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과문화] 어디 한번, 업혀 놀자!
누군가의 신세 좀 지면 어떠랴
그 감사함을 잊지만 않는다면
누군가 내 등에 업힐 날도 올 것
파리에서 후배가 왔다. 근 사년 만의 만남이었다. 내가 살림이 곤궁할 때 큰 도움을 주기도 했던 후배다. 지금은 후배의 살림이 곤궁하다. 믿기지 않게 내 책이 잘 나가 비행기표를 사줄 수 있었다. 곧 돌아가야 하는 후배는 시간에 쫓겨 자정이 넘은 시간에 커다란 트렁크를 들고 나타났다. 제 짐이라곤 갈아입을 후줄근한 트레이닝복 한 벌뿐, 나머지는 죄 내 선물이었다. 내가 좋아하는 위스키 두 병에, 이십만 부 넘으면 터뜨리라는 샴페인 한 병에, 담배 네 보루에, 온갖 화장품에, 프랑스산 값비싼 버터에, 먹어본 적도 없는 트러플에, 짐을 빼는 데도 한참이 걸렸다. 비행기삯을 죄 내 선물값으로 쓴 모양이었다. 몇 푼으로 마음의 짐을 덜려던 꼼수가 되레 두 배가 되어 돌아왔다.
나 없는 사이 후배가 선배에게 일장연설을 했단다. 제발 줄 생각만 하지 말고 남의 도움도 기꺼이 받으라고, 받을 줄도 알아야 한다고, 그것도 능력이라고. 언니가 배시시 웃으며 요새는 잘 받는다고 했단다. 잘 받기는 개뿔, 후배나 선배나 거기서 거기다.
유독 받는 게 어려운 사람들이 있다. 나도 그랬다. 누가 호의를 베풀면 왜 이러지, 나한테 바라는 게 있나, 심지어 의심할 때도 있었다. 순수한 호의라는 걸 알게 되어도 자존심이 상해서 거절하기 일쑤였다. 자존심 강한 성정 탓일 수도 있겠고, 빨치산의 딸로 어렵게 산 후유증일 수도 있겠다. 주기는 좋아하고 받기는 싫어하는 이 마음을 한때는 순수거나 고결이거나, 내심 자랑스럽게 생각한 적도 있었다. 그런데 나이 들어보니 쓸데없는 자존심일 뿐인 것 같다.
이번 소설 ‘아버지의 해방일지’라는 제목은 창비 마케팅팀의 작품이다. 처음 제안을 받았을 때 단칼에 거절했다. ‘나의 해방일지’라는 드라마 제목에서 따온 게 자명했기 때문이다. 제목에는 표절이 없다는 설명도 들었지만 그렇게까지 제목을 정한다는 게 자존심이 상했다. 그런데 밤새 아버지의 해방일지라는 제목이 잊히지 않았다. 다음날 결정을 번복하면서, 소심하고 하찮은 나는 한 마디 변명거리도 잊지 않았다. 제목에 대한 질문이 들어오면 다 창비 마케팅팀에게 떠넘기겠노라고 말이다. 돌이켜 생각하니 낯이 뜨겁다.
제목 하나 정하는 게 얼마나 어려운지 누구보다 잘 안다. 소설 제목도 그럴진대 대중을 상대로 하는 드라마는 오죽하랴. ‘나의 해방일지’라는 제목을 정하기까지 작가와 피디를 포함하여 수많은 사람이 고민에 고민을 거듭했을 것이다. 나는 거기 가볍게 업혀서 큰 도움을 받았다. 연락할 길은 없지만 언젠가 우연히 만나게 된다면 드라마팀의 누구든 크게 한턱 내야 할 것 같다. 연락을 주면 더 좋겠고. 신세를 지면 좀 어떠랴. 감사함만 잊지 않으면 된다. 인간은 어차피 신세를 지지 않고는 생존할 수 없는 존재 아닌가. 걷지도 못하는 아이를 부모가 업어 키워 하나의 인간으로 성장시킨다. 나이 들어도 힘들 때는 누군가의 등에 업혀 위로를 받을 수 있다. 우리는 인간이니까. 어디 한번, 기왕 업힌 김에, 신명 나게 놀아보자. 언젠가는 누군가를 내 등에 업을 날도 있을 테니.
정지아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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