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에 구멍이 뚫려 있어도 감정은 그대로[책과 삶]

임지선 기자 2022. 11. 18. 1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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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매 환자들 증상은 똑같지 않아
질병의 인식·환자와의 소통 중요
의학 지식·임상 상담 자료 바탕
저자의 생생한 경험 담긴 지침서
영화 <더 파더>의 한 장면. 치매 환자가 겪는 인식의 혼란을 그렸다. | 판씨네마 제공

치매의 모든 것

휘프 바위선 지음·장혜경 옮김 | 심심 | 424쪽 | 2만2000원

“기억에 뚫린 검은 구멍이 자꾸만 커졌다. (…) 부엌에 커피를 끓이러 갔다가는 사과 주스와 감자 껍질을 들고 왔다. (…) 정신도 온전치 않아 성냥개비에 불을 붙여 놓고 그걸 보며 말했다. ‘얼음처럼 차갑구나.’ 입을 열 때마다 의도와는 다른 말이 튀어나왔다.”(아들의 눈에 비친 치매 어머니의 모습)

“처음엔 규모를 줄였다. 팬을 동시에 두 개 이상 쓰지 않는 방식으로. 그래도 나 혼자 끓여 먹을 정도는 준비할 수 있었다. 그런데 뚜껑을 덮으면 안에 뭐가 들어 있는지 알 도리가 있나. 결국 음식이 팬에 까맣게 눌어붙는 적은 한두 번이 아니었고 그걸 긁어내는 것을 포기한 후에도 화재 경보음이 울렸다.”(요리를 힘들어하는 초기 치매 여성)

중앙치매센터의 자료를 보면, 지난해 기준 국내 65세 이상 노인 인구 857만명 가운데 추정 치매 환자 수는 88만명이다. 65세 이상 노인 10명 중 1명이 치매 환자인 셈이다. 갑자기 ‘치매’ 진단을 받은 가족이 생기면 현실을 부정하거나 절망하거나 분노로 가득 찰 수도 있다.

‘아는 것이 힘’이라고 했다. 책 제목이 모든 것을 말해준다. 저자 휘프 바위선은 네덜란드 최고의 임상심리학자다. 저자의 외할아버지, 아버지, 어머니, 막내 이모까지 치매를 앓았다. 거의 40년 가까이 치매를 바로 옆에서 지켜봤다. 이 책은 저자의 경험과 의학 지식, 상담 자료를 바탕으로 쓴 치매 종합 안내서다. 치매의 종류와 행동 유형, 증상, 원인, 오해, 치매 환자의 마음, 문제 행동 대처법 등 ‘전혀 다른 사람이 된’ 치매 환자와 소통할 때 필요한 지침서 역할을 한다.

치매 환자라고 다 똑같은 증상을 보이는 것은 아니다. 정신적 능력의 상실은 치매 아니라 다른 질병에서도 나타날 수 있다. 고령의 노인이 이름을 외우지 못하는 것도 흔한 일이다. 섣불리 치매라고 판단할 필요가 없다는 뜻이다.

치매 환자 셋 중 둘은 여성이다. 평균적으로 여성이 남성보다 더 오래 사는데, 치매의 가장 큰 위험 요인이 고령이기 때문에 생기는 일이다. 일각에선 폐경 후 줄어든 에스트로겐이 원인일 수 있다고도 본다. 과학의 발전에 따라 치매에 대한 지식도 조금씩 늘어났다. 저자는 이 책의 초판을 낸 1999년만 해도 “치매는 예방할 수 없다. 한다 해도 별 의미가 없다”고 답했으나, 20년 뒤에는 그보다는 조금 낙관적이 됐다. 매일 운동량을 늘리고 스트레스를 조절하고 좋은 음식을 섭취하는 생활 습관이 퍼지면서 치매의 위험성도 조금은 낮아졌다. “한마디로, 혈관에 좋은 것은 전부 다 뇌에도 좋고, 혈관에 나쁜 것은 (고독, 우울, 당뇨와 마찬가지로) 치매의 위험을 키운다.”

