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망한 나라’에서 고민한 ‘강한 국가’의 조건은…‘정의로운 체제’[윤비의 칼과 펜]

기자 2022. 11. 18. 20: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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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 플라톤 ‘국가’의 배경
원 한가운데 왕좌에 철학의 상징이 앉아있다. 그 아래 왼쪽이 철학의 대표자로서 소크라테스, 오른쪽이 플라톤이다. 소크라테스 아래부터 시계방향으로 산수, 기하, 천문, 문법, 수사학, 변증술, 음악 등 학예의 상징이 자리했다. <호르투스 델리키아룸>에 수록된 철학과 7학예의 묘사다. 1180년쯤.

위기는 사상의 시작이다. 위기를 맞지 않는 국가는 없다. 위기는 그 원인과 극복에 대한 이야기들에 불을 붙인다. 위기는 이론과 철학의 시작이다. 소크라테스와 플라톤의 사상 역시 그리스 세계의 쇠퇴와 아테네의 몰락이라는 위기상황을 배경으로 등장하고 발전하였다. 이 사실을 강조하는 이유는 흔히 소크라테스와 플라톤의 철학을 현실과 떨어진 추상적 사변으로 오해하기 때문이다. 소크라테스와 플라톤의 철학이 꽤나 추상적인 것은 사실이다. 그 자체가 추상적이기도 하고 시대와 지적 분위기가 오늘날과 워낙 다르다 보니 더 추상적으로 느껴지기도 한다. 그러나 이들의 생각은 그리스와 아테네의 위기를 이야기하지 않고서는 이해할 수 없다. 그들이 정치와 시민윤리, 국가에 대해 내놓은 생각은 그런 위기를 극복하기 위한 대안이었다.

■펠로폰네소스 전쟁의 종결과 아테네의 위기

27년을 끈 펠로폰네소스 전쟁
결국 스파르타의 승리로 막 내려
패배와 쇠락을 마주한 아테네인들
어떻게 강한 국가 재건할지 고민

기원전 404년 펠로폰네소스 전쟁이 끝났다. 6개월 전 흑해로 들어가는 초입 아이고스포타모이에서 벌어진 해전이 결국 승부를 갈랐다.

27년을 끈 전쟁에서 물결은 여러 번 방향을 바꾸었다. 처음에는 아테네가 스팍테리아 전투(기원전 425년)에서 스파르타군에 큰 타격을 입힘으로써 전세를 우세하게 끌어가는 듯했다. 그러나 아테네가 시칠리아 원정(기원전 415~413년)에서 함대를 모두 잃고, 여지껏 그리스 도시들이 서로 물고 뜯는 것을 지켜보던 페르시아가 스파르타와 동맹을 맺으면서 다시 전세는 스파르타 쪽으로 기우는 듯했다. 그러나 기원전 406년 아르기누사이 해전에서 아테네가 스파르타 해군에 강력한 타격을 가함으로써 전쟁의 승부는 다시금 쉽게 가늠하기 어려워졌다.

아이고스포타모이 전투는 이 긴 전쟁의 종막이었다. 스파르타의 지휘관 리산드로스는 페르시아에서 들어오는 자금을 힘줄 삼아 해군을 재건한 후 에게해와 소아시아의 아테네 동맹들을 하나씩 쓰러뜨렸다. 리산드로스의 마지막 일격은 흑해에서 아테네로 들어오는 식량 공급로를 끊는 것이었다. 굶겨 죽일 셈이었다.

스파르타의 지휘관 리산드로스, 〈Promptuarii Iconum Insigniorum〉에 수록된 그림, 1553년쯤.

아테네로서 리산드로스와의 결전은 불가피했다. 세스토스에 정박한 스파르타 해군을 목표로 3만을 헤아리는 아테네 해군의 주력이 집결했다. 객관적인 전력에서 아테네 해군이 밀리지는 않았다. 다만 아테네 해군이 기지로 삼은 아이고스포타모이의 입지가 좋지 않았고 계략과 전술에서도 스파르타의 지휘관 리산드로스가 나았다. 아테네 해군은 스파르타 해군의 기습에 무너졌다. 전투는 그리 길지 않았다. 27년 긴 전쟁의 승부를 가르는 전투치고는 허탈하게 짧았다. 아테네 해군이 괴멸되고서도 아테네는 반년가량을 더 버텼다. 하지만 이번만큼은 탈출구가 없었다. 스파르타의 주력이 아테네 성벽 아래 진을 쳤다. 결론은 항복이었다. 식량 없이 버티기는 힘들었다. 근 80년 동안 이어진 아테네의 해상제국에 조종이 울렸다.

