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남·SKY·명품’ 앞에 좌절하는 중간계층···‘특권 중산층’이 사는 법[책과 삶]
구해근 지음|창비|276쪽|2만원
외환위기 이후 심화된 불평등
부동산 이익으로 부를 증대시키고
막대한 사교육 투자로 지위 세습
상대적 박탈감 휩싸인 다수의 패자
특권적 기회 누리는 소수의 승자
중산층 내부의 ‘또다른 양극화’
지난 17일 대학수학능력시험이 치러졌다. 수험생들은 초등학생 입학 이후 12년 동안 수능을 위해 달려왔다. 전국 수험생과 부모들의 염원이 집중되는 ‘단 하루’다. 사실 입시경쟁은 초등학교 입학 전부터 시작된다. 영어유치원 열풍이 불고, 한국어를 미처 익히기도 전인 5세부터 영어유치원에 보내는 것이 중산층 가정의 새로운 교육 트렌드로 자리 잡았다. 영어교육 시작 시기가 점점 당겨지는 배경엔 날이 갈수록 치열해지는 입시경쟁, 좁아지는 취업문이 있다. 조기교육으로 영어를 먼저 ‘끝내’야만 나중에 수학 등 다른 과목에 집중해 입시경쟁에서 우위를 점할 수 있다는 논리다. 국내 명문대 진학이 여의치 않을 경우 해외 유학과 해외 취업으로 전환도 가능하다. 유아 시기부터 시작되는 고비용의 사교육은 경제력을 갖춘 부모, 사교육 인프라가 갖춰진 지역에서만 가능하다. 그 교집합의 한가운데엔 ‘강남’이 있다.
올해 서울대 전체 신입생 가운데 강남·서초구 출신이 10.4%에 달했다. 2020년 기준 ‘SKY’로 불리는 서울대·고려대·연세대 신입생 절반 이상이 고소득층 자녀인 소득 10분위·9분위에 속했다. 서울, 그중에서도 강남에 사는 학생들이 유명대학에 많이 입학한다. 이들이 취득한 학벌은 고소득을 보장하는 전문직 등 ‘좋은 일자리’를 얻는 데 큰 도움이 된다.
구해근 미국 하와이대학 사회학과 명예교수는 한국에서 신흥 상류층으로 등장한 이들을 ‘특권 중산층’이라 명명하고, 이들이 부를 축적한 기반이 된 공간으로 강남에 주목한다. 부동산 이익으로 부를 증대시키고, 사교육에 엄청난 투자를 해 자식들에게 자신의 지위를 ‘세습’한다는 것이다.
1997년 외환위기 이후 한국 사회에서 경제양극화가 심화하면서 중산층이 붕괴됐다고 이야기한다. 1980년대 후반 인구의 70%에 달하는 사람들이 스스로 중산층이라 여겼지만, 2013년 한국사회학회 조사에선 20%대까지 떨어졌다. 하지만 실제 수치는 다르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기준 중위소득 50~150%에 속하는 사람들을 중산층으로 정의하는데, 1980년대 75%에서 2010년대엔 60%로 하락했다. 실제보다 더 많은 중산층이 자신들이 ‘가난하다’고 느낀다. 2013년 조사에서 OECD 기준 중산층으로 분류되는 응답자 가운데 45%만이 스스로 중산층이라 여겼으며, 55%는 자신이 저소득층이라고 답했다.
저자는 중산층 내부에서 진행되고 있는 양극화에 주목해야 한다고 말한다. 경제적으로 불안하며 사회적으로 하향이동의 위협을 항시적으로 느끼고 있는 일반 중산층과 그와 반대로 외환위기 이후 신자유주의적 경제정책에 잘 적응하면서 부를 축적해 특권적 기회를 많이 누리는 소수 부유층으로 분화되어 중산층 내부에서도 승자와 패자가 갈렸다. 승자가 이 책에서 주목하는 ‘특권 중산층’이다.
