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박한 너를 위해 서릿발 속에서 산국이 핀다

한겨레 2022. 11. 19. 06: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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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휴심정] 김용규의 숲과 지혜]

여우숲생명학교 김용규 교장. 여우숲 제공

우주는 리듬이다. 우리 조상들은 거역할 수 없는 그 리듬에 주목했고 자연 현상 속에서 리듬을 살펴 24개의 마디를 찾고 마디마다 이름을 붙여 표시해 두었다. 그리고 그 리듬에 삶을 조아렸다. 숲의 생명들도 그 리듬을 따라 일어서고 춤추고 오므리고 숨었다가 다시 일어서며 제 땅과 하늘을 지켜왔다. 그 리듬 중 비교적 확연한 변곡점이 얼마 전 서리로부터 시작됐다. 서리가 내리는 현상이 시작된다는 절기, 상강(霜降)을 뒤이어 겨울이 일어선다는 입동(立冬)이 제멋대로 숲을 스치고 지나갔다. 해의 길이는 야금야금 짧아지고 있고, 아침 최저기온의 기록 경신도 본격 시작될 것이다. 메말라가는 것들 위로 새벽마다 된서리가 내려앉기 시작한다. 이제 곧 작은 물웅덩이 가장자리로부터 살얼음이 얼 것이다. 천지가 어우러져 빚어내는 이 준엄한 하강의 리듬, 수렴의 리듬을 거스르며 감히 방자할 수 있는 생명은 드물다.

상강과 입동, 저 두 개의 중요한 마디를 지나면 숲에 사는 생명 대부분은 겸손해진다. 저마다의 단풍 색으로 물들었던 나무들은 제 잎사귀와 이별하기 시작한다. 풀 대부분은 누렇게 혹은 잿빛으로 변해 사위고 이제 스러지고 부서지며 흩어질 앞날을 기다리고 있다. 지렁이는 이미 완전히 사라졌다. 이따금 양지바른 자리에서 명상하듯 볕을 쬐던 뱀들도 더는 보이지 않는다. 이제 햇살 좋은 한낮에도 나비를 만나기는 어렵다. 신비로운 그물을 드넓게 쳐놓고 그 위에서 음표처럼 자리를 지키던 거미들마저 보이지 않는다. 사람들도 덩달아 겸손해지고 있다. 여우숲 건물 한 자리에는 다시 난로가 등장했고 그 사람의 오두막에는 저녁마다 구들장을 데울 연기가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지금부터 시골 마을의 저녁은 7시면 오밤중이고, 오가는 사람 없이 적막하다. 적어도 입춘(立春)까지는 그럴 것이다.

여우숲에서 본 전경. 여우숲 제공

이렇게 사위어가는 리듬이 펼쳐지는 시절의 숲에, 하강과 수렴이 지배하는 시절인 이때, 여전히 독보적으로 싱싱한 야생의 꽃이 있다. 숲의 가장자리에서 홀로 여전히 단정함을 잃지 않고 제 자태를 싱싱하게 뽐내며 발걸음을 붙드는 특별한 풀꽃이 있다. 서릿발을 맞으면서도 흐트러짐이 없는, 아니 서릿발 속에서 오히려 더 빛나는 꽃이 있다. 그 꽃은 누군가에게는 ‘돌아와 거울 앞에선 누님 같은’ 꽃이고, 내게는 수승한 구도자의 모습을 떠올리게 하는 노란색의 꽃이다. 국화를 짐작했다면 맞다. 하지만 아니다. 누가 일부러 심지 않는 한 야생의 숲에서 여기저기 작은 무더기를 이루며 그렇게 작게 피어나는 노란색 국화는 없다. 그 풀꽃의 이름은 ‘산국’이다. 화훼용 국화에 익숙한 대개의 사람들은 숲 가장자리 모든 곳이 숨죽이고 쓰러져가는 풀 더미 속에서 ‘나 여기 있소!’ 외치는 듯, 비로소 노랗게 밝은 제 빛을 활짝 펼쳐내는 산국을 지나치면서도 모른다. 그 모양이 너무도 소박해서 일 것이다. 한편 식물 이름에 관심 있는 사람들은 똑같이 피면서도 사는 곳과 크기 등이 달라 이 꽃과 구별되는 또 다른 야생국화인 ‘감국’과 어떻게 다를까, 그 분별에 마음을 쏟기도 한다. 다른 어떤 사람들에게 산국은 꽃차의 재료로도 유명하다. 그러면서도 산국이 왜 서릿발을 맞으며 피어나는 사연을 가졌는지를 아는 사람들은 흔치 않다.

