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尹 대통령, 2~3년 내 종북 세력 정리하면 역사적 인물될 것” [송의달 LIVE]
①박정희 대통령의 진면목 ②중국 정세 ③윤석열 대통령의 리더십 [코리아 프리즘]
황병태(黃秉泰·87) 전 주중대사는 관계와 학계, 정계, 외교계 등에서 두루 성공한 ‘4모작(耗作) 인생’의 주인공이다. 21세로 서울대 상대 2학년 재학 중이던 1956년 고등고시 7회(외교과)에 합격한 그는 경제개발기에 박정희 대통령의 두터운 신임을 받았다.
그는 29세이던 1964년 초 박 대통령 주재 월간 경제동향회의 브리핑으로 두각을 나타냈다. 이 브리핑은 원래 국장급 몫이었으나 명쾌한 언변과 판단으로 박 대통령을 매료시킨 황병태 경제기획원 공공차관과장이 도맡았다. 그는 국책 외국 차관 도입과 새마을운동, 방위산업 육성 등 주요 고비 때마다 박 대통령의 특명(特命)을 수행했다.
경제기획원 운영차관보로 1974년 공직을 마감한 그는 도미(渡美)유학해 하버드대 행정학 석사를 거쳐 버클리대에서 2년 6개월 만에 정치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귀국후 한국개발연구원(KDI) 연구위원, 한국외대 교수와 총장, 대구한의대 총장을 지냈다. 중간에 제2대 주중(駐中) 한국대사와 13·15대 국회의원으로 활동했다.
◇매일 출근...매주 英·日·中 잡지 읽어
황 전 대사는 경북 예천에서 초등학교 졸업후 대구 농림중, 대구영남고 야간과정을 졸업한 전형적인 ‘흙수저’ 출신이다. 기자가 그에게 맡은 분야마다 발군(拔群)의 성과를 낸 비결을 묻자, 황 전 대사는 “특별한 배경이나 인맥은 전혀 없었다. 반(半) 발짝 앞선다는 마음으로 늘 책을 가까이 하며 공부했을 뿐”이라고 말했다.
기자는 이달 7일 낮 서울 삼성동에 있는 황 전 대사 개인사무실에서 2시간 가까이 그를 인터뷰했다. 그의 책상에는 정기구독하고 있는 영어와 일본어, 중국어 잡지들이 놓여 있었다.
- 요즘 어떻게 지내시는가?
“특별한 일이 없는 한 거의 매일 이곳 사무실로 차를 몰고 나온다. 매주, 매월 빼놓지 않고 영국 이코노미스트(Economist)와 홍콩 아주주간(亞洲週刊), 일본 시사월간지 문예춘추(文藝春秋), 미국 포린어페어즈(Foreign Affairs)를 읽고 있다. 지난해까지는 중국 인민일보도 봤다. 3개 국어로 된 잡지와 책을 읽는 게 나의 자산이고, 행복이다.”
- 중국어도 가능한가?
“<유학(儒學)과 현대화: 韓中日 유학 비교연구>를 주제로 미국 버클리대에서 정치학 박사학위 논문을 쓰면서 중국에 본격 관심을 가졌고 주중 대사 시절에 중국어를 계속 공부했다. 지금도 중국어 독해 등에 문제가 없다. 세계가 어디로 가고, 우리는 어떻게 대응해야 하는지 고민하고 추적하기 위해서다.”
- 역대 주중 한국대사 가운데 가장 돋보였는데.
“1993년 6월부터 1995년 12월까지 2년 반 주중대사로 일했다. 당시 한국의 경제개발에 큰 관심을 가진 중국공산당 고위 관계자 및 정관계 인사와 활발하게 교류했다. 덕분에 나는 마음만 먹으면 장쩌민(江澤民) 국가주석을 만날 수 있었다. 장 주석과는 친필 시문(詩文)을 선물 받을 정도로 가까웠다. 국무원(우리나라의 행정부 격) 장관을 하루에 3명 만난 적도 있다. 특히 덩샤오핑의 장남으로 중국 전국장애인연합회장이던 덩푸팡(鄧朴方)과는 정기적으로 만나 여러 대화를 나눴다.”
