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은 늘 역병에 패할 수밖에 없기에[책과 삶]

김종목 기자 2022. 11. 18. 12: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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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리는 언제나 일시적이다
로버트 자레츠키 지음·윤종은 옮김│휴머니스트│300쪽│1만8000원
니콜라 푸생(1594~1665)의 ‘아스돗의 역병’
고전 해석과 요양 보조 경험을 엮어내
앞선 시대의 작가들에게서 얻는 ‘팬데믹’ 조언
거짓된 인식·절망의 위험성 등 짚어내
속수무책 속 나아갈 길을 함께 모색

“마음의 타락은 우리가 숨 쉬는 공기가 오염으로 변질되는 것보다 훨씬 무서운 역병이다. 후자는 살아 있는 동물이 가진 동물로서의 본성을 오염시키지만, 전자는 인간이 가진 인간성을 오염시킨다.”

로마 황제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121~180) <명상록>의 한 구절이다. 황제는 지금 천연두로 추정하는 ‘안토니누스 역병’의 시기를 거쳐갔다. 역병과 전쟁이 한창이던 때 쓴 책이 <명상록>이다.

인용은 역병에 관한 유일한 대목이다.

미국 휴스턴대학교 역사학과 교수인 저자는 처음 이 대목을 읽을 때 “어떻게 거짓이 역병보다 나쁘다고 믿을 수 있단 말인가”라며 ‘수사적 실수’라고 생각했다. 2020년 코로나19 사태 이후 “흩어진 삶의 조각을 짜 맞추기 위해” 찾은 결과물이 “전염병이 바꾼 현실과 전염병에 대한 개인적·집단적, 정치적·철학적 반응”을 다룬 소설과 에세이다. 그는 이 책을 쓰면서 <명상록>의 이 대목에 대한 자기 생각이 틀렸음을 깨달았다며 스토아 철학을 연결하며 이렇게 썼다.

“마르쿠스는 거짓된 인식이 진짜 역병보다 위험하다고 진심으로, 한결같이 믿었다. 스토아 철학에서는 눈으로 보고 지성으로 판단한 것을 부정하면 세상의 순리에 맞게 행동할 수 없다고 본다. 그렇게 되면 우리는 각자가 해야 할 일을 인식하지 못할 뿐 아니라, 나와 타인을 잇는 특성, 즉 이성의 능력에 기반한 인간성으로부터 멀어진다.”

<명상록>의 거짓과 역병에 관한 대목은 “병원체에 의한 전염병과 이데올로기에 의한 전염병”을 동시에 겪는 지금 시기에도 유효하고 타당하다.

책 부제는 ‘사회적 재난 시대의 고전 읽기’다. 투키디데스(기원전 460~400)와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미셸 드 몽테뉴(1553~1592), 알베르 카뮈(1913~1960)가 쓴 책이 대상이다. 카뮈를 제외하곤 모두 전염병을 겪은 이들이다. 카뮈는 “이데올로기라는 전염병이 삶을 위협하는 현실”과 싸운 이다.

서양사의 틀을 세운 투키디데스는 기원전 430년 아테네를 덮친 전염병에 관한 이야기를 썼다. “동쪽 어딘가에서 발생”한 역병은 유례를 찾을 수 없었다. 무슨 병인지 알 수 없어 어떻게 치료해야 할지도 몰랐다. “갖은 수를 써봐도 무엇 하나 소용이 없었고, 모두가 속수무책이었다.”

역병 와중의 글쓰기에서 투키디데스가 중요하게 생각한 건 ‘기록’이다. “혹여나 역병이 다시 발생하면 연구자들이 알아볼 수 있도록 병의 성질을 요약하고 증상을 설명하고자 한다”며 두통과 갈증, 악취와 고름 같은 증상을 자세히 묘사한다.

아테네인들은 “재산이나 건강 상태, 신분과 관계없이 닥치는 대로 목숨을 앗아가는 역병 앞에서 충격과 절망”에 빠졌다. 절망은 “곧장 사람들의 저항력을 떨어뜨려 질병의 손쉬운 먹잇감”으로 만들며 사망률을 더 높였다. 역병이 아테네 사회 전체에 어떤 영향을 끼쳤는지를 다뤘다. 질병은 규범을 무너뜨렸다. 산 사람들은 “신앙심이 깊건 그렇지 않건 매사에 거리낌”이 없어졌고, “전에는 남몰래 해야 했던 일”을 대놓고 했다. “주인이나 법의 지배가 없는 방종한 상태에서 폭력으로 목숨을 잃을 위험과 끝없는 공포에 시달렸고, 삶은 고독하고 잔인하고 불결하며 짧았다”. 허무도 각인됐다. “죽음이 드리운 그림자 속에서 아테네인은 ‘목숨도 재물도 다 덧없는 것’ ”으로 여겼다.

투키디데스가 묘사한 아테네의 현실은 토머스 홉스(1588~1679)가 말하는 자연상태에 가깝다. 홉스는 투키디데스의 <펠로폰네소스 전쟁사>를 번역한 이이기도 하다. 투키디데스가 묘사한 “간절히 기도하는 사제들과 침묵에 잠긴 신들 간의 괴리”에선 실존주의의 ‘부조리’를 절감하게 된다.