픽사베이

생명은 누구나 사연을 품고 산다. 오늘의 우리는 누군가의 사연을 헤아려보려는 마음을 점점 잃어가고 있다. 그래서 생명의 중요한 특징인 개방과 연결의 본능을 접고, 손쉬운 고립과 단절의 방향을 택하는가? 혹시 그랬다면 그것은 전체 중에서 부분만 경험했기 때문일 것이다. 내 앞에 있는 한 생명이, 또는 한 사물이 일생 걸머지고 왔을 먼 사연과 배경을 헤아리는 마음이 열리면 놀랍게도 그 자신의 삶이 한결 더 풍요로워진다. 나를 지키는 방편으로 선택하고 구축해 온 고립과 단절의 벽에 밝은 창을 내고 그 존재의 사연을 헤아리는 마음이 열리기 시작하면 역설적이게도 점점 더 미워할 수 있는 것이 없게 된다. 마침내 마음이 평화에 이른다.

궁극적으로 내 삶을 더 풍요롭게 하고 나 자신에게 평화를 선물할, 내가 아닌 것들에 접속하기 위해 마음에 밝은 창 하나를 내보자. 그 창을 내는 작업에 생명과 느린 스킨십을 나누는 것만큼 유용한 것도 없다. 먼저 아래 표와 그 설명을 살펴보자.

어떤 마음이 먼저 일어나는지 그 순서에 차이는 있겠으나, 대개의 사람들이 산국을 바라보는 관점은 위의 세 가지 정도로 집약된다. 당신은 지금 늦가을 숲 언저리에서 노란색의 아주 작은 꽃을 마주했는데 그 꽃의 이름을 모르는 상태다. 이름도 모르는 그 꽃에 절로 눈길이 가는 이가 당신이라면 당신은 훌륭하다. 그런 당신은 자신을 자연과 연결하고 교감할 수 있게 하는 마음의 창을 내는 일이 눈길조차 주지 못하고 휙 지나치는 이들보다는 훨씬 수월할 것이다.

누군가의 도움을 받아, 혹은 도감이나 검색을 통해 모르는 꽃의 이름을 알아보는 자세를 가졌다면 그는 더욱 훌륭하다. 그런데 우리가 도감이나 검색 결과를 살피며 알아가는 것은 주로 무엇이던가? 그것은 위의 표에 적어놓은 내용 정도가 전부일 것이다. 대개의 도감은 학명을 포함한 이름과 생김새, 비슷하게 생긴 꽃과의 구별 방법, 꽃 피는 시기와 결실 시기 등을 주로 설명하고 있다. 그리고 용도를 적시한다. 무엇으로 활용 가능하고, 어디에 좋으며 효능은 무엇이고 활용할 때 어떤 점을 주의해야 하는지 등이 적혀 있다. 드물기는 하지만 꽃에 얽힌 인문적 소재를 언급하는 자료도 있다. 예컨대 ‘꽃말과 그 의미, 어떤 전설이나 설화, 역사적 기록이 있는 꽃이더라’ 하는 식이다. 마지막으로 다른 누군가는 그 꽃을 아무렇지도 않게 꺾기도 한다.