승자 스파르타는 아테네의 식민도시를 자신의 세력권으로 편입하려 했다. 스파르타가 그리스 전체를 아우르는 대제국을 건설하는 데 걸림돌은 없어 보였다. 다만 동지중해의 최대강국 페르시아가 그것을 원치 않았다. 페르시아는 다시 한번 이이제이의 계책을 동원하여 아테네 해군의 재건을 원조하고 코린토스와 테바이를 비롯한 스파르타의 다른 동맹도시들이 반란을 일으키도록 부추겼다. 기원전 395년 코린토스 전쟁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전쟁이 끝날 무렵 그리스 도시들은 완전히 탈진하였다. 진정한 승자는 페르시아였다. 도박판에서 돈을 버는 것은 도박장 주인이라는 말이 실감나는 순간이다.

전쟁의 패배는 흔히 내전을 부른다. 이 사태에 누군가는 책임을 져야 한다고 사람들은 느낀다. 아테네인들도 그랬다. 승자 스파르타는 아테네에 자신들이 마음대로 주무를 수 있는 정권을 세워두고 싶어 했다. 민주주의가 지나쳐 결국 패배를 불러왔다고 여긴 상류층 일부가 여기에 호응했다. 크리티아스가 이끄는 친스파르타계열의 30인 과두정부가 들어섰다.

과두정부가 처음은 아니었다. 시칠리아 패배 후에도 민주주의를 전복시키고 과두정부가 들어섰던 적이 있다. 당시의 과두정부는 400인 회의로 불리웠는데 겨우 4개월 만에 붕괴되었다. 누군가 아테네에 과두정부를 세우고자 한다면 이 400인 정부의 실패를 철저히 분석할 필요가 있었다. 그러나 새롭게 들어선 30인 과두정부는 그렇지 못했다. 여전히 민주주의에 대한 지지가 시민들 사이에 강한 마당에 지지기반을 넓히기 위해 노력할 필요가 있었다. 게다가 사람들은 분열에 지쳐 있었다. 아테네를 통합으로 이끌 리더십이 필요했다. 30인 정부는 반대로 움직였다. 사람들을 함부로 쳐냈다. 믿을 만하다고 여긴 3000명 정도를 제외하고 참정권을 사실상 박탈하였으며 시민들이 재판에 참여할 권리 역시 크게 제한하였다. 정권에 반감을 품고 있으리라 의심되는 사람들은 제거되고 심지어 죽음을 맞았다. 그 과정에서 부유층조차 적으로 돌렸다. 자신들 내부에서도 분열했다. 그야말로 강권을 앞세운 공포정치였다. 가뜩이나 친스파르타라는 것 때문이라도 예뻐 보이기 어려운 정부였다. 이런 정부가 오래가기를 기대할 수는 없다. 결국 30인 정부는 단 1년 만에 트라시불로스가 이끄는 반란에 부딪혔다. 내전은 스파르타왕 파우사니아스가 중재에 나서서야 끝이 났다. 아테네는 민주정으로 돌아갔다.

■<국가> - 소크라테스와 플라톤

소크라테스·플라톤의 국가관은
정의로운 체제 속 정의로운 시민이
제대로 잘 먹고 잘살 수 있다는 것
정의의 힘에 대한 강한 신념 담겨

소크라테스가 등장하는 플라톤의 대화 <국가>는 이런 시대적 배경에서 이해해야 한다. 여기서 한 가지, <국가>에 담긴 주장이 소크라테스의 생각인지 아니면 플라톤의 생각인지, 혹은 둘 생각의 교차점인지에 대해서 확실하게 결론을 내리기는 어렵다는 점을 밝혀두자. 소크라테스 자신은 어떠한 기록도 남기지 않았다. 우리가 읽는 소크라테스의 대화는 플라톤의 손끝에서 나왔다. 그렇다고 해서 모든 것이 플라톤의 생각이라고 주장하기도 어렵다. 소크라테스와 별 관계없는 이야기를 마치 소크라테스의 이야기인 것처럼 쓰기는 플라톤에게 어려웠을 것이다.

