇄가 시급하였지만, 중국 당국은 보존보다는 관광에 더 중점을 두고있는 상황이었다. 물론 펜데믹 기간과 그 이후의 운영 방식은 아직 파악하고 있지 못하다.
고구려 유적 탐방객들이 집안시에서 만나는 고구려 유적은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하면서 발굴조사 및 정비, 복원이 이루어진 유적이다. 90년대에 이들 유적이 방치되어 민간 주택이나 채마밭 등으로 훼손되어 가던 상황에 비해 참 다행스럽다고 생각되지만, 한편으로는 정비와 복원이 어떻게 이루어져야 고구려 유적으로서 진정성을 갖게 되는가에 대해 많은 생각을 하게 되었다.
여기서 그런 점을 일일이 말씀드릴 수 없지만, 모든 정비와 복원에 임하는 기본 자세는 과거 역사에 대한 진정한 애정이라는 점은 누누이 강조할 수 있다. 집안시에서 이루어진 정비와 복원에서 고구려 역사에 대한 그런 애정이 느껴지지 않는 게 필자 경우만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아마 독자분들도 집안시에 가면 제 말에 공감할 수 있으리라고 믿는다.
그렇다고 현지 중국 당국만을 비난할 수 없음은 바로 우리나라에서도 똑같은 일이 벌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얼마전 2022년 8월에 김해 구산동 고인돌 유적이 세계 최대라는 그 가치에도 불구하고 참담하게 훼손되는 사건이 보도되었다. 일부러 훼손했다기 보다는 사적으로 지정받기 위해 정비하는 과정에서 그런 일이 벌어졌다기에 더욱 어처구니 없었다. 이는 이 유적에 대한 깊은 이해와 애정 보다는 관광지로 개발하기 위한 욕망이 먼저 앞섰기 때문이라고 짐작된다. 사실 보도가 되지 않아서 그렇지, 우리 이땅에서 우리 손에 의해 훼손되는 과거 문화유산이 적지 않다는 점은 새삼 말할 필요조차 없다.
집안시에 가서 고구려 유적이 어떻게 관리되고 보존되고 복원되고 있는지를 보면, 역사와 역사현장에 대한 애정을 갖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태도인지 새삼 깨닫게 된다. 그곳에서 고구려 유적과 역사 현장을 통해 받은 감흥과 감동 만큼, 돌아와서 이 땅의 역사 현장과 문화유산에 대한 애정이 커지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언제든 한번쯤 집안시 고구려 역사 탐방길을 떠나보시기를 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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