경제적 양극화는 전 세계적 현상이다.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로 미국에서 일어난 ‘월가 점령’ 운동 이후 ‘상위 1% 대 하위 99%’라는 구호가 유행했다. 저자는 한국의 소득과 자산 분배 상황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소수 부자들만이 아니라 좀 더 폭넓은 집단, 상위 10% 전후가 경제적 혜택을 가져갔다고 말한다. ‘신상류 중산층’으로 자리 잡은 이들이 가진 특권적 기회에 집중해 ‘특권 중산층’이라 명명하며, 자본가 계급 바로 밑의 고학력자·명문대 출신의 대기업 관리자, 고소득 전문직으로 구성된다고 말한다.
저자는 특권 중산층이 주거지로 삼고 부동산 가격 상승으로 막대한 부를 축적할 수 있었던 공간으로 강남에 주목한다. 강남은 부동산을 통한 자산 증식을 가능케 했으며, 유리한 교육을 받을 수 있는 기회를 제공했다. 저자는 “한국의 강남처럼 부유 중산층이 대규모로 한 지역에 밀집해 살며 동질적인 중산층 도시를 형성하고 있는 것은 세계에서 드문 현상”이라고 말한다.
50년 전만 해도 소가 밭을 갈던 허허벌판의 땅이 어떻게 신흥 부유층의 중심지로 변한 것일까? 박정희 정부의 강남 개발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도로, 지하철, 고속버스 노선 등이 강남을 중심으로 설계됐고, 대법원·검찰청·관세청 등 주요 공공기관이 강남으로 이전했다. 강북에 위치한 일류 고등학교를 강남으로 이전시키면서, 아파트를 대거 건설했다. 중산층이 모여들고 교육열이 가열되면서 강남 집값은 천장을 모르고 솟아오른다. 경제정의실천시민연합 자료를 보면 “1988년 이래 노동자 평균 임금이 약 6배 오른 데 비해 서울 강남권(강남·서초·송파구) 아파트값은 임금 상승치의 43배, 비강남권은 19배 올랐다.” 이제 강남의 집값은 일반 중산층이 진입할 수 없는 수준으로 높아졌다. 강남과 비강남의 경계선은 ‘넘사벽’이 되었다.
신흥 상류 중산층에 주목
계급세습 욕망과 불안의 원인 통해
사회 전반에 미치는 영향 분석
‘강남 부자’들은 부동산 투기로 돈을 번 ‘졸부’에서 한 세대를 지나면서 고급의 전문적·기술적 능력을 가진 ‘글로벌 중간계층’으로 진화했다. 의사, 변호사, 대기업 임원 등 고소득 관리직·전문직 종사자들이 살며 계급적 특권과 문화적 정당성을 일부 소유하게 됐지만 여전히 부동산을 통한 축재 활동을 하고 있다. “강남에 거주하는 부유 중산층은 강남 부동산 가치에 기반한 공통의 이해관계자들이다. 자신이 소유한 부동산의 가치가 계속 보전되거나 더 상승하기를 원하며, 그것을 위협하는 어떤 정책이나 경제변동에도 민감하게 반응한다.” 1996년 총선 이후 강남·서초·송파 등 ‘강남 3구’ 주민들은 일관되게 보수 후보들에게 투표했다. ‘강남 좌파’도 다를 바 없었다.
부동산과 교육은 서로를 견인하며 강남의 가치를 높였다. ‘강남 8학군’은 교육열 높은 부모들을 강남으로 끌어들였다. “교육열 충만한 부모들은 강남으로 이주하며 자식이 아니라 자신의 신분과 계급을 업그레이드했다. … 후세의 계급상승을 위해 노력한 부모들은 현세에서 구원받았으니 이보다 호소력 있는 신화와 종교는 일찍이 없었다.”(조장훈)
1990년대 중반 이후 특수목적고등학교가 등장하고 사교육 시장이 확대되면서 강남은 대치동 학원가를 중심으로 사교육의 메카로 떠오른다. 특권 중산층이 부를 축적한 수단이 부동산이었다면, 이들이 계급적 지위를 자녀들에게 세습하기 위한 수단은 교육이다. 한국의 팽창한 사교육 시장의 배경엔 특권 중산층의 ‘세습 욕망’이 자리하고 있다. 저자는 높은 교육열의 배경으로 ‘계급적 불안’을 지적한다.
