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데이 칼럼] 슬퍼할 권리
슬픔에 빠진 사람을 결코 혼자 두지 않는 것. 그를 얼마든지 울어도 좋은 드넓은 슬픔의 마당에서 기다려 주고 함께하며 안아 주는 것. 골방에서 홀로 눈물짓는 이의 슬픔은 영원히 달랠 수가 없습니다. 진정 함께 아파하는 사람들, 같은 아픔으로 고통받는 사람들의 뜨거운 공감 없이는 치유가 시작되지 못합니다.
“정부에선 전혀 연락이 없고, 어떻게 해 주겠다는 이야기도 없어요. ‘알아서 살아라’하는 식으로 내팽개쳐진 상태입니다.” “같은 곳에서 같이 희생된 가족들과 모여서 같이 슬픔을 나누면서 추모하고, 서로를 위로하면 지금보단 나을 것 같아요. 그럴 공간이 필요해요.”(KBS 인터뷰)
■
「 위패도 영정도 없는 분향소에서
정해진 시간까지만 울도록 규정
슬픔조차 통제하고 감시해서야
이태원 참사 애도할 자유 허하라
」
‘참사는 내 책임이 아니다’라는 생각을 품은 채 겉으로만 애도를 말하는 것은 진정으로 슬퍼하는 사람의 태도가 아닙니다. 정부는 유족들에게 ‘슬픔을 마음껏 이야기할 권리’를 돌려주어야 합니다. 애도의 형식과 프레임을 정부가 독점함으로써 진짜 슬픔의 주체에게서 마음껏 슬퍼할 권리까지 빼앗고 있는 것입니다. 상처받은 사람들의 이야기가 서로 연결되어 더 커다란 이야기의 네트워크가 되는 것을 가로막고 있는 것입니다.
고(故) 이지한 배우의 어머니가 “‘배가 너무 고파 내 입으로 혹시 밥이라도 들어가면 어쩌지’라는 생각에 내 입을 꿰매 버리고 싶은 심정”이라며 괴로워하실 때, 저 또한 화면 속 어머니와 함께 울고 있었습니다. 홀로 울고 있는 당신의 가슴에 켜켜이 쌓인 모든 이야기를 다 들어줄 수 있는 천만 개의 귀가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당신의 모든 아픈 이야기를, 무조건 다 이해해 줄 수 있는 천만 개의 귀가 있다면. “정의의 핵심은 내 가족에게 사랑을 담아 해 주는 일을 다른 가족에게도 인간애를 가지고 똑같이 해 주는 것이다.” 4세기 철학자 락탄티우스의 말이고, 영국 힐스버러 스타디움 참사조사위 보고서에 인용된 문구입니다. 우리는 이 최소한의 정의가 이루어지지 않는 사회의 불의에 대해 분노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의 슬픔까지도 통제와 감시의 대상이 되어야 합니까. 슬픔도 죄가 되나 싶어 눈치를 봐야 합니까. 정부가 정한 시간과 장소에서만 슬퍼하는 것이 진정한 애도입니까. 우리는 유족들이 아픔을 이야기하고, 모두가 들어주고, 함께 울 수 있는 열린 공간을 원합니다. 우리는 슬픔을 제대로 표현할 권리를 되찾고 싶습니다. 우리는 국가가 정해 준 규격화된 슬픔의 언어로 애도하는 것이 아니라, 슬퍼하는 사람들의 마르지 않는 눈물을 닦아 줄 진짜 사람의 얼굴과 손길과 포옹을 원합니다.
슬픔조차 통제하고 감시하지 마십시오. 공감은커녕 연민조차 없는 냉정한 얼굴로 ‘이날까지만 각자의 골방에서 슬퍼하고, 광장으로 나와 슬퍼하는 얼굴을 보이지 말라’는 식으로 명령하지 마십시오.
요즘 저는 저의 직업이고 생계이며 제 모든 것인 글쓰기를 하고 있을 때도 ‘이 문장이 문제가 되지 않을까’ 두려워하며 자신의 생각을 검열합니다. 하지만 비겁해지고 싶지 않습니다. 용감한 사람이 되고 싶고, 좋은 어른이 되고 싶습니다. 이 세상에 대한 사랑과 희망을 잃지 않은 채 글을 쓰며, 슬픔에 빠진 사람들이 언제든지 저에게 기댈 수 있는 어른으로 당당하게 살고 싶습니다. “이태원에서 언니, 오빠들이 왜 죽은 거예요?” “왜 아무도 도와주지 않았어요?” 어린이들이 이렇게 물을 때마다 눈물을 삼키며 ‘다시는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우리가 최선을 다할게’라고 약속하는 어른으로 살고 싶습니다. 제 심장에서 터져 나오는 가장 따스한 언어로 슬픔에 잠긴 당신을 꼭 안아 주고 싶습니다.
우리 손으로 이 세상을 더 나은 곳으로 만들 수 있다는 뜨거운 희망을 되찾아야 합니다. 우리는 두려움 없이 슬픔과 분노를 이야기할 자격이 있습니다.
정여울 작가
Copyright © 중앙SUNDAY.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