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이접기는 예술이면서 과학… 세계에 K - 컬처로 꽃 피울 것”

박현수 기자 2022. 11. 18. 09: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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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5일 서울 중구 장충동 종이나라빌딩 3층에서 만난 노영혜 종이문화재단·세계종이접기연합 이사장이 유닛 종이접기로 구성한 작품을 배경으로 포즈를 취했다. 그는 “올해 ‘세계종이접기창작작품 공모전’ 대상과 금상 수상자가 중·고교생으로 수상자 연령대가 갈수록 낮아져 고무적”이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종이접기는 어린이들의 두뇌개발과 창의력 향상에도 큰 도움이 된다”고 강조했다. 김호웅 기자
루마니아 등 25개 개발도상국 외교관 25명이 K-종이접기 강좌에 참여한 후 고깔을 쓰고 기념사진을 찍고 있다. 앞줄 왼쪽에서 다섯 번째가 노영혜 이사장이다. 종이문화재단 제공
노영혜 종이문화재단·세계종이접기연합 이사장이 종이접기로 구성한 크리스마스트리와 눈사람 작품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그는 “종이접기 세계화를 통해 국가브랜드를 상승시키고, 한국의 우수한 문화와 역사를 지구 곳곳에 알리는 데 앞장서겠다“고 말했다. 김호웅 기자

■ M 인터뷰 - 노영혜 종이문화재단 이사장

연날리기 · 제기차기 · 딱지치기…

민속 놀이문화도 종이와 밀접

“질 좋은 색종이로 교육했으면”

50년전 창업하고 신제품 개발

‘국가 브랜드화’ 위해 고군분투

11월11일 ‘종이문화의 날’ 로

세계인 ‘8000만개 접기’ 동참

DMZ에 ‘대형 고깔 탑’ 계획도

종이는 인류 문명 발전에 큰 공헌을 했다. 돌이나 대나무, 비단, 동물의 뼈 등에 기록을 남겨오던 인간에게 종이 발명은 혁명적인 일대 사건이었다. 문명 확산의 주요 매개체였고, 인류 발전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일반적으로 종이는 서기 105년 중국 후한 시대에 발명된 것으로 알려졌지만, 종이문화를 세계로 전파하고 생활 깊숙이 정착시킨 것은 바로 우리 한민족이다. 일상생활에서 문과 벽, 천장 등에 종이를 사용한 나라는 있어도 방바닥에까지 종이를 써온 민족은 우리밖에 없다. 종이를 접고, 오리고, 꼬아 생활 속에서 밀접하게 이용해 왔다. 문필과 화필용, 생활용품뿐만 아니라 종이배, 종이비행기, 연날리기, 제기차기, 딱지치기 등 놀이문화에 이르기까지 영향이 미치지 않은 곳이 없다. 생활 속에서 종이와 함께해온 우리나라는 종이 문화 종주국인 셈이다.

지난 15일 서울 중구 장충동 종이나라빌딩 3층에서 만난 노영혜(73) 종이문화재단·세계종이접기연합 이사장은 ‘종이문화의 날’ 행사 진행으로 분주했다. 지난 2010년부터 매년 11월 11일을 ‘종이문화의 날’로 정해 ‘고깔축제, K-종이접기·종이문화 컨벤션’을 열고 있다. 그의 가슴에 태극기와 함께 흰 깃발이 나란히 붙어 있는 배지가 눈에 띄었다.

“종이문화재단 심벌마크는 종이와 평화를 상징하는 흰 깃발입니다. 재단 슬로건이 ‘종이문화로 세계화를! 종이접기로 평화를!’이지요. 평화를 사랑하는 백의민족이라는 뜻도 담겨 있습니다.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평화를 찾은 날이 1918년 11월 11일이기에 종이문화재단 심벌마크와 슬로건의 뜻을 담아 ‘종이문화의 날’로 정했어요.”

