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년 전 김명순 괴롭힌 남성권력…그때도 지금도 틀렸다
EBS 다큐프라임 ‘여성 백년사―그때도 틀리고, 지금도 틀리다’
지난 11월7일부터 9일까지 <이비에스(EBS) 다큐프라임>에서는 ‘여성 백년사―그때도 틀리고, 지금도 틀리다’ 3부작을 방송했다. 토크와 다큐멘터리와 재연을 곁들인 일명 ‘토크멘터리’ 방식으로, 1부와 2부를 통해 1920년대의 미시사를 성인지적 관점에서 조망하고, 3부를 통해 ‘엔(N)번방 사건’을 추적했던 이들의 후기를 들려주었다.
시작과 함께 1920년대 신문의 만평이 등장한다. 신여성을 허영에 가득 차, 남자 덕에 살겠다는 존재로 그려놓은 만평들에서, 익숙한 ‘여혐’의 내음새가 물씬 풍긴다. 여성 독립운동가의 이름을 묻는 질문에 출연자들은 유관순밖에 답하지 못한다. 근대와 독립을 위해 애쓴 선각자들이 많았지만, 여성들의 이름은 쉽게 지워진다. 그중 가장 악랄한 따돌림을 당한 사람이 김명순이다. 김명순은 1917년 단편소설 <의심의 소녀>로 등단한 작가이자, 에드거 앨런 포의 작품을 국내 최초로 번역하고, 시·희곡·수필 등 170여편의 작품을 남긴 문학가이다. 최초의 근대소설인 이광수의 <무정>이 1917년 작이고, 김동인의 첫 소설 <약한 자의 슬픔>이 1919년 작인 것을 고려하면, 교과서에 이름이 실리지 않은 것이 이상할 정도다. 김명순은 이광수의 극찬을 받으며 등단한다. 그러나 곧 남성 문인들에게 인격살해를 당한다. 1924년 김기진은 인신공격에 가까운 평론을 발표한다. 김명순의 반론은 실리지 못했다. 1925년 김명순은 창작집 <생명의 과실>을 내고, <매일신보> 기자로 활동을 시작한다. 그러나 ‘은파리’라는 필명에 숨은 방정환이 김명순을 저격한다. 아동운동가, 그 방정환 맞다. 김명순이 방정환을 명예훼손으로 고소하여 구속되지만, 당시 문인들이 언론자유를 침해하는 악법이라고 항의하여 일주일 만에 풀려난다. 오히려 김명순은 직장에서 해고당하고, 문단 권력의 미움을 사 이후 김명순의 글을 어느 매체에서도 실어주지 않았다. 1929년 두번째 창작집 <애인의 선물>을 발간한 김명순은 일본으로 떠났다. 그러나 문단의 가해는 멈추지 않았다. 김동인은 귀국한 김명순을 모델로 1939년에 신여성을 비방하는 소설 <김연실전>을 발표했다. 김명순은 입양한 아들과 생활고를 겪으며 살다가 1951년에 정신병원에서 사망한 것으로 전해진다. 김기진, 김동인, 방정환 등 ‘위인’들의 면모가 성인지적 관점으로 보니 추악하기 짝이 없다. 하기야 ‘미투 운동’ 이후 그런 남성을 여럿 꼽게 되지 않았던가.
김명순뿐만이 아니다. 송계월은 1930년 경성여학생 만세 운동을 주도한 뒤, <신여성>의 기자로 스카우트되었다. 그러나 성적 음해에 시달리다 23살에 병사한다. 최영숙은 스웨덴에서 유학을 한 5개 국어에 능통한 학자였으나, 귀국 후 채소 장수를 하다가 생활고와 영양실조로 27살에 사망하였다. 제힘으로 살려고 애쓰는 능력 있는 여성들을 성적으로 모함하여 죄다 죽여놓고, 여자들은 남자에게 기생해서 살려 한다고 비방하는 몹쓸 사회이다.
프로그램이 실패한 여성의 사례만 보여주었다면 맥이 빠졌을 것이다. 프로그램은 조선 최초의 단발 여성 강향란을 조명한다. 권번 출신의 강향란은 기생을 관두고 배화학교 학생이 된다. 1922년 이발소에서 머리를 자른 강향란은 퇴학을 당한 뒤로도 남자 양복에 캡모자를 쓰고 남자 강습소에서 수업을 들었다. 이후 강향란은 사회운동가이자 신문기자이자 영화배우로 활동했다. 당시 염상섭은 단발을 ‘여자로서 본분을 잊은 행동’으로 비난하였다. 아직도 ‘쇼트커트’에 부들거리는 남자들이 많은 지경이니, 당대에는 오죽했으랴. 하지만 이후 단발은 급속히 유행하였다. 1930년대 오엽주는 조선인 최초의 미용사로 엽주 미용실을 개원하여 파마머리를 선보였다. 오엽주는 당시 배우이자 뷰티 칼럼니스트로 이름을 날렸다고 하니, 불과 10여년 만에 확 달라진 시대상이 놀랍다.
하지만 100년이 지나도 변하지 않은 것이 있다. 3부의 엔번방 사건 추적기는 기술과 경제가 천지개벽을 한 지금도 여성을 성적 희생양으로 삼는 남성권력이 얼마나 공고한지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다만 조주빈이 검거된 뒤 사건에 대한 관심이 수그러드는 것이 아니라, 신상공개와 엄벌을 요청하고 사회적 약자를 위한 입법을 위해 수백만명이 힘을 모으는 현상을 통해 변화를 감지할 수 있다. 프로그램은 2122년에는 어떤 사회일지 묻는 것으로 마무리된다. 확실한 것은 오늘 내가 행한 작은 변화가 미래의 여성들을 위한 큰 변화를 이끌 수 있다는 점이다. 김명순과 나는, 나와 이란 여성은, 서로 연결되어 있다. 종으로 횡으로.
대중문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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