◇장쩌민 주석·덩푸팡과 각별한 교류
- 대사직을 마치고 귀임할 때 중국측이 성대한 송별회를 열었다는데.
“장쩌민 주석의 석별(惜別)을 시작으로 중앙정부의 장·차관과 지방정부의 성장 및 시장 등 20명에 가까운 인사들이 나에게 귀국 송별회를 베풀어줬다. 장쩌민은 리바이(李白)의 ‘조발백제성(早發白帝城)’이라는 시(詩)를 1시간 걸려 직접 정자(正字)로 써주며 나를 ‘영원한 대사’라고 불렀다.”
- 요즘 상상하기 힘든 파격 대우가 어떻게 가능했나?
“중국은 박정희 대통령 시절 경제개발 계획의 주역으로 외자(外資) 유치 실무 책임자였던 나에게 각종 노하우와 경험을 얻으려고 여러 가지를 문의하고 만나려 했다. 중국의 덩샤오핑 모델은 1960~70년대 한국 경제개발 기간의 전략 및 방법과 유형이 상당히 비슷했다. 중국이 나를 각별히 대우한 것은 박정희 주도의 한국 경제개발을 배우려 했기 때문이다.”
◇29세 경제기획원 과장으로 대통령 월간 경제 브리핑 도맡아
- 가까이서 체험한 박정희 대통령은 어떤 분이었나?
“덩샤오핑(鄧小平·1904~1997년)이나 싱가포르의 리콴유(李光耀·1923~2015년) 보다 앞서서 경제발전의 흐름과 요체(要諦)를 인식하고 실행했던 지도자였다. 실용과 실질을 중시하면서 한국 경제가 자유시장 체제로 가야 한다는 믿음을 갖고 있었다. 박 대통령의 경제 철학은 ‘검은 고양이든 흰 고양이든, 쥐만 잘 잡으면 되지 않느냐’는 흑묘백묘(黑猫白猫)론 이상이었다.”
그는 2011년 펴낸 자신의 회고록 <박정희 패러다임>에서 이렇게 밝혔다.
“박 대통령은 성격이 차분하면서도 냉정한 편이었지만, 일단 결심이 서면 불같이 달려드는 분이었다. 그에게 있어 경제개발 사업은 관료적 명령 계통이 필요 없었고, 정치적으로 복잡한 계산도 염두에 없었다. 필요한 경우에는 본인이 직접 나섰고, 다른 사람들은 심부름을 하는 데 지나지 않았다. 기업을 직접 일으킨 창업자 출신의 최고경영자나 다름 없었다.”
◇“朴 대통령은 창업자 출신 최고경영자 같았다”
- 직접 겪은 일화가 있다면?
“박 대통령은 1965년 존슨 미국 대통령과의 정상회담에서 합의된 1억6000만달러의 AID(국무부 산하 국제개발처) 차관(借款) 자금 집행이 계속 늦어지자, 그해 10월 나에게 워싱턴 DC로 출장을 전격 지시했다. ‘매일 아침저녁 국무부 청사 현관 앞에 가서 사무실에 출근하는 AID 실무 책임자와 얼굴을 마주쳐 차관 문제를 조속히 해결해 달라’는 것이었다. 나는 100일 넘게 현지에서 그대로 했고 차관 집행을 이듬해 초로 앞당기는 목표를 달성하고 귀국했다.”
황 전 대사는 “박 대통령이 그때 구사한 심리 전술은 개발도상국 경제개발 역사에 빛나는 사례로 기억될 것”이라며 “당시에 ‘외국 차관은 기획원의 황 아무개가 모두 좌지우지한다’는 소문이 퍼졌지만, 나는 박 대통령의 연출대로 하는 배우(俳優)에 불과했다”고 했다.
- 다른 사례가 있다면?