마이클 스위츠(1652~1654)의 ‘아테네 역병’.

몽테뉴가 보르도 시장의 두 번째 임기가 끝날 때인 1585년 6월 가래톳 페스트가 보르도에 들이닥쳤다. 인근 성에 머물던 그는 후임 시장인 마티뇽 영주에게 “떼죽음을 당한다”는 내용의 편지를 받았다. 몽테뉴가 “더없이 지독한 역병”이라 묘사한 페스트는 성까지 도달했다. 에세이집 원고를 비롯해 필요한 물건만 챙겨 노모와 아내, 딸과 함께 마차를 타고 떠났다.

몽테뉴 가족이 겪은 일도 코로나19 발생 직후 ‘적대’를 떠올리게 한다. “몽테뉴 가족은 어디를 가나 잠재적 보균자로서 ‘공포를 퍼뜨렸다’. ‘누구 하나가 손가락 끝이라도 아프다 싶으면 곧장 거처를 떠나야’ 하는 신세”가 됐다.

저자는 자신과 책에 관한 당대의 역사 인물을 교차한다. 몽테뉴의 <수상록>에 관한 장에선 프랑스의 가톨릭교도와 개신교 신자인 위그노가 서로에게 느낀 두려움과 증오, 불신도 서술한다. 당시 “종교적 증오라는 바이러스에 특히 취약”했던 사람들은 잔혹한 폭력의 광기에 휩싸였다. 가톨릭교도들은 임신한 위그노 여성의 배를 갈라 죽였다. 위그노는 가톨릭 농민 수백 명을 학살했다.

저자의 서술은 지금 한국의 진영 논리와 폭력의 언사를 떠올리게 한다. 저자는 “프랑스인의 삶에는 어떤 진영을 선택했든, 어떤 진영을 거부했든 관계없이 끊이지 않는 폭력의 굴레가 씌워졌다”고 말한다. “그들은 자기가 속한 전통적 뉴스 사일로나 가상의 공동체에 갇힌 채, 현실이든 가상이든 다른 사일로와 공동체에 속한 사람들의 인간성을 무시한다”고도 썼다. 사일로는 굴뚝 모양의 곡식 창고로 “외부와 담을 쌓은 채 소통하지 않는 조직이나 집단”을 가리키는 말이다. ‘뉴스 사일로’는 “원하는 정보만을 취사선택하고 생각이 비슷한 사람끼리 뉴스를 공유하는 집단 혹은 그런 현상”을 뜻한다.

고전들은 이어진다. 카뮈는 <페스트>를 쓰며 대니얼 디포의 <로빈슨 크루소>와 <전염병 연대기>를 참조했다. <페스트> 초안에는 필리프 스테판 교수라는 인물이 투키디데스를 두고 “그 자신이 낱낱이 증상을 묘사한 ‘고통을 직접 경험’했다”며 칭송하는 구절이 나온다<페스트>는 페스트균이 수십 년간 가구, 옷가지, 트렁크, 서류에 살아남아 있다가 “언젠가는 인간들에게 불행과 교훈을 가져다주기 위해서 또다시 저 쥐들을 흔들어 깨워가지고 어느 행복한 도시로 그것들을 몰아넣어 거기서 죽게 할 날이 온다”는 내용으로 끝난다. 저자는 “(주인공 베르나르 리외가) 도시는 언제 돌발할지 모르는 병원체와 이데올로기의 위협에서 영원토록 자유로울 수 없다는 사실”을 기억하려 한다고 했다.

이 내용은 “하지만 당신의 승리는 언제나 일시적인 것입니다”라는 리외의 대사와도 이어진다. 페스트에 대한 승리는 일시적일 뿐 인간은 결국 패배할 수밖에 없다는 뜻의 말이다. 예정된 패배와 현존하는 부조리, 세계의 무의미함에도 싸울 수밖에 없다는 뜻도 들었다. 카뮈가 “하늘은 당신들의 끔찍한 승리에도 관심이 없었듯, 당신들의 정당한 패배에도 관심이 없다”면서도 나치즘에 저항하는 행위가 “적어도 당신들이 고독에 빠뜨리려 했던 인간을 고독에서 구하도록 도울 것”(<독일 친구에게 보내는 편지> 중)이라 기대한 것과도 연결된다.

저자는 2020년 코로나19 발생 뒤 친구 제안으로 요양원에 가 자원봉사를 했다. 고전 해석을 씨줄로, 요양 보조 경험을 날줄로 넣었다. 책을 두고 이렇게 말했다. “나는 앞선 시대를 살아간 작가들의 이야기가 팬데믹이라는 현상의 밀도와 그것이 세계와 우리 자신에게 끼친 영향을 헤아리는 데 도움을 주리라 믿는다. 같은 이유로 나는 이들의 글을 길잡이 삼아 나와 타인의 삶이 품은 맥락에 주의를 기울이는 동시에, 요양원에서 경험한 일을 글로 남기고자 했다.”

김종목 기자 jomo@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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