이 축제는 올해 12회째로 지난 13일 시작해 오는 21일까지 열린다. ‘창의 인성 개발을 위한 융합 창조 교육’을 주제로 열리는 컨벤션에는 24개국 55개 도시와 국내 147개 지역에 있는 지부 및 교육원 관계자와 종이접기·종이문화 애호가들이 참여하고 있다. 지난 13일 재단에 마련된 스튜디오에서 진행된 개회식은 ‘종이접기 아저씨’로 불리는 김영만 재단 평생교육원장의 개회사, K-종이접기 세계화 선언문 낭독 등으로 진행됐다. 선언문에는 ‘종이접기와 종이문화의 세계화를 통해 국가 브랜드화에 앞장서고, 우리나라의 우수한 문화와 역사를 지구 곳곳에 알린다’는 내용이 들어있다.

“‘고깔’은 고 이어령 문화부 장관님 생전의 아이디어였어요. 책상 위에 놓인 여러 신문 가운데 종이 ‘문화’니까 문화일보를 집으며 고깔을 만들어 보라고 하셨어요. 그런데 정말 공교롭게 만들고 보니까 제호가 고깔 앞면에 접혔어요. 기막힌 우연이죠? 하하하. 그때 찍은 사진이 어디에 있을 거예요. 고깔은 겸손하게 받들며 기도하는 모습이고, 천지인(天地人)을 상징하는 삼신 모자로 종이접기의 모태이며 한국 문화의 원형이에요. 널리 인간세계를 이롭게 한다는 홍익인간의 이념이 담겨 있어요. 종이는 지혜와 평화의 상징이고, 종이접기는 수학, 과학, 예술입니다.”

특히 ‘고깔 8000만 개 접기 운동’이 눈길을 끌었다. 한반도 평화통일과 세계평화를 기원한다는 취지로 세계 각지에서 모인 고깔 합지식 영상이 상영됐다. 16개국 외교관을 비롯해 미국 워싱턴의 평화통일 기원 축제에 참여한 한인과 현지인들, K-종이접기 급수 교실 어린이들이 출연했다. ‘8000만’은 남한(5000만)과 북한(2500만) 인구, 그리고 해외 한민족(700만)을 합한 수다. 고깔에 한민족이 하나가 되는 간절한 마음을 담아내겠다는 것이다. 현재 60만 개가 모였다. “내 생애에 이루지 못하면 대를 이어서라도 모으겠다”는 각오도 밝혔다. 이와 함께 비무장지대(DMZ)에 대형 ‘고깔 모형 종이 탑’을 세우겠다는 계획도 비쳤다.

그가 이처럼 종이접기를 비롯해 종이와 인연을 맺게 된 배경이 궁금했다. 노 이사장은 지난 1972년 현재 종이나라㈜ 전신인 한국색채조형미술사를 부군인 현재 종이나라(주) 정도헌 회장과 공동으로 창업했다. 25세 때 서울 동대문구 답십리 8평 옥탑방에서다. “지금과 달리 수작업으로 종이에다 물감을 칠해 말려서 색종이를 만들던 시절이었어요. 작업대 겸 침대에서 새우잠을 자다 바닥으로 떨어져 물감통에 빠지기도 했어요.” 웃으면서 회고했지만, 그의 눈물겨운 과거사가 읽혔다. 이 부분은 기사화하지 말아 달라고 부탁을 하기도 했다.

“당시만 해도 미술 시간에 노끈으로 묶인 채 유통돼 먼지 묻고 색상이 선명하지 않은 종이가 교육재료로 사용되고 있었어요. 우리 학생들이 선명하고 정확한 색상의 고운 색종이로 교육을 받는다면 어려서부터 꿈이 잘 개발돼 아름다운 세상을 만들 수 있겠다고 생각했죠. 처음 생산해 낸 색종이 이름이 ‘해바라기 색종이’였어요. 그래서 만든 기업 슬로건도 ‘아름다운 세상 함께 만드는 종이나라’였고요.”

그러나 먹고살기가 어려웠던 당시 시장의 반응은 기대했던 것보다 좋지 않았다. 그 무렵 ‘오일쇼크’가 찾아왔다. 원자재 가격 급등과 수급 불균형을 예상하고 전 재산으로 종이 재고를 확보했다. 그 덕분에 오일쇼크에도 불구하고 안정적으로 제품을 공급하자 해바라기 색종이는 전국적으로 팔려나갔다. 그 후 수작업만으로는 수요를 따라가기 어려워 국내 최초로 개발한 색종이 생산 자동화 시스템을 도입했다. 이때부터 학생들은 처음으로 고급 색종이를 경험했고 해바라기 색종이는 최고의 제품으로 인정받으며 업계를 선도했다.