소크라테스는 아테네의 쇠퇴와 몰락을 고통스럽게 지켜보았다. 소크라테스 자신은 시민의 의무를 이해하고 충실하게 따르려 했던 인물이었다. 스파르타군과 맞선 전장에서도 그랬다. 비록 엄청난 무공을 세우지는 못했어도 그렇다고 적 앞에서 방패를 늘어뜨리고 꽁무니를 빼는 인물도 아니었다. 그런 소크라테스로서 아테네를 다시 세우는 일은 중요한 관심사였다.

플라톤 자신도 처음부터 정치에 깊은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펠로폰네소스 전쟁에서 아테네가 무릎을 꿇었던 해에 그는 아직 24세였다. (플라톤은 기원전 428년에 태어난 것으로 추정된다.) 코린토스 전쟁이 발발했을 때 그는 아직 30대 초반이었다. 그사이에 그가 존경하던 소크라테스가 죽었다. 비록 정치가의 꿈은 포기했다 하더라도 정치에 관심을 갖지 않을래야 않을 수가 없었다. 플라톤이 남긴 서간들 가운데 유일하게 진작으로 여겨지는 일곱 번째 편지에 따르면 노년에도 시칠리아에 두 번이나 건너가서 자신의 정치이상을 실현해보기 위해 노력했다.

<국가>의 논의는 꽤나 복잡하지만 목표는 아주 단순하다. 전쟁의 패배와 이어진 쇠락을 마주한 아테네인들은 어떻게 해야 다시 강한 아테네를 건설할 수 있는가를 고민했다. 과두파는 스파르타에서 배우자고 주장했다. 민주파는 다른 모델을 들고나왔다. 백가가 쟁명하는 상황이었다. 플라톤·소크라테스의 눈에는 이런 논쟁들에 뿌리가 없었다. 무엇이 강한 국가이고 무엇이 강한 국가를 만드는가에 대한 근본적인 성찰 없이 눈에 보이는 성공과 실패에만 집착하여 어떤 나라가 잘나가니 우리도 한 번 따라해보자는 식의 제안들이 판을 친다고 그들은 여겼다. (그제는 미국, 어제는 일본, 오늘은 독일, 내일은 소위 잘나가는 어떤 나라를 들먹이며 그 일면만을 부각한 후 이상화하여 ‘이리로 가자!’라고 외치는 것과 별 차이는 없다.) 이렇게 뿌리가 없는 생각, 원리가 아니라 현상에만 머무르는 생각을 그들은 ‘견해’, 그리스 말로 독사(doxa)라고 불렀다.

모든 ‘견해’가 잘못된 것은 아니다. 이 점은 흔히 사람들이 오해하는 부분이다. 이 두 철학자들이 ‘견해’를 ‘잘못된 생각’이라는 의미로 썼다는 증거는 전혀 없다. 소크라테스가 등장하는 플라톤의 다른 저작, 예를 들어 <메논>에는 ‘올바른 견해’라는 표현도 나타난다. 다만 아무리 그럴싸하게 들리고 심지어 지금 당장 좋은 길잡이가 된다고 해도 ‘견해’에는 근본원리에 대한 성찰이 없기 때문에 범용성이 떨어진다. 즉 시간이 흐르거나 장소가 바뀌어 다른 상황을 맞닥뜨리면 한계를 드러내거나 심지어 틀린다는 것이다. 진리에 대한 성찰은 이와 다르다. 진리는 언제 어디서나 유효하다. 똑같이 힘을 갖는다.