“박 대통령은 여러 사람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우리나라에 경부고속도로 건설 차관을 해 준 세계은행의 레이몬드 굿맨(Raymond Goodman) 아시아지역 담당 국장에게 나선남(羅善男)이라는 한글 이름을 직접 붙여 줬다. 1972년 새마을운동에 대해 미국 정부가 오해하며 시비(是非)를 거는 걸 해결하라는 특별지시를 받고 내가 미국 출장 가서 해결하자, 박 대통령은 정부 예산에서 특별격려금 1억원을 지급하라고 지시했다. 당시 관료사회에선 상상 못할 금액이었다. 박 대통령에겐 기업인 마인드가 넘쳤다.”
◇“격려금 1억원 지급...디테일에 강해 아주 깊이 토론해”
- 방위산업도 박 대통령이 챙겼나?
“조선(造船), 자동차, 주물(鑄物), 총포 등 ‘4대 핵심공장 사업’ 태스크포스가 구성됐지만 막힐 때마다 박 대통령이 나서서 해결했다. 한 예로 경기도 부평에서 가정용 구리제품을 만들던 소규모 회사인 풍산(豊山)의 류찬우(柳纘佑) 회장이 총포 사업 진출을 망설이자, 박 대통령은 그를 청와대로 불러 정부 지원을 약속하고 직접 설득해 총알과 포탄 제조 등을 맡겼다.”
황 전 대사는 이어서 말했다.
“박정희 대통령은 말 한마디도 허투루 하지 않았다. 생각에 생각을 거듭해 말을 하고 지시했다. 디테일(detail·세부 사항)에 매우 강해 대화나 토론할 때 아주 깊이 파고 들었다. 우리나라 현대사에서 개인을 초월해 국가와 민족을 생각하는 우국충정(憂國衷情)에서 박 대통령은 단연 으뜸 가는 분이다. 덩샤오핑이 가장 관심있게 보는 사람이 박정희였다고 등푸팡이 수시로 나에게 귀띔했다. 박 대통령은 실사구시(實事求是)의 현실감을 갖고 세상이 어떻게 흘러가는지를 먼저 파악하고 이끈 지도자였다.”
◇“덩샤오핑의 길과 반대로 가는 中, 걱정스럽다”
- 지난달 제20차 공산당 당 대회를 연 중국은 어떻게 보는가?
“‘패권(覇權)을 추구하지 말고, 미국·일본 등과 잘 지내고, 소련을 조심하라’는 덩샤오핑의 3가지 유언과 당 총서기의 10년 집권 후 퇴임·집단지도체제 같은 개혁·개방 이후 정립된 시스템이 무너지고 역사가 후진하는 게 안타깝다. ‘늑대 외교[戰狼外交]’와 같은 공격적인 외교 공세로 중국은 개방다원화된 국제사회에서 고립되고 있다.”
- 중국이 ‘덩샤오핑의 길’을 가야한다는 말인가?
“나는 덩샤오핑의 세계관과 방향이 지금도 옳다고 믿는다. 덩샤오핑의 길을 가면, 충분한 중국이 더 번영하고 기막힌 나라가 될 것인데 시진핑은 정반대로 가고 있다. 10년 집권 규칙을 깨고, 1인 독재를 하고, 러시아를 가까이 하고 있다. 이러면 국제 사회에서 친구가 없어진다. 중국을 사랑하는 사람으로서 요즘 중국을 보면 마음이 걱정스럽다.”
- 개인적으로 덩샤오핑을 존경하는가?
“한국에선 박정희 대통령, 중국에선 덩샤오핑이다. 이들은 공히 권위주의적 독재 권력을 개선하려했다. 평생 공산당원 생활을 한 덩샤오핑이 개혁·개방으로 중국 전체를 바꾸었다. 그는 세계 역사에서 희귀하게 스스로 권좌에 내려왔다. 시체를 화장(火葬)해 바다에 버리라고 유언해 그의 무덤조차 없다. 덩샤오핑은 88세에 광둥성 선전(深圳), 상하이 등을 돌며 개혁·개방을 다시 독려할 만큼 애국심이 대단했다.”
◇“지금 시스템 고수하면 中 내리막길 가능성”
- 중국의 앞날을 전망한다면?