여우숲에 핀 산국. 김용규 제공
여우숲에 핀 산국. 김용규 제공
여우숲에 핀 산국. 김용규 제공
여우숲에 핀 산국. 김용규 제공

요컨대 그 모양과 특징을 살펴 이름을 알고, 그 약리적 특성과 효능을 파악해서 나물이나 차 등 임산물이 주는 효용을 챙기고, 혹은 관상용으로 소비하려는 것이 우리의 주된 관점이다. 이러한 관점에는 어떤 근본적인 무의식이 흐르고 있다. 우리가 여태 견지해온 이상의 관점에 공통되게 흐르고 있는 무의식은 무엇일까? 그건 우리가 그 꽃을 그저 대상으로 여길 뿐이라는 점이다. 혹은 내가 그 꽃보다 더 큰 존재라는 관점이다. 나의 어떤 유익을 위해 분별하고, 그러기 위해 용처를 파악하고, 그러기 위해 취급할 때 주의할 사항을 숙지하는 시선이다. 인간 역시 포식자로 진화해 온 동물이므로, 또한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아주 특별한 생명이므로 이 모든 시선들은 자연스럽다고 할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시선이 우리 인간이 가질 수 있는 전부일까?

나는 지금 다른 시선 하나를 제안하려 한다. 그것은 숲을 더 깊게 만날 수 있게 도울 것이다. 삶을 더 풍요롭게 하고, 우리 자신이 겪고 있는 삶의 실존적 문제들에 대하여 그것을 풀어낼 실마리를 제시할 수도 있는 시선이 될 것이다. 또한 그것은 숲과 그 생명들을 소재로 한 시인들에게서 종종 발견되는 시선이기도 한데, 시인도 아닌 내게 어느 순간 우연히 탑재되어 도무지 나를 떠나지 않는 시선이기도 하다.

자 이제 위의 표 맨 아랫줄에 아래와 같은 한 줄의 표를 붙여놓고 생각해 보자.

나의 시선은 산국이 서리가 내릴 즈음 제 꽃을 피운다는 점에 각별히 주목한다. 산국은 상강에서 입동 즈음의 서리를 넉넉히 견딘다. 대부분의 풀들이 우주가 빚는 하강과 수렴의 리듬에 삶을 조아려 감히 그 시절에 꽃피는 사태를 피하는데, 하필 상강 무렵에 피어나는 꽃이라니! 모든 식물을 강제로라도 겸손하게 하는 준엄한 서릿발을 홀연히 견디는 꽃이라니, 아니 오히려 그 서리를 기다리는 꽃이라니! 얼마나 경이롭고 신비한가? 나는 수년 동안 산국의 처지가 되어 그 존재를 살피며 저런 질문을 던졌고, 어느 날 문득 그들이 안고 있는 사연을 알게 되었다.

산국은 주변 식물의 키 크기에 따라 다르지만, 대략 성인 무릎 높이에서 허리 높이 정도로 자라는 여러해살이풀이다. 생태사회학자 김종원 교수가 <한국식물생태보감> 1권에 기록한 것처럼 이 존재는 “도시화되고 산업화된 환경 속에서는 살지 않는다. 신선한 공기와 오염되지 않은 누기(漏氣)가 있는 땅에서만 산다. 산국은 여전히 사람이 살만한 쾌적한 땅이란 것을 알려주는 바로미터가 되는 종이다.” 여우숲이 위치한 중부지방에서는 대략 10월에서 11월 사이, 대개는 상강 이후를 절정으로 삼아 도드라지는 노란색의 꽃을 피운다. 여러 차례 된서리가 반복되면 비로소 꽃을 포함해 줄기와 잎 등 지상부의 생기가 모두 소멸한다. 뒤이어 북풍한설이 몰아치는 자연의 리듬을 타면서 씨앗은 제 길을 떠나고, 내년을 기약하는 새로운 뿌리 잎을 틔워놓은 상태로 한 해 동안 분투하며 이뤄냈던 제 자취의 대부분을 잃어간다.