<국가>의 주제는 결국은 강한 국가를 만들어 시민들이 잘 먹고 잘살 수 있는 원리에 대한 것이다. 그런 나라를 만드는 핵심요소는 정의로운 시민, 정의로운 체제이다. 소크라테스와 플라톤이 잘 먹고 잘사는 부강국가에 관심이 있다는 이야기는 당장 반대에 부딪힐 것이다. 흔히 우리는 배부른 돼지가 되느니 배고픈 소크라테스가 되겠다고 이야기한다. 그만큼 소크라테스는 세속의 부나 권력 따위에 관심 없는 인물로 그려져왔다. 분명 소크라테스는 그런 인물이었고 플라톤도 크게 달랐을 것으로 보이지는 않는다. 그러나 소크라테스나 플라톤의 사상이 인간의 기본적인 행복을 부정했던 것은 아니다. “정의로운 사람들은 나이가 들었을 때, 제 나라에서 스스로 원한다면 벼슬을 하고, 어디서건 원하는 집안에서 아내를 맞이하고 누구든 자식들이 좋아하는 집안과 결혼을 시킬 수가 있다.”(조우현 역) 너무 세속적으로 들리는가? 그러나 이것은 소크라테스가 <국가>에서 하는 말을 그대로 옮긴 것이다.

소크라테스와 플라톤이 질박함을 정치가나 시민들에게 요구했다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부를 초개처럼 가볍게 여기는 수도사 같은 사람들로 도시를 채울 생각도 없었고 더우기 정신만 부유한 그런 나라를 세우자고 할 생각도 전혀 없었다. 배부른 돼지가 되는 것을 소크라테스나 플라톤이 찬성했다는 것이 아니다. 정확히 말한다면 그들은 정의로운 자가 되어야 제대로 배가 부를 수 있다고 보았다.

여기에는 정의의 힘에 대한 강한 신념이 있다. 이전 연재에서 이미 이야기했듯 정의의 힘에 대한 이런 믿음은 아주 오래된 것이었다. 정의가 부강한 국가를 만든다는 이야기는 오늘날의 독자들도 나름 공감할 것이다. 다만 정의로운 사람이 대개 성공을 거두고 잘살게 된다는 이야기에 대해서는 조금 이야기를 해야 한다. 말도 안 되는 이야기라고 생각할 사람이 적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사실 지난 연재에 언급한 트라시마코스나 글라우콘의 이야기, 즉 정의로운 자는 현실에서는 손해만 보기 일쑤라는 것이 전혀 틀린 이야기는 아니다. 적어도 정의로운 자들이 항상 복을 받는다는 주장은 그때도 지금도 입증이 안 된다. 정의로움에도 불구하고 가난하고 핍박받을 수 있다는 것은 멀리 볼 것 없이 소크라테스 자신의 삶과 죽음이 입증한다. <국가>도 이런 명백한 사실을 뒤에 가서 인정한다. 그래서 정의로운 인간을 신이 못 알아볼 리가 없기 때문에 지금 좀 힘들어도 죽은 뒤에 보상을 받으리라는 주장을 슬쩍 끼워넣는다. 물론 오늘날의 관점에서는 하나 마나 한 변명으로 들리기 십상이다. 그러나 소크라테스나 플라톤은 이런 주장에 꽤 진지했던 것으로 보인다. <국가>의 10권에서 정의로운 인간이 받는 보상과 악한 인간이 받는 징벌에 대해 자세히 이야기하는 것은 그런 이유이다.

물론 소크라테스와 플라톤을 ‘공자 왈’ 하듯 떠받들지만 않는다면 이런 약점은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 고전은 완벽한 진리를 담고 있기에 가치 있는 것이 아니다. <국가>가 그리는 정의와 그 정의가 구현된 국가의 모습은 정치를 둘러싼 인류의 사고의 발자취를 그려본다는 의미만으로도 충분히 살펴볼 가치가 있다. 다음 편의 주제이다.

▶윤비 성균관대학교 정치외교학과 교수



정치이론을 역사 및 문화와 관련지어 연구한다. 베를린 훔볼트대 정치학과 및 역사학과, 서울대 외교학과에서 서양정치사상을 강의하였다. 가르친다는 일을 영광으로 여기며 산다. 2021년 마키아벨리를 주제로 독일에서 단행본을 출간하였다. 2018~2020년 한겨레 신문에 ‘윤비의 이미지에 숨은 정치’를 연재하였고, EBS <지식의 기쁨> <세바시> 등에서 강연하였다.

윤비 성균관대학교 정치외교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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