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경춘추] '악마쌤'의 역할

2022. 11. 18. 17: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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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매경춘추 ◆

현재 학교 총장의 일을 시작하기 전까지 예술인으로서 나는 다양한 작업을 했었지만, 그래도 나의 중심 활동은 항상 학생들을 가르치는 선생이었다. 운 좋게도 선생으로서 나름의 성공은 거두었지만, 선생으로서 느꼈던 부담감과 책임감은 항상 너무나도 무겁게 다가왔다. 내가 느꼈던 부담감 중 가장 큰 것은 잘못된 방향을 제시하는 시행착오에 대한 것이었다. 예술교육에서의 시행착오는 학생의 기본적인 가치관과 연주의 틀을 망가트릴 수 있는 아주 핵심적인 요소이기 때문에 더 부담이 크다. 학생의 연주가 잘못된 틀에 한 번 적응하게 되면, 돌이킬 수 없는 단단한 콘크리트처럼 굳어지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오징어처럼 흐느적거리는 팔목과 팔을 고치기 위해 노력한 결과는 반대로 돌처럼 딱딱한 움직임이 되고, 지나친 감정에만 의지하는 성향을 자제시키기 위해 과하게 이성적 분석을 요구한 결과는 도리어 무감각한 연주가 되어버린, 인정하기 두렵고 창피한 여러 가지 시행착오를 저지르고 말았다. 학생을 긴 안목으로 바라보는 혜안이 부족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학생의 마음가짐에 따라 같은 말을 하더라도 전혀 다른 결과가 나타나는 경우도 있다. 1980년대 전 세계 바이올린계의 대모 도러시 딜레이 교수는 특강이 끝나고 나면 작은 메모지에 딱 하나의 코멘트를 적어주는 자기만의 교습법이 있었다. 일명 '도러시 메모(Dorothy Memo)'인데, 학생은 이 작은 메모지를 받으면 악기 케이스의 가장 잘 보이는 곳에 보관하고 매일 연습할 때 그 메모지를 바라보곤 했다. 재미있는 사실은, 그 메모에 적힌 내용은 이미 학생의 전공 담당 선생이 이전부터 셀 수 없을 만큼 많이 강조한 내용일 경우가 대부분이었다는 것이다. 그러니 성경책처럼 그 메모를 대하는 학생을 볼 때마다 담당 선생이 어떤 생각이 들었을지는 굳이 이야기하지 않아도 이해가 간다. 그래도 이 선생은 그 감정을 드러내지 않고 묵묵히 가르쳤을 것이다.

나 역시 잊지 못할 비슷한 경험이 많다. 그중 하나는, 내가 오랜 시간 지도했고 지금은 이름만 대면 금방 알 수 있을 정도로 세계적인 피아니스트로 성장한 피아니스트의 인터뷰 내용이다. 인터뷰에서 그는 '한국에서의 레슨은 어떤 틀에 갇혀서 막혀 있다는 느낌이 들었는데, 유학 가서 만난 선생님이 그 틀을 깨고 자유롭게 표현할 수 있게 해주었다'고 말했다. 결국 그는 아직도 그 '틀'이 밑바탕이 되었기에 아무리 자유로운 표현을 해도 탈선하지 않고, 견고한 연주를 할 수 있다는 것을 모르고 있다. 이쯤 되면 '잘하면 내가 잘해서, 못하면 선생 때문에'라는 자조적인 푸념이 어느 정도 실감 나게 다가온다고 하겠다.

선생의 역할에는 분명 여러 가지가 존재하겠으나, 내가 생각하는 선생의 가장 중요한 역할은 장점을 살려주기보다는 단점을 보완해주는 것이고, 눈에 보이는 단기간의 성과에 연연하기보다는 학생에게 필요한 맞춤 장기 계획을 수립하는 것이다. 학생의 장점은 노력해서 얻은 것이 아닌, 대부분 선천적으로 갖고 태어난 것일 경우가 많다. 물론 '인기 있는' 선생이 되기 위해서라면 이 장점을 칭찬하며 기를 살려주면 되겠으나, 이럴 경우 결국 단점은 고쳐지지 않을 것이다. 설사 '악마쌤'이 되더라도 학생이 가진 단점을 반드시 고쳐야 한다는 사명감이 필요하다.

[김대진 한국예술종합학교 총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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