배조향. 김용규 제공

미당 서정주는 시 <국화옆에서>의 첫 연에서 느닷없이 소쩍새를 소환한다. “한 송이 국화꽃을 피우기 위해 봄부터 소쩍새는 그렇게 울었나 보다.” 그리고 다음 연에서는 여름날의 천둥과 먹구름을 호명한 뒤 “돌아와 거울 앞에 선 내 누님같이 생긴 꽃”이 피려고 서리가 내렸다고 노래한다. 소쩍새들의 노래가 들려오는 계절부터 늦가을 서리를 맞으며 피어나는 산국을 긴 호흡으로 살펴보면 미당이 왜 봄, 여름, 가을, 그리고 서리 내리는 시절을 차례로 이야기했는지를 입체적으로 이해할 수 있다. 소쩍새가 노래하고, 천둥과 먹구름과 폭우가 쏟아지는 때에 누군가 산국의 서식지 근처를 얼쩡거린다 해도 아마 산국의 존재를 좀처럼 알아채기는 어려울 것이다.

산국은 앞다퉈 다른 꽃들이 피어나는 모든 계절을 마치 은둔이라도 하는 양, 저 자신을 드러내지 않기 때문이다. 소쩍새의 날에는 다른 풀들과 경쟁하는 치열한 서식지에서 오직 제 몸을 만들고, 천둥과 먹구름의 날이 지날 때야 좁쌀보다도 작은 꽃망울을 만든다. 밤낮이 서늘해질 즈음에야 비로소 팥보다도 작은 크기의 꽃망울로 키워내지만, 마침내 서리가 내려 주변이 정리될 때까지는 자신의 존재를 드러내지 않기 때문이다. 산국은 서리에도 풀 죽지 않을 꽃이 되기 위하여 그럴 수 있는 에너지를 제 몸에 응축하며 차라리 서리를 기다린다. 드디어 서리가 내릴 시기가 되면 벌들은 다급해진다. 이미 들과 숲에는 수렴과 하강의 우주적 리듬을 감지하고 서둘러 갈무리한 식물들이 대부분이 어서 꿀과 꽃가루를 얻을 꽃이 귀해지기 때문이다. 이때쯤이면 늦게 피어난 ‘물봉선’은 이미 꽃을 지웠고 그 결과로 맺은 열매도 탄력 좋은 스프링처럼 터트려 제 씨앗을 튕겨낸 뒤다. 원추를 절반으로 잘라 반쪽은 버리고 남은 반쪽 원추에만 꽃을 피우는 것 같은 특별한 모양을 한 ‘꽃향유’의 꽃 정도만이 겨우 주변에서 눈에 띌 무렵 드디어 찬 서리가 내린다. 그러면 서리를 맞은 산국 주변의 온갖 풀잎들은 속절없이 시든다. 풀들 난무했던 숲 가장자리는 이제 비로소 산국의 시간이다. 앞서 피었던 풀들이 시들어가는 더미 속에서 오직 서리를 이겨낼 힘을 키우며 봄날부터 여름날, 가을 한복판까지도 침묵해 왔던 산국의 날이 드디어 온 것이다. 이제 애써 부르지 않아도 벌들은 만개한 산국을 찾아와 핥고 빠느라 정신이 없다. 그렇게 겨울 입구의 문턱에서 먹을 것이 절박한 곤충들의 남은 생애를 돕는 것으로 산국은 제 열매를 맺어낸다. 봄부터 늦가을까지 온갖 풍파를 견뎌낸 지난날들은 눈물겹고, 다른 생의 절박한 날들을 돕는 이때의 모습은 숭고하다.

