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학의 뜰] 월동작물과 사랑

2022. 11. 18. 05: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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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수를 마쳤다.

볏짚을 모아 묶고 텅 빈 논에 자운영 씨앗을 뿌려준 뒤 텃밭으로 물러났다.

작물들이 텃밭의 흙과 편안히 만나 뒤섞이라는 하늘의 축복 같았다.

텃밭에 월동작물을 기르면서 겨울을 나는 것은 올해가 처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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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수 마치고 봄동배추 심고 
시금치는 비온후 싹 올라와
유채와 자운영까지 뿌리고
세이랑엔 푸른 보리로 채워
감나무옆 밭엔 쪽파도 심어 
힘겨울땐 겨울작물과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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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수를 마쳤다. 볏짚을 모아 묶고 텅 빈 논에 자운영 씨앗을 뿌려준 뒤 텃밭으로 물러났다.

서리가 내리기 전에 추위에 약한 작물부터 거뒀다. 가을에 심은 상추는 초여름에 심고 수확한 상추보다 작아도 맛이 더 진하다. 텃밭 주변 감나무에서 대봉감도 따고, 고양이들이 낮잠을 즐기던 덩굴 아래에서 호박도 땄다.

그리고 혹독한 겨울을 이기며 싹을 틔우고 잎을 내고 줄기를 뻗을 작물을 골랐다. 10월말에 심은 봄동배추는 이미 자리를 잡았고, 당근과 양파도 모종을 사서 두 이랑을 채웠다. 그 옆 두 이랑엔 시금치 씨앗을 뿌렸다. 모종과는 달리 씨를 흩뿌린 뒤 복토하고 나선, 과연 여기서 싹이 돋을까 걱정했는데, 물을 꼬박꼬박 사흘 동안 주고 가을비가 한차례 지나간 뒤 무리 지어 싹이 올라왔다.

재작년 겨울 논에 흩뿌렸지만 꽃을 제대로 보지 못한 유채와 올가을 논에서 뿌리다 남은 자운영 씨앗을 구해 나란히 심었다. 봄 새벽에 노란 유채꽃과 붉은 자운영꽃을 보면 잠이 싹 달아날 듯하다.

남은 세 이랑엔 뭘 심을까 고민하다가 보리를 골랐다. 유채꽃과 자운영꽃에 푸른 보리가 어울릴 것도 같고, 또 구수한 보릿국을 끓여 먹고 싶기도 했다. 이랑마다 두줄씩 홈을 파고 보리 씨앗을 줄줄이 뿌린 뒤 흙을 덮었다. 시금치 씨앗을 뿌렸을 때처럼 아침저녁으로 물을 줬다. 그런데 사흘째 저물 무렵 작업실에서 숙소로 돌아온 나는 텃밭을 보자마자 고함부터 지르며 달려갔다.

곡성성당 뒷마당 나무에 앉아 놀던 까치 대여섯마리가 한꺼번에 내려앉아 보리 씨앗을 콕콕 집어 먹고 있었다. 그날부터 틈만 나면 텃밭으로 가서 까치를 내쫓았다. 얼마나 보리가 자랄지 벌써 걱정이다.

쪽파는 이곳을 가꾸던 예전 농부가 따로 감나무 옆 직사각형 밭 세군데에 나눠 길러왔다. 쪽파 종구를 구해 심으려고 나갔는데, 두 밭에서 벌써 어린 쪽파가 올라오고 있었다. 초가을에 쪽파를 한차례 수확하고 흙을 갈아엎은 뒤론 물 한그릇 붓지 않았는데도 겨울을 앞두고 다시 싹을 틔운 것이다. 어린 쪽파들을 하나하나 살피고 빈 자리에 종구를 심었다. 남은 종구는 상추를 거둔 이랑에 옮겨 심었다.

열다섯 이랑을 월동작물로 채운 다음날 비가 내렸다. 작물들이 텃밭의 흙과 편안히 만나 뒤섞이라는 하늘의 축복 같았다. 비가 그치면 기온이 10℃ 가까이 떨어진다고 하니, 그때부턴 늦가을이 아니라 초겨울이다.

텃밭에 월동작물을 기르면서 겨울을 나는 것은 올해가 처음이다. 봄마다 당근과 양파와 시금치와 보리를 먹어왔어도, 이 작물들의 겨울을 떠올리지 못했다.

잎 다 떨군 채 추위를 견디는 활엽수와는 달리, 텃밭 월동작물이 어떻게 줄기와 잎을 지키고 뿌리를 살찌우며 뻗는지 살펴보려 한다. 활기차게 쑥쑥 자라는 봄과 여름과 가을과는 다르겠지만, 만물이 얼어붙는 겨울에도 가는 잎맥 끝까지 물과 양분을 옮기는 순간순간은 고요하면서도 거룩하다.

시인 진은영은 ‘긴 손가락의 시’에서 ‘내게서 제일 멀리 나와 있다. 손가락 끝에서 시간의 잎들이 피어난다’고 적었다. 영하의 기온에서도 조금씩 자라는 월동작물 잎은 내게서 가장 멀리 뻗어간 손가락의 끝이리라. 우리는 그 시간을 사랑이라고 부른다.

춥다고 서둘러 봄을 노래하진 않겠다. 새로 시작하는 이 겨울이 언제나 끝날까 걱정스럽고 힘겨울 땐 텃밭으로 가서 월동작물을 살피려 한다. 어제와 달라진 미세한 차이를 내 문장으로 옮겨 적으며 겨울 한가운데 가만히 머물겠다. 봄을 봄답게 맞고 싶다.

김탁환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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