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수첩] 이태원 참사와 반정부 집회
서울 지하철 4호선과 6호선이 교차하는 삼각지역 인근은 집회를 열기에 그다지 좋은 환경이 아니다. 많은 사람이 모이기에는 광화문보다 공간이 좁고, 주변 고층건물 밀도도 낮아서 높은 곳에서 사진을 찍으면 휑해 보인다. 유동인구도 적어 주목도 덜 받는다. ‘세(勢) 과시’를 하기에는 빠지는 면이 있는 곳이다. 그러나 진보성향 단체들은 매주 이곳에서 집회를 연다. 이유는 단 하나, 윤석열 대통령이 집무를 보는 대통령실 청사가 가까이에 있기 때문이다.
민노총과 그 산하단체가 여는 집회·기자회견 장소는 윤 대통령이 취임한 후 용산 대통령실 인근으로 집중됐다. 이틀에 한 번 꼴이다. 노동 관련 행사가 많았지만, ‘군사동맹이 아닌 평화를 선택하고 종속적 한미관계를 바꿔야 한다’ ‘중·러에 대한 대결과 봉쇄를 위한 나토(NATO) 확장을 반대하고, 윤 대통령은 나토 정상회에 참석하면 안 된다’ ‘전쟁위기를 몰고 오는 한미연합전쟁연습에 반대한다’ 등의 주장을 한 행사도 반년 간 12건 있었다. ‘한미연합전쟁연습’은 문재인 정부에서 중단됐다가 부활한 대규모 실기동 한미연합훈련을 가리키는 민노총식 표현이다.
11월 들어서는 집회 개최 목적에 ‘이태원 참사’가 추가됐다. 민노총은 지난 12일 숭례문 인근에서 5만9000명(경찰 집계)이 참가한 전국노동자대회를 연 후 용산 대통령실 청사 인근으로 이동해 이태원 참사와 관련한 촛불집회를 열었다. 양경수 민노총 위원장은 지난 4일 전국노동자대회 계획을 발표하면서 “(이태원 참사 당시) 다 살릴 수 있었다. 그러나 정부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는 주장도 했다.
민노총이 촛불집회를 연 곳 가까이에서는 진보 성향 단체인 ‘촛불승리전환행동(촛불행동)’도 촛불집회를 열었다. 이른바 ‘조국백서’를 집필한 김민웅 전 경희대 교수가 상임대표를, 20대 총선 당시 민주당의 비례위성정당인 더불어시민당 대표를 지낸 우희종 서울대 교수가 공동상임대표를 맡고 있는 단체다.
그런데 촛불행동이 지난 12일 저녁 용산 대통령실 청사 인근에서 연 촛불집회에는 ‘제14차’라는 수식어가 붙었다. 이태원 참사 발생 후 매일 집회를 연 게 아니다. 새 정부 출범 석 달 만인 8월 초부터 추석연휴 한 주를 제외하고 매주 ‘윤 대통령 퇴진’을 주장하는 촛불집회를 연 것이다. 이태원 참사가 비극적이어서 촛불집회를 연 게 아니라, 집회를 여는 이유 중 하나로 이태원 참사를 한 줄 추가했다고 봐야 할 듯싶다.
이 단체의 집회도 이태원 참사가 발생한 원인 중 하나다. 촛불행동이 이태원 참사 당일인 지난달 29일 용산 삼각지역 인근에서 연 집회에는 1만3000명쯤이 참석했다. 경찰은 이 단체 등의 집회 현장에 9개 기동대를 투입했다. 촛불집회를 핼러윈 축제가 열릴 때에만 한 주 쉬었어도 경찰이 이태원 질서 유지에 더 신경을 쓸 수 있었을 것이다.
영국에서는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이 서거하자 잉글랜드 프리미어리그가 경기를 일시 중단했다. 여왕을 추모하는 뜻도 있었지만, 전국의 경찰들이 대거 런던에 배치돼 각지에서 열리는 축구경기 안전을 위해 배치할 경력(警力)이 부족했던 것도 한 이유다. 그러나 촛불행동은 이 점에 대해서는 아무 말을 않는다.
이태원 참사는 슬픈 일이다. 국민들은 지금도 애도하고 있다. 지하철 6호선 이태원역 1번 출구로 나가는 계단을 올라서는 순간 벽면을 채운 포스트잇에 적힌 글귀로 확인할 수 있다. 대부분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부디 편히 숨쉬기를’ 등 애도하는 글귀가 포스트잇에 적혀 있다. 그러나 가끔 윤 대통령의 얼굴 사진에 욕설이나 ‘친일 매국노’를 적은, 누군가 미리 제작한 스티커도 붙어 있다.
그래서 묻는다. 이태원 참사를 슬퍼한다며 노조 집회를 촛불집회로 바꾸고, ‘제14차’ 집회를 연 사람들, 애도 포스트잇 옆에 욕설이 써 있는 스티커를 붙인 사람들은 정말 이번 참사가 슬픈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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