“중국이 지금 시스템을 고수한다면 내리막길을 걷지 않을까 걱정된다. 심하게 말하면 10년 이상 견딜 수 있을지 회의적이다. 시진핑 3연임 직후 홍콩에 있던 자금이 대거 빠져나간 것부터 위험신호라고 본다. 대만이 자체 국방을 강화하고, 서방국들이 대만 방어를 위해 뭉쳐 중국의 대만 통일도 쉽지 않다. 지금 갈림길에 서 있는 중국은 잘 선택해야 한다.” 그는 이어 말했다.
“전 세계가 요동쳐도 역사의 큰 흐름은 자유와 개방사회이다. 러시아의 패퇴 가능성이 높아지고 NATO(북대서양조약기구)가 뭉치고, 이란·터키 등이 약화하고 있다. 공산국가, 신권(神權)국가, 독재국가 등은 예외 없이 흔들리고 있다. 역사의 궁극적인 방향이 자유시장경제라는 사실을 잊지 말고 참고했으면 한다.”
◇“심지 굳은 尹 대통령, 점점 더 좋은 평가받을 것”
1988년 13대 국회의원(서울 강남 갑)으로 정계에 입문한 황 전 대사는 ‘꾀돌이’로 불렸다. ‘좌(左)병태 우(右)병태’라는 말이 나돌 정도로 김영삼 전 대통령이 총애했다. 기존의 민정당, 공화당, 민주당이 1990년 1월 민주자유당으로 3당(黨) 통합할 당시, 황 전 대사는 민정계의 박철언, 공화계의 김용환 의원과 함께 막후협상을 벌인 주역이었다.
- 요즘 한국 정치를 평가한다면?
“20~30년 전보다 정치인들의 의식과 수준, 실력이 더 나빠졌다. 정치 선진화가 이뤄지지 않는다면 우리나라의 앞날이 심히 걱정된다. 아무리 정치를 욕해도 정치의 역할이 중요한 것은 두말할 나위 없다.”
- 취임 6개월이 된 윤석열 대통령의 리더십은?
“반년 넘게 윤 대통령을 유심히 지켜봤는데, 내 감(感)으로는 시간이 지날수록, 그는 좋은 대통령이 될 것 같다. 세 가지 근거에서다. 윤 대통령은 의외로 사욕(私慾)이 없는 순수한 사람이며, 한 입으로 두 말[一口二言]할 사람이 아니고, 심지(心志)가 굳은 사람이다. 끈기있게, 끈덕지게 일을 처리할 사람이라는 생각이 든다.”
- 어떤 이유에서인가?
“지난달 발생한 서울 용산 이태원 참사 사망자 추모를 위해 윤 대통령은 7일 연속 찾아가 조문했다. 매우 바쁜 일정의 대통령으로선 쉽지 않은 결행이다. 9수(修) 만에 사법시험에 합격해서인지 뚝심이 있다. 윤 대통령은 잔재주가 없고 둔(鈍)한 편이지만, 그 둔함이 도움될 것이다. 그는 무엇보다 옳고그름에 대해 분명한 생각을 갖고 있다.”
◇“잔재주 없고 둔한 尹 대통령...둔함이 도움될 것”
- 윤 대통령은 앞으로 무엇에 주력해야 할까?
“북한의 주체사상을 믿고 북한 정권에 동조하는 주사파(主思派) 종북(從北) 세력 정리가 급하다. 윤 대통령은 이 일을 누구보다 제대로 처리할 사람이다. 잘 하면 2~3년 내 할 수 있을 것으로 본다. 그러면 윤 대통령에 대한 국민들의 평가도 점점 더 좋아져 그는 역사에 남는 대통령이 될 수 있다.”
- 올해 5월초까지 집권한 문재인 정권 5년은 어떤가?
“귀중한 시간을 허비했다고 본다. 문 전 대통령은 북한과 중국, 국내 주사파들 눈치를 보고 그들의 비위에 맞추느라 20세기에 통용되던 대립과 분열의 세계관을 못 벗어났다. 국민들 보기에 이상한 일들을 많이 했고, 너무 좁은 세계관에 갇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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