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춘추칼럼] 일상의 붕괴
"한낮에 아이에게서 전화가 온거예요. 점심시간이길래, 뭘 놓고 갔나 했어요."
우리는 함께 커피를 마시며 그녀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우리에겐 이런 종류의 일화들이 아주 많았는데, 아무리 들어도 새로이 귀를 기울이게 하는 힘이 있었다.
"그런데 엄마, 하더니 우는 거예요. 난 너무 놀랐어요. 왜? 왜? 무슨 일이야? 하고 물으면서, 혹시 피싱인가 하고 의심했어요. 그런데, 아무리 들어도 어설픈 구석이 없는 거예요. 말투도 그렇고, 분명히 oo이 목소리였어요."
결국 그것은 흔하다면 흔한 피싱 이야기였다. 그녀는 놀랐지만 끝까지 주의력을 잃지 않았고, 아이가 학교에 안전하게 있음을 확인하는 것으로 좋은 마무리에 도달했다. 하지만 이 이야기에는 이전과 다른 한가지 디테일이 더해져 우리를 좀 더 무섭게 했다. 듣는 이가 이미 피싱을 짐작하고 유심히 듣는데도 도무지 의심할 수 없이 똑같았던 '아이의 말투와 목소리'였다.
이전에도 이와 비슷한 버전의 많은 '철렁한 보이스피싱 이야기'들을 들어왔지만, 듣는 사람이 너무 놀라서 지레 정신줄을 놓지만 않는다면 충분히 이것이 사기임을 짐작 가능한 힌트들이 있었다. 협박하는 사람이 특정 지역의 말투를 쓰거나 주변 잡음이 몹시 심할 때가 많았고, 무엇보다도, 목소리가 숨길 수 없이 달랐다. 울거나 비명을 지르는 식으로 듣는 사람을 놀래켜서 목소리가 다르다는 것을 숨기려 애쓰는 것이 보통이었다. 하지만 이번 경우에는 힌트를 찾을 수 없었다. 아이가 울음이 섞이기는 했어도 또박또박 말했고 그 목소리는 엄마가 아무리 주의를 기울여 들어도 분명 내 아이의 목소리였다.
그 이야기를 들으며 이전에 들었던 '목소리'에 관한 또다른 일화가 떠올랐다.
"나 김정은한테서 축하 전화 받았어요. 들어보실래요?"
한 지인이 자랑스럽게 넘겨준 전화기에서는 북한의 김정은 조선노동당 총비서가 그의 유투브 채널 개업을 인민의 온마음을 다해 축하한다며 유투브 채널의 번영과 발전을 기원하고 있었다. 의심할 길 없이 걸걸한 총비서의 목소리였다. 물론, 동해에 미사일이 오가는 판에 그가 한국 유투버에게 축하전화를 할 리 없다. AI의 작품이라고 했다. AI에게 특정인의 목소리를 오래 들려주면 그의 말투와 목소리를 똑같이 재현할 수 있다는 것이다.
두 사례를 엮으면 피싱단은 이제 AI를 통한 음성 재현 기술을 범죄에 활용하는 것으로 보인다. 그렇다면 내 손안의 발칙한 물건은 내 개인적인 통화를 귀기울여 듣고, 녹음하고, 그 정보를 유출해 AI가 내 목소리와 말투를 똑같이 흉내낼 수 있도록 도왔다는 뜻이 아닌가? 우리는 피싱보다도 휴대폰에게 더욱 분노했다. 우리의 목소리는 어디에서 새어나가 범죄집단의 손에 들어간 것인가? 우리를 지켜주지 못한 통신사와 휴대폰 제조사에는 얼만큼의 책임이 있을 것인가? 그것은 무능일까 악의일까?
공원에서 과자 부스러기를 주워먹던 새 떼가 무리지어 인간을 공격하고, 아이를 돌보러 온 순한 얼굴의 보모가 내 가족을 살해하려 한다는 식의 뻔한 공포 서사에 우리가 질리지 않고 몸서리를 치는 이유는 평범한 외양을 가진 어떤 사악함이 우리의 일상에 집요하게 스며들어 마침내 균열을 내는 순간을 징그럽도록 치밀하게 묘사하기 때문이다.
우리가 누리는 소소한 일상의 배신, 일상의 붕괴는 우리 같은 보통 사람들에게 진정하고도 유일한 공포다. 불평 많은 배우자, 속없는 자식들, 직원복지가 형편없는 우리의 직장은 사실 우리가 가진 전부다. 그 보잘 것 없는 것들에 실금이라도 가는 순간 그것들이 얼마나 중요한 기둥이었는지 비로소 깨닫고, 그것이 손상된 이후 우리 인생은 이전과 결코 같을 수 없음을 절감한다.
소중한 젊은이들이 너무나 많이 다치고 생명을 잃은 그 사고 이후 마음아픔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다. 부디 앞으로는 더 이상 이런 비극이 없도록, 우리 사회가 무언가 나은 방법들을 배우길 바랄 뿐이다. 피싱 전화 한통으로도 쉽사리 흔들리는 우리 연약한 일상의 안위를 생각할 때 희생자와 부상자, 유족과 가족들의 고통은 가늠조차 되지 않는다. 온 마음을 다한 위로와 기도만을 드릴 수 있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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