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사는 이야기]한국 메디치가 탄생을 기대하며

2022. 11. 18. 17: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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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대 경제대국 이름에 비해
韓기업 문화예술 후원 빈약
기업 기부에 세제 혜택 주는
조세공제 특례법 서둘러야

◆ 세상사는 이야기 ◆

중세 암흑기 유럽에 문예 부흥의 꽃을 피워 르네상스 시대를 연 위대한 가문이 있다. 이탈리아 피렌체의 메디치가는 15세기부터 300여 년간 문학, 예술, 철학, 과학 분야 천재적인 인재를 발굴·후원해 인류 문명사에 황금기를 이룬 금융 가문이다. 메디치 가문의 후원으로 단테의 신곡, 미켈란젤로의 천지창조, 갈릴레이의 지동설, 마키아벨리의 군주론, 라파엘로의 아기예수, 브루넬레스키의 두오모 성당 등 수많은 인류 문화유산이 탄생했다.

메디치가 여인들은 프랑스 왕가와 결혼해 궁중요리와 발레를 유럽 전역으로 퍼뜨리기도 했다. 메디치 가문은 위대한 도서관 비블리오테카, 르네상스 명화의 보고 우피치미술관도 남기고, 신성(神聖)으로부터 인간성을 해방시켜 휴머니즘(인간애)이 싹트게 했다.

르네상스 예술의 전폭적인 후원자인 메디치가 선례를 따라 20세기 후반 기업들은 문화예술계를 적극 후원하는 메세나 운동을 벌이기 시작했다. 기업과 예술의 가교 역할을 하는 메세나협회가 미국, 영국, 프랑스 등 20여 개국에 설립됐다. 당시 김영삼 대통령은 경제계에 예술활동 지원을 당부하고자 1994년 10월 재계, 문화예술계 인사와 함께 한국메세나협회 창립 축하 연주회와 리셉션에 참석할 예정이었다.

축하 연주회 한 달 전, 영부인 손명순 여사는 메세나협회장으로 선출된 최원석 동아그룹 회장, 젊은 첼리스트 장한나와 모친을 청와대 오찬에 초청했다. 이날 오찬에서 최 회장은 메세나 붐 조성을 위해 장한나에게 50만달러 상당 첼로를 흔쾌히 기증하겠다는 의사를 밝혔다. 그런데 불행하게도 축하행사 전날 성수대교가 붕괴돼 사상자가 수십 명 나왔다. 성수대교 시공사가 동아건설로 드러나면서 축하 연주회와 리셉션은 대통령 내외를 비롯한 재계 총수와 정·관계 인사가 대거 불참하는 김빠진 이벤트가 돼 실망이 컸다.

지금도 그날 행사가 성황리에 열려 재계의 공감대를 이끌어냈다면 선진국처럼 한국 메세나운동이 활성화됐을 텐데 하는 아쉬움이 크다. 한국메세나협회는 이건산업, 일신방직, 삼성문화재단 등 200여 회원사를 중심으로 작년에 기업과 예술의 만남, 기업 출연 문화공헌 사업에 160억원을 후원했다. 2021년에 메세나 회원사, 500대 기업 등 국내 기업 716개사가 문화예술 분야에 기부한 비용은 총 1790억원이다. 한국의 경제 규모에 비해 문화예술 분야 후원은 초라하기 짝이 없다.

코로나19 환난 중에 기업의 비재무적 요소인 환경(E), 사회적책임(S), 지배구조(G)를 중시하는 ESG 경영으로 기업의 기부가 대부분 환경과 사회복지 분야에 집중되고 문화예술 분야에는 겨우 5% 미만이 지원돼 문화예술계가 큰 어려움을 겪고 있다. 가난한 공연 무대를 떠나 건설 현장, 배달, 대리운전을 하는 예술인이 늘고 있어 마음이 아프다. 문화의 세기에 국내 기업의 ESG 경영에 문화(C)를 추가해 문화예술 가치를 중시하는 'CESG' 경영 도입을 제안한다. 기업의 문화예술 기부에 획기적인 세제 혜택을 주는 조세공제특례법 제정도 서둘러야 한다.

스웨덴 발렌베리가는 160여 년간 6세대에 걸친 가문 세습 경영을 하면서 국내외 시장에서 연간 2000억달러가 넘는 매출을 올리는 산하 기업의 순이익 전액을 발렌베리재단을 통해 과학·교육·문화 분야에 후원해 국민의 사랑을 받고 있다. 미국 빌 게이츠가는 마이크로소프트 경영으로 얻은 수익 대부분을 빌&멀린다 게이츠재단에 출연해 기금이 700억달러에 달하고 전 세계 빈곤과 질병 퇴치사업에 매년 60억달러 이상을 후원하며 인류애를 실천하고 있다. 21세기 코리아 르네상스를 꽃피우기 위해 메디치가, 발렌베리가, 빌 게이츠가와 같이 문화예술, 과학, 보건 분야를 100년 이상 지속적으로 후원하는 한국 메디치가의 탄생을 기대한다.

[신현웅 웅진재단 이사장·전 문화체육관광부 차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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