회사가 성장하자 1987년 노 이사장은 기업의 사회적 책임과 문화예술 지원사업을 위해 긴 역사를 가지고 있으나 오랫동안 잊혔던 종이접기를 중심으로 종이문화의 꽃을 다시 피워내기로 결심했다. 종이접기와의 인연이 본격적으로 시작된 것이다. 국비 장학생으로 일본 히도츠바시(一橋) 대학에 유학 중인 여동생의 권유로 일본에서 열린 종이접기 작품 전시회 참관도 배경으로 작용했다.

“일본 동경 백화점에서 열린 ‘세계 오리가미(折紙·종이접기 일본어 명칭) 작품전시회’와 ‘종이접기 체험교실’에서 선명하고 고운 색종이로 부모와 아이가 함께 즐겁고 행복해하는 모습은 놀랍고 충격적이었어요. 그래서 귀국 후 1987년부터 우리나라 종이의 역사와 문화를 조사하고 연구하면서 자긍심과 사명감이 생겼지요.”

이후 노 이사장은 한국종이접기와 종이문화 부활 재창조운동을 체계적으로 벌이기 위해 오재경 전 문화공보부 장관을 초대회장으로, 교육학 박사인 김재은 이화여대 교수, KBS 유치원 프로 ‘하나둘셋’에 출연해 종이접기로 유명한 김영만 등 각계각층 전문인들이 참여한 가운데 1989년 사단법인 ‘한국종이접기협회’를 설립했다.

그러나 종이접기와 종이문화를 살리기에는 역부족이었다. 그래서 ‘도서출판 종이나라’를 설립해 종이접기 책을 출판하기 시작했다. 또 K-종이접기를 전파하고 가르칠 전문 강사들을 육성하기 위해 한국에서 처음으로 종이접기 기본형 등을 체계적으로 정립해 종이접기 강사 자격과정을 개설했으며 어린이들을 위한 종이접기 급수 과정도 만들었다.

이 같은 그의 노력으로 종이접기 문화는 서서히 퍼져나가다가 국제통화기금(IMF) 시절 종이접기 붐이 일어났다. 가장들이 실직하자 주부들이 종이접기 강사로 취업 전선에 뛰어들어 그 수가 1만여 명이나 된 것이다. 노 이사장은 여성 취업률 증대에 기여한 공로로 여성가족부 장관 표창을 받기도 했다. 그동안 배출된 종이접기 강사만도 국내외 30만 명에 이른다.

1998년 종이나라박물관도 문을 열었다. 인터뷰를 마치고 2층에 마련된 종이박물관을 노 이사장의 설명을 들으며 둘러보았다. 다양한 장르의 종이문화예술작품들이 전시되어 있었다. 종이로 만든 공예 작품은 ‘정말 이게 종이로 만들어진 것인가’ 의심이 갈 정도로 정교함이 뛰어났다.

하지만 노 이사장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지금도 국내외에서 종이접기 대신 일본 용어인 ‘오리가미’를 사용하는 이들이 적지 않은 실정이다. 이번 종이문화의 날 행사 참석을 위해 일시 방한한 ‘찾아야 할 동해, 지켜야 할 독도’ 저자 홍일송 문화유산국민신탁 미주본부장(종이문화재단 자문위원)은 축하 인사말을 통해 “아직도 국내에서조차 일본식 종이접기 용어와 표기를 사용하는 분들이 있어서 안타까움을 금할 수 없다”며 “일본식 종이접기 용어는 더 이상 사용하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강조했다. 우수한 한지와 유구한 종이접기 역사·문화가 세계화하고 있는데 우리 국민부터 종이접기라고 당당하게 말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미국에서 동포들과 함께 ‘가라데’를 극복한 태권도처럼 K-종이접기 세계화 운동을 적극적으로 펼쳐 나가겠다”고 힘주어 말했다.

불광불급(不狂不及)이라 했다. 한 분야에서 일가(一家)를 이루기 위해 미치려면(及) 미쳐야(狂) 한다는 말이다. 그런 점에서 노 이사장은 ‘종이’에 미친(及) 인물이다.

박현수 기자 phs2000@munhw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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