씨앗을 스프링처럼 튕겨낸 뒤 물봉선 열매의 모습. 김용규 제공

아직 한 가지 의문이 더 남아있다. 꽃을 찾는 곤충들이 가장 활발한 때는 당연히 따뜻한 계절인데, 산국은 왜 그 계절에 피지 않고 하필 상강지절의 그 절박한 시간을 겨냥하는 것일까? 나는 그 배경과 사연을 산국의 왜소한 모양새와 그의 서식 환경으로 읽는다. 우선 모양을 보면 산국의 꽃은 통상화(筒狀花)와 설상화(舌狀花)의 구조를 갖춘 모양이다. 조금 어렵게 느껴질 수 있는 용어이므로 대부분 잘 알고 있을 해바라기로 설명해 보자. 해바라기 꽃에서 통통하고 고소한 열매를 한 톨씩 맺는 부분을 통상화(통발 모양의 꽃)라고 하고, 흔히 꽃잎이라고 여기는 가장자리의 노란색 혀 모양 부분을 설상화라고 한다. 산국의 꽃 구조 역시 해바라기 꽃의 축소판이다.

하지만 해바라기와 달리 산국의 꽃 크기는 대단히 작다. 가장자리에 두른 설상화를 합친 최대 크기가 1.5㎝ 정도에 불과하다. 게다가 서식 환경은 경쟁하는 식물들로 넘쳐나는 공간이다. 햇빛도 좋고 어느 정도 양수분도 적당한 숲의 가장자리 부분이기 때문이다. 그런 땅의 무늬(서식환경)에서 수많은 풀들이 높이를 다투는 따뜻한 계절에 왜소한 모양으로 피어날 경우 벌이나 나비에게 자신을 드러내고 선택받는 일이 쉽지 않을 것이다. 그래서 치열했던 주변이 모두 사위는 서릿발 내리는 시기를 견뎌낼 수만 있다면 자신의 왜소함을 넘고 절박한 곤충들을 일으켜 세우는 빛나는 존재가 될 수 있는 것이다. 산국의 선택은 그래서 놀랍다.

코스모스. 김용규 제공

다시 강조하지만 생명 각자에게는 모두 저마다의 사연이 있다. 누군가에게는 몸에 좋은 꽃차 이상이 될 수 없고, 누군가에게는 화병에 꽂고 싶은 심미적 대상 이상이 될 수 없다. 다른 누군가에게는 지적 구분의 대상에 지나지 않는 새끼손톱만큼 작은 저 꽃이 온 생을 바쳐 자신의 숙제를 감당하고 넘어서며 마침내 서릿발 속에서 피어나는 것이다. 어떤가? 관상용으로 꺾고 싶거나, 감기를 예방할 수 있는 꽃차의 재료로만 산국을 보는 시선과 서릿발을 견디며 피어야 하는 사연을 지닌 존재로 보는 시선 중에 우리 내면을 더 풍성하게 할 시선은 어떤 것인가? 단면으로, 혹은 겉을 중심으로 파악하는 일은 빠르고 쉽고 편리하며 익숙하다. 배경과 사연으로, 혹은 속사정을 중심으로 파악하는 일은 느리고 어렵고 번거로우며 낯설다. 하지만 후자의 방식은 도법자연(道法自然)의 맛을 획득하게 한다. 이 방식은 깊은 연결감 속에서 말하기 어려운 신비와 아름다움, 나아가 위로를 얻게 한다. 익숙해지고 더 깊어지면 더 자유로워지는 자신을 만나게 된다. 거기에는 단면 중심으로 타자를 대하는 것으로는 도저히 도달해 볼 수 없는 깊은 맛이 있다.

(풀 한 포기를 그렇게 바라볼 수 있는 시선이 열리면 그것은 다른 식물로, 또 우리 삶의 실존에 관한 다양한 주제로 깊이 있는 시선의 대상을 확대해 볼 수 있다. 이 부분은 다음 연재에 잇기로 한다.)

김용규(여우숲 생명학교 교장, happyforest@empas.com)

*이 시리즈는 대우재단 대우꿈동산과 함께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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