저자가 특히 강조하는 것은 치매 환자에 대한 인식, 환자와의 소통이다. 치매의 여러 증상을 이해할 수 있도록 치매 환자와 가족이 직접 겪은 일과 문학 작품들을 생생하게 인용했다. 다시 출근하고 육아하고 심지어 다시 결혼하려는 환자, 남편을 못 알아보는 환자, 자신이 누구인지 알지 못하는 환자, 평생 인종차별을 비판했으나 증상 발현 이후 ‘깜둥이’를 이유 없이 때린 환자, 아무 데서나 방귀를 뀌고 오줌을 싸는 환자 등이 소개된다.

“치매 환자가 잊는 것도 있지만 잃지 않는 것도 있다”는 인상적인 표현이 나온다. 증상 발현 이전과 매우 달라져 낯설고 대하기 힘들다 해도, 그는 여전히 하나의 인격이다. 치매 환자는 감정을 표현하는 방식이 달라질 뿐, 똑같이 감정을 느낀다는 것이다. 옷을 입히면서 질문을 하는 등 두 가지를 동시에 하지 않기, ‘왜’ 대신 ‘무엇’ ‘누구’ ‘어떻게’로 질문하기, 실수를 바로잡을 때는 최대한 조용히 말하기, ‘절대’처럼 책망하는 말 하지 않기, 환자가 자기 상황을 모를 것이라고 예단하지 않기 등은 중요한 소통 규칙이다. “이 블라우스 새로 샀어요?”라고 묻는 대신 “블라우스 예쁘네요”라고 말하고, “내가 누군지 아세요?”라고 묻는 대신, “아빠 뵈니까 반가워요”라고 말해야 한다는 점을 아는 것은 중요하다.

간병 가족은 치매의 또 다른 희생자다. 한 가정의는 노인 부부가 사는 집을 찾아가면 한눈에 누가 환자인지 알 수 있다고 했다. 혈색이 좋고 원기 도는 사람이 환자, 시들시들한 사람이 부담을 떠안은 배우자다. 불신, 부정, 절망, 슬픔, 죄책감 등 간병 가족이 흔히 느낄 수 있는 감정들을 소개한다. 아울러 이들을 위한 구체적인 조언도 내놓는다. 무자비하고 잔혹한 병 앞에서 최선을 다하지 못했다고 스스로를 책망할 필요는 없다. 아픈 가족을 돌보다 보면 어쩔 수 없이 이성을 잃을 때가 있지만, 자책한다고 상황이 좋아지진 않는다. 간병 방식을 남이 이해해줄 것이라 기대하지 않아야 하지만, 그렇다고 친구 관계를 끊고 고립돼서도 안 된다. 환자와 간병인이 서로의 포로가 되지 않기 위해선, 환자가 할 수 있는 일은 무조건 직접 할 수 있게 두어야 한다.

무엇보다 간병이 때로 행복을 준다는 점도 잊지 말아야 한다. 황혼 녘 치매 아내를 간병한 가수 돌프 브라우어스는 이렇게 말했다. “이제는 아내가 그렇다는 것이 슬프지 않다. 그 처음의 슬픔에서 내가 적어도 아내를 보살필 수 있다는 기쁨이 탄생했으니 말이다. (…) 언젠가 아내가 내 곁을 떠난다면 나의 시간도 끝이 날 것이다. 그럼 나는 한동안 아내와의 추억에 잠길 것이고 아내와 함께 경험한 모든 것에 너무나도 감사할 것이다.”

한지원 서울대 정신건강의학과 교수가 감수를 맡아 치매 예방 방법, 환자 및 가족들이 도움을 받을 수 있는 사이트 등 국내 독자에게 필요한 내용도 보완했다.

임지선 기자 vision@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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