부자긴 부자지만, 세습되는 부자라고 할 수 없는 ‘불안정한’ 계급적 위치가 이들의 교육열을 추동했다. 특권 중산층이 획득한 새로운 신분은 재벌과 같은 확고한 세습을 보장하지 않는다. 재벌들은 사업체나 기업을 자녀들에게 물려주면 되지만, 특권 중산층은 자녀들이 입시에서 유리한 위치를 선점, 학벌을 통해 고소득 직업을 얻기를 바란다. 한국 사회에서 학벌은 사회에서 대접받고 성공하는 데 필요한 동문들의 강한 인적 네트워크를 얻는 중요한 문화자본으로 기능한다. 윤석열 정부에서 고위공직자의 70%가 이른바 SKY 출신이라는 것이 이를 방증한다.
2000년대 들어 대학 서열이 더욱 수직화되면서 서울 수도권 10여개 대학이 ‘명문대’ 위치를 차지하고, 지방 주요 공립대는 크게 위축됐다. 지방 사립대는 ‘지잡대’(지방의 잡스러운 대학)로 실추됐다. 학벌주의는 그대로 둔 채 입시제도만 자주 바뀌면서 대치동을 중심으로 한 사교육 시장은 더욱 발달한다. 빠른 정보력으로 입시제도에 맞춤한 교육과 컨설팅을 제공하는 사교육 기관이 강남에 집중되고, 특권 중산층은 사교육을 바탕으로 학벌경쟁에서 우위를 점한다.
한국 사회에서 ‘공정’이 민감한 이슈로 떠오른 배경에도 계급경쟁과 학벌주의가 있다. 청년들의 ‘역린’을 건드리는 공정 이슈는 주로 입시, 취업과 관련한 것이다. 조국 전 법무부 장관의 딸의 ‘스펙 조작’, 한동훈 법무부 장관의 딸이 고등학생으로 국제 학술지 논문에 등재된 것 등은 빙산의 일각일 뿐, 부유 엘리트층이 자식의 스펙을 쌓기 위해 개입을 하는 일이 일상처럼 이뤄지고 있다.
부동산, 교육 외에도 특권 중산층은 다른 계급과 구별짓기 위해 명품 등 과시적 소비를 추구한다. 이들은 밀집되어 살기 때문에 서로 비교하며 경쟁적으로 과시적 소비를 하기도 한다고 말한다.
저자는 “한국의 상류 중산층이 극히 물질주의적, 가족이기주의적, 성공지상주의적”이라고 비판한다. 자녀교육을 극히 경쟁적으로 추구하는 그들의 모습에서 단적으로 나타난다. “이기적이고 기회주의적으로 행동하는 모습을 자주 보여줌으로써 계급적 정당성을 인정받지 못”해 “사회통합적 역할을 하기보다는 사회분열과 사회적 박탈감을 증대시킨다”고 지적한다.
한국의 특권 중산층을 다양한 연구를 인용해 들여다본 흥미로운 책이지만, 아쉬운 부분도 있다. 저자는 대부분 해외에서 머물며 한국을 관찰했으며, 2010년대 중후반 자료가 많아 최근의 상황까지 잘 반영하고 있지 않다. 강남의 기득권이 너무나 공고한 상황에서 어떤 이야기는 기시감을 불러오기도 한다. 저자도 “자료가 낡은 기분이 든다”고 인정한다. 또 특권층의 부와 지위 세습을 전면적으로 비판하기보다는 이들이 외국의 상류층과 같이 문화적·도덕적 정당성을 확보하지 못한 점에 더 초점을 맞춘다.
하지만 외부에서 볼 때 정확히 볼 수 있는 면도 있다. 강남을 중심으로 한 소비문화, 부동산 투자, 사교육 열풍이 전 사회적으로 영향을 끼치는 상황에서, 특권 중산층을 정확히 파악하는 것은 한국 사회의 비틀린 단면을 볼 수 있는 주요한 렌즈가 될 수 있다.
이영경 